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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수련자들, 필라델피아 차이나타운서 4·25 25주년 기념

글/ 미국 필라델피아 파룬궁수련자

[명혜망] 2024년 4월 20일 오후, 필라델피아시 파룬궁수련자들이 차이나타운의 모뉴먼트 아래에서 집회를 열고 4·25 평화청원 25주년을 기념하며 중공 정부에 파룬궁 박해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파룬궁수련자들은 연설, 진상자료 배포, 서명 수집 등 방식을 통해 행인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대중에게 25년간 지속된 중공의 파룬궁 박해를 제지할 것을 호소했다. 그날 많은 중국인이 진상을 알게 됐으며 32명의 중국인들이 현장에서 가입했던 중국공산당의 당·단·대 조직에서 탈퇴해 평안을 얻었다.

2024년 4월 20일 필라델피아 파룬궁수련자들이 차이나타운 모뉴먼트 아래에서 4·25 파룬궁 평화청원 25주년 기념집회를 열었다. 진상을 들은 지나가던 시민들이 앞다투어 지지 서명을 했다.

국제사회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가장 평화롭고 이성적이었던 청원”이라고 평가한 4·25 청원은 1999년 4월 25일에 발생했다. 그날 1만여 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이 베이징 국무원 청원사무실로 청원을 가서, 앞서 톈진에서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납치된 45명의 수련자를 석방할 것과 동시에 합법적인 연공 환경을 제공해줄 것을 당국에 요구했다. 납치된 수련자들이 석방됐음을 알게 된 파룬궁수련자들은 조용히 흩어졌으며 전 과정이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세 명의 수련자들이 당시 참여했던 4·25 평화청원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칭화대 출신 수련자 “파룬궁은 중국 대중과 전 세계에 희망을 가져다 줄 것”

칭화대 출신 수련자 왕란란은 자신의 4·25 청원 경험을 나누었다.

왕란란(王蘭蘭)은 1998년 3월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으며 당시 칭화대학 학부생이었다. “1999년 우리 학생들의 연공장에서 톈진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이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전후로 일부 수련자들이 연공할 때 방해받는 상황을 자주 듣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당시 국무원 청원사무실에 가서 청원하기로 결정하고 우리가 수련 후 심신에 이로움을 얻은 경험을 알리기로 했습니다. ‘4·25’ 당일 아침, 저는 동기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청원사무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큰길 인도에 서 있는 이들이 모두 파룬궁수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모두가 매우 소박해보였는데, 수련인들은 모두 ‘진선인(真·善·忍)’으로 자신에게 요구하기에 모든 사람이 매우 평화롭고 선량해 보였습니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 형제자매 같은 대가족의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모두가 매우 평화롭게 서서 청원사무실이 와서 우리의 상황을 듣기를 기다렸다. 하루 종일 기다린 후 톈진의 수련자들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모두 안전하게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칭화대 학생들로 하여금 박해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파룬궁 수련을 고집하게 했을까?

“박해가 시작된 후 우리 칭화대 학생들은 많은 방면에서 압력을 받았습니다. 학교 책임자와 교수님들이 자주 우리를 불러 수련을 포기하라고 위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강제로 몇 달간 휴학을 당했습니다. 주변의 일부 학생들은 우리가 장래를 포기했다고 생각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수련생이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박해로 인해 흩어져 떠돌아다녔습니다.”

왕란란은 이어 말했다.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왜 계속 수련을 고집하냐고 물었을 때, 저는 제가 수련 후 마음속이 늘 평화로운 상태인 것을 알았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고립되고 멸시를 당해도 제 마음은 늘 평화로웠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속에는 진선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사람이 되는 근본이라고 생각하며 진선인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선인의 신념을 갖고 세상을 대할 때 저는 매우 강대한 힘을 느꼈고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이 있음을 느꼈기에 이 25년을 평화롭게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란란은 말했다. “올해 다시 이곳에 와서 이 평화로운 마음가짐을 여러분께 전하며, 여러분께서도 이 25년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진상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파룬궁은 중국 대중과 전 세계에 희망을 가져다줄 겁니다.”

중의사 “파룬궁은 당시 사회에 맑은 기운을 가져왔다”

베이징 출신 중의사 궁친화(龔沁華)는 25년 전 4·25 청원 과정을 회고했다. 그녀는 당시 어머니가 톈진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이 납치된 일을 듣고 청원사무실로 청원을 갈 것인지 물어보자 온 가족이 함께 갔다고 말했다.

“인상 깊었던 일을 말하자면, 사실 저는 자라면서 중국에서는 한 번도 집회에 참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4·25가 첫 번째로 참가한 집회였습니다. 그 경험은 매우 독특했으며 분위기도 특별히 평화로웠습니다. 모두가 매우 조용하고 질서 있었습니다. 그 속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도 없었고 다른 생각도 없이 단지 자신들의 정상적인 요구만을 제기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전 과정이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그 집회에서 우리는 파룬궁이 공정한 환경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4·25’ 이후 사실 분위기가 더 긴장해진 것을 모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 정부는 방송에서 말한 것처럼 파룬궁에 합법적인 수련 환경을 주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연공할 때 여전히 방해를 받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주변을 서성이며 정황을 탐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련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 되려 하니 그들이 어떻게 보든 점차 우리의 장소에 동화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공이 이렇게 잔혹한 박해를 발동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궁친화는 4·25 청원이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했다. “긍정적인 작용은 인류 문명이 이어갈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천안문사건 이후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 사회와 정권에 대해 이미 믿음을 잃었지만 파룬궁은 당시 사회에 맑은 기운을 가져왔습니다.”

칭화대 박사 “4·25는 이 박해를 막을 마지막 기회였다”

당시 베이징 칭화대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황쿠이(黃奎)는 당시 4·25 평화청원을 직접 경험했던 상황을 회고했다. 25년이 지났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생생했다.

“1999년 4월 24일,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한 동기를 만났는데 그가 내게 다음 날 파룬궁수련자들이 톈진교육대학에서 구타와 체포 사건이 발생해 중난하이 국무원 청원사무실로 청원을 갈 것이라고 알려줬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꽤 중대하다고 느꼈고 이것이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선택이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톈진은 직할시이기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톈진에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상급인 국무원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무원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버스를 타고 중난하이로 갔습니다. 당시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좀 늦어서 9시가 넘었습니다. 당시 중난하이 서쪽과 북쪽, 푸유가와 원진가에 이미 파룬궁수련자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 조용히 인도에 서 있을 뿐 차량과 자전거는 막힘없이 다녔습니다. 당시 몇 명의 경찰이 형식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파룬궁수련자들은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므로 경찰이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평화’였습니다. 당시의 광경은 매우 평화로웠고 구호도, 표어도, 큰 소리로 말하거나 외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평화로웠습니다. 이 점은 다른 시위 활동과 매우 달랐습니다. 그들은 대개 구호와 격렬한 행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전혀 없었고 완전히 평화로웠습니다. 정말 파룬궁수련자들의 선량하고 인내하는 정신적 풍모를 체현해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차이나타운 모뉴먼트 아래에서 4·25 파룬궁 평화청원 25주년 기념집회를 열었다. 당시 칭화대 박사과정이던 황쿠이가 평화청원에 직접 참가했던 경험을 말하고 있다.

황쿠이는 “사실 ‘4·25’는 우리가 이 박해를 막을 마지막 기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파룬궁은 국가와 인민에게 수많은 이로움이 있고 해로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와 그 당에 사실 좋은 점만 있고 나쁜 점은 없었습니다. 만약 당시 ‘4·25’가 평화롭게 해결되고 이후에 박해가 없었다면 중화민족 역사상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황쿠이는 “‘4·25’는 하나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파룬궁을 세계 무대로 밀어 올려 단번에 전 세계가 모두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신앙의 내재적 힘이 그와 수많은 수련자들로 하여금 이 25년간의 험난한 세월을 걸어올 수 있게 했다고 믿었다.

시민들이 중공을 규탄하고 서명으로 파룬궁 박해를 반대하다

그날 차이나타운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중공의 파룬궁 박해에 충격을 받아 앞다투어 서명으로 파룬궁을 성원하고 중공의 생체 장기적출 만행을 반대했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미셸 존슨과 IT 업무를 하는 친구 루이스 지아노풀로스는 모두 서명으로 중공이 파룬궁 박해를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존슨은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파룬궁이 사람들에게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것(파룬궁 수련)은 좋은 일이며 합법적이어야 하고 정신과 신체에 모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중공이 폭리를 취하기 위해 파룬궁수련자들의 장기를 생체 적출하는 악행을 규탄했다. 루이스 지아노풀로스는 “누구나 자신의 장기와 신체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강제로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캄보디아에서 온 한 여대생은 파룬궁에 대한 소개를 들은 후 특별한 흥미를 보이며 파룬궁을 배우겠다고 했고, 미 의회의 중공 장기적출 규탄 결의안에도 성원 서명을 했다.

 

원문발표: 2024년 4월 24일
문장분류: 해외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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