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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목요일 법학습 교재 안내

부산 보도소 목요일 법학습 교재 안내

이번 주 목요일(2004. 10. 7) 법학습 교재는 아래와 같이 “미술창작연구회의에서의 설법 (2003년 7월 21일 워싱턴DC)”입니다.
ㅇ장소 : 대연동 로얄빌라트 B동 101호
ㅇ연락 : 조동주 011-854-7388

많은 참여 바랍니다

미술창작연구회의에서의 설법
(이홍지, 2003년 7월 21일 워싱턴DC)

여기에 자리한 수련생들은 모두 미술창작을 하는 사람들로서 모두 전문기능이 있다. 나는 어디까지 생각나면 곧 거기까지 말하겠는데, 나는 단지 법리상에서 말한다. 미술은 인류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인류의 기타 문화와 마찬가지로서, 인류사회에서 사람의 관념에 대한 일종의 유도(導向)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인류의 심미(審美)관념에 영향을 주고 있다. 무엇이 미(美)이며, 무엇이 인류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정확한 미의 감수인가 하는 이것은 인류의 도덕기준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만약 사람이 아름답지 않은 물건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면 인류의 도덕은 이미 끝난 것이다.

인류의 도덕은 같지 않은 시기에 일부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인류의 도덕자체는 인류의 예술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예술은 역으로 또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러분들이 보았듯이 오늘날의 예술 중 수많은 것들은 현대의식을 받아들여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류는 이미 인류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도덕의 범위와 표준을 훨씬 벗어났다. 그러므로 만들어낸 소위 예술은 이미 사람의 문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지와 맑게 깨어있는(淸醒) 가운데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사람의 정념과 선념(善念)이 예술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만들어 낸 진정한 인류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예술은 타락하고 있다. 현재의 예술을 놓고 말한다면, 엄격하게 말해서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는 항상 일부 소위 현대예술작품을 보게 된다. 심지어 그래도 매우 명망이 있는 작품들인데, 사실 모두 마성(魔性)의 산물이다. 비단 마성의 것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 느낌(感覺)을 찾을 때는 이미 귀신의 행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데, 계속 이렇게 해나간다면 심리는 필연 음침(陰暗)하고 괴이(怪異)하게 된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것을 할 때의 심리상태는 모두 인성(人性)의 악한 일면을 방종(放縱)하며 심지어 일부러 사악한 심리반응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이런 소위 현대예술의 것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그다지 좋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대하여 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감상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심리적인 상해를 입히며, 사람의 도덕관념에 대해서도 엄중한 파괴작용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제자는 수련과 생활가운데서 여전히 속인의 이 사회 환경을 이탈할 수 없으며, 여전히 현대인관념의 이 조류(潮流) 속에 있으며, 여전히 이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아주 많은 대법제자들은 대법을 배우기 전에 심지어 모두 현대예술을 배우고 취급하였다. 물론 내가 생각하건대, 당신이 현대예술을 하든, 인류에게 마땅히 진정으로 있어야 할 정통예술을 하든지 간에, 과거 당신들이 배운 기본기(基本功)는 마땅히 역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는 반드시 무엇이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예술인가를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곧 사람의 순정(純正)한 예술표준에 따라 할 수 있으며 좋은 것을 창작해 낼 수 있게 된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회의를 여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대법제자가 역사에서의 오늘날 한 일은 무엇이든 모두 지극히 중요하다. 나는 어제도 역시 말했듯이, 대법제자가 무엇을 하면 머지않은 인류사회는 모두 따라 배우게 될 것이다. 현재, 정법기간에 세상의 일체는 모두 대법을 둘러싸고 움직이고 있는데, 이는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삼계는 정법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과 이러한 문제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왜냐하면 이런 유(類)의 예술기능이 있는 대법제자는 능력이 있고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당신들이 해낸 일들이 만약 바르지 않거나 혹은 그다지 바르지 않다면, 당신들은 곧 바르지 않은 그 요소를 강화시키게 되며 인류사회에 더욱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수련이라, 당신들은 본래 자신을 수정(修正)하고 좋지 않은 일체를 수련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어디에서라도 마땅히 모두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예술이라는 이 영역에서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당신의 작품 중에서도 역시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하고 바름을 표현해야 하며 순수함을 표현해야 하고 선(善)을 표현해야 하며 광명을 표현해내야 한다.

인류사회의 도덕이 이 일보(一步)에까지 미끄러져 내려왔을 때, 인류의 관념도 이러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이 일보에까지 변화․발전되었다면, 사람더러 스스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사람, 어떠한 이론, 어떠한 방법도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되돌아가게 할 수 없으나 오로지 대법만이 할 수 있다. 당신들은 나를 따라 중생을 구원하러 왔으며, 동시에 우리가 중생을 구원하는 의의 중에는 인류의 도덕을 구원함과 구원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미래에 존재하고 어떻게 생활하며 어떠한 상태에서 생활하는가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대법제자는 비단 중생을 구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중생에게 사람이 생존하는 진정한 한 갈래의 길을 개척해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삼계가 앞으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법정인간시기에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제자가 오늘 하는 어떠한 일도 모두 지극히 중요한 것이며, 또한 모두가 미래사람․미래문화에 기초를 개창(開創)해주고 있다. 근대 인류의 일체는 모두 난잡해졌고,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고만한 정통적인 것조차도 거의 다 없어지다시피 했으며, 순정(純正)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다행히 고인(古人)들이 일부 문화유산을 그나마 남겨두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지 않았다. 특히 미술방면에서 일부 기본기(基本功)의 학습을 남겨두어 인류는 그래도 인도(人道)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중에서 미술을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부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이러한 것들을 운용하여 진정한 사람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어떻게 좋은 것들을 창작해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엔, 기본기(基本功)의 기초가 있고 대법제자가 수련 중에서 인식하게 된 진정으로 선한, 바른, 순수한 아름다움을 더하면 바로 좋은 것을 표현해낼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 말한 김에 나는 또한 내가 보게 된 인류의 발전상황과 인류예술의 발전과정을 말하고자 한다.

사실 인류의 동․서방의 예술은 모두 하나의 성(成), 주(住), 괴(壞)의 과정이 있다. 동방의 예술과 서방의 예술은 두 갈래의 같지 않은 길을 걸었는데, 이것은 사람의 말로 이야기 한 것이다. 사실은 두 개의 부동한 우주 대체계(大體系)가 각자(各自)의 가장 낮은 층차상의 생명, 즉 사람의 예술생활방면에서 구체적으로 체현된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그 우주체계의 것들이 가장 낮은 층차의 사람 여기에서의 표현이다. 사실 우주 중에는 수많은 많고 많은 부동한 대궁(大穹)이 있는데, 상당히 많으며 모두 독립적이고도 거대한 천체이다. 매개 대궁 중에는 모두 그의 독특한 구조가 표현해낸, 각자(各自)가 각 방면에서의 부동(不同)한 풍격(風格)이 있는데,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면 바로 역시 부동(不同)한 예술특징이 있는 것이다. 매개 거대한 천체는 모두 眞善忍(쩐싼런) 근본법리 중에서 인식해낸 부동(不同)한 바른 깨달음의 이치(正悟之理)가 있다. 이렇게 되자 부동한 천체체계는 모두 그의 자체체계의 독특한 특징이 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천지의 구조․환경형태․생명의 형식․생명의 장식(裝飾)․건축풍격(風格)․동식물의 표현형식 등등에서 표현되었으며, 그것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독특하고 바른, 미를 표현하는 방식․우의(友誼)와 은혜를 표현(表達)하는 방식이 있다. 그렇게 많은 우주체계 중의 조화(造化)가 사람 여기에 전해지게 되면 기본상에서 두 개 체계 저층생명(底層生命)의 표현방식이 있는데, 동․서방예술이 포함된다. 그러나 거대한 궁체(穹體) 중에는 결코 이러한 것뿐만이 아니며,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 여기에 전해진 것은 오로지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이 두 가지 예술체계를 놓고 말하면 동․서방 각자의 민족문화 중에는 모두 몇 천 년의 계승(承襲)과정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 예술의 풍격(風格)은 오히려 서로 크게 다른바, 기법상(技法上)․표현방식상․감수상․시각상에서 모두 같지 않았다. 중국예술의 계승과정 중에는 시작에서부터 바로 하나의 반신(半神)의 문화를 다졌다. 다시 말해서 절반의 중점은 사람의 표면에 놓은 것이 아니라 신의 기품(神韻)과 내포에 두었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를 포함해서 표현상에서 모두 이러한 하나의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미술방면에서 표면 세부의 표현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고, 뜻(意)의 표현을 중히 여겨, 그것의 내포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서방의 예술 또한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중점은 사람의 표면문화에 두어, 기법상의 출중(高超)․정확(準確)․세밀․진짜 같은(逼眞) 신공(神工)을 돌출시켰으며, 표현의 중점을 사람 표층공간기능의 표현에 두었다. 그러므로 미술작품 중 물체표면에 대하여 표현함에 있어서 매우 세밀하고 정확하였으며, 그러므로 서방과 중국의 예술풍격의 두 갈래 길은 같지 않았다. 발전 과정 중에서, 서방예술은 전 한 시기 문명으로부터 계승하여 내려온 것이다. 사실 서방예술은 앞의 몇 차례 문명 중에서 줄곧 일종 학술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연속되었고, 학교가 있고 이론이 있으며 정규적 훈련이 있었으므로 그것은 줄곧 이러한 한 갈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동방예술은 연속 중에 줄곧 민간에서 유전되었으며, 문인(文人)과 장인(匠人) 및 도를 구하는 자들 가운데서 유전되어, 계통적인 이론이 없었고 학교가 없었으며 정규적인 훈련이 없이 완전히 개인경험에 의거하여 작품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조소(彫塑)작품이 그렇다. 중국인의 문화특징으로 인하여, 표현한 회화(繪畵)와 조소(彫塑)는 기본상 역시 중국인의 문화성격이 작용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비자각적으로 바로 뜻(意)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놓고 볼 때, 표현수법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사람의 가장 표면에 입각해서 보면, 서양예술은 수법상에서 매우 세밀하였고 명암․구조․투시관계에 대하여 반드시 정확할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인체의 구조를 표현함에 있어서 모두 매우 정확하였다. 그러나 중국고대의 미술 중에서는, 그것은 계통적인 이론과 전문적(專業的)인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표현된 가장 표면의 물체구조로 하여금 정확성의 부족함을 조성하게 하였다.

예술의 길은 언제나 그것의 초기로부터 고봉(高峰)으로 갔다가 다시 떨어져 내려오며, 인류의 모든 문화 역시 이러한 일종의 방향이었다. 과거우주특성 중의 성(成)․주(住)․괴(壞)․멸(滅), 인류의 일체는 모두 그 속에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도덕이 나빠졌을 때가 되면 무엇이든 모두 나빠져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인류를 놓고 말하면 바로 재난으로서, 일체가 모두 결속되고 일체는 또 바야흐로 새롭게 시작되며, 다시 정상으로 걸어나갔다가 다시 떨어져 내려오며 반복적으로 거듭된다.

중국고대의 미술 그것은 계통적인 연구와 전문적인 학습이 없었기 때문에, 인체와 물체에 대한 투시관계를 기본적으로 정확히 장악하지 못했다. 청조 말기 이후 중국 미술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서방미술의 기본기의 기초가 있게 되어 작품은 표면외형상에서 정확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일부의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른 후, 특히 최근 20여 년에 중국도 현대의식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작품도 갈수록 형편없게 되었다. 관념은 사람의 의식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서, 만약 사람의 정념(正念)이 주도적 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사람표면의 의식의 감수에 완전히 의거하여, 진념(眞念)의 인식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청성(淸醒)한 사고가 없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영혼이 없어진 것과 같게 된다. 사람의 의식은 후천적으로 사람의 표피에서 형성된 것이며 표면상 단지 사물에 대한 무의식(下意識)적인 반영일 뿐이다. 의식은 불안정한 것이며, 수시로 변하게 되며, 외계조건의 변화와 사회형식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게 되는 것으로, 완전히 이러한 것들에 의거하는 것은 주념(主念)이 없는 것이며, 더욱이 계통이 없고 규범이 없으며 정념이 없고 진정한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의식의 상태하에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소위 현대예술․현대미술작품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이 흥행한 초기는 바로 가장 일찍 나타난 서방의 인상파와 추상파의 그러한 것들이었다. 당신들이 냉정하게 그러한 것들을 보면, 보증컨대, 사람의 진념이 없이 사람의 표면관념에 따라 만들어낸 것과 같고, 계통적이지 못하고 규범적이지 못하며 규칙적이지 못하고 연속적이지 못한바, 표현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사람에게 주는 미의 감수가 없으며, 사람의 표면의식에 따라 나온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이 만들어 낸 그런 작품들을 볼라치면, 그 무슨 코가 비뚤어진 것, 얼굴이 반쪽인 것, 한쪽 발이 뒤에 달려있는 것이 있는데, 시작부터 그런 것들은 바로 주념(主念)과 정념을 포기하고 만들어낸 것으로서, 후천적인 관념이 사람의 사지를 사주(指使)한 산물이었다. 사람의 主意識(주이스)를 포기하고 임의대로 표면의 사람의 관념이 작용을 발휘하여 비로소 이러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들의 출현은 거의 전 인류의 가장 정상이고 가장 완미(完美)한 서방의 예술을 훼멸시켜버렸으며 근대에는 중국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것은 그래도 현대예술에서의 초기였다. 왜냐하면 사람의 관념이 사회의 정체(整體)도덕에 따라 갈수록 패괴(敗壞)되어갈 때, 관념 그것은 거기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역시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다. 애초의 그러한 인상파․추상파의 것들은 정확한 투시관계․명암의 과도(過渡)와 구조의 정확성을 완전히 관계하지 않았고, 갈수록 소위 개인의 감수를 추구하였으며, 착오적으로 이런 무이성적(無理性的)인 방종을 자아인성(自我人性)의 해방으로 여겼다. 이것은 진정으로 본성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며 자아진아(自我眞我)가 없는 후천적 의식의 방종이었다. 색채에 있어서 강렬하게 칠하며, 깨어있는(淸醒) 이념이 없는 관념을 완전히 방종케 한 일종 감수이다. 아울러 관념은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그것은 사람의 진정한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불규칙적이고 규범적이지 못하며 계통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칠해낸 것도 역시 이러하며 보면 완전히 조화롭지 못하다. 후기에 이르러 사람의 도덕관념이 갈수록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에 따라 그것은 더욱 저하된 일종의 의식으로 진입하였으며, 아울러 이런 저하된 의식은 곧 사람의 관념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주념(主念)․진아(眞我)가 사람표면을 지배하는 것을 포기할 때, 그럼 외래의 생물이 곧 틈을 타고 들어오게 된다. 이 일보에까지 걸어오게 되면 이미 외래의식이 인체의 대뇌를 조종한 것이며, 그러므로 일부 색채상에서 더욱 침울하고 더욱 음침(陰暗)하며 빛 역시 음산하고 흐릿하며 완전히 인성(人性)이 퇴패(頹敗)한 심태(心態)의 표현이 나타났다. 더 미끄러져 내려가면 사회의 명(名)․이(利)의 부추김을 더하여 완전한 자아 포기를 추구하는데, 이때는 후천적 관념도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자아가 없는 하나의 껍질(軀殼)은 외래의식에 의해 100 %통제되며, 아울러 이런 외래의식은 또 다수가 저승의 생물로서, 귀혼(鬼魂)이 다수를 점한다. 이것 역시 인류의 도덕이 나빠질 때의 천상변화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음성생물(陰性生物)에 의해 통제될 때, 그려낸 것을 보면 표현한 것이 바로 저승과 저승의 물체이다. 많은 그림들은 보기만 하면 귀신의 세계를 표현하였으며, 흐릿하고 캄캄하며 우중충한데, 그려낸 소위 인물들은 모두 혼과 같다. 저승의 땅, 저승의 하늘, 이러한 감각을 사람은 무엇 때문에 좋다고 느끼는가? 이것은 사람의 정념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음암(陰暗)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인류도덕의 큰 패괴(敗壞)가 아닌가? 그럼에도 이것은 단지 사람이 사람보다도 더 낮은 그 한 층의 공간으로 걸어나간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도덕은 여전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러서 예술은 한창 인류 마성(魔性)이 실재적이고도 실재적으로 펼쳐 보여주는(展現) 것으로 되고 있으며, 예술은 이미 신성한 예술에 대한 모독으로 걸어 나갔으며, 완전히 마성발산(魔性發泄)의 공구로 되어, 표현한 것은 요(妖)․마(魔)․귀(鬼)․괴(怪)이다. 예술가 자신도 “이는 모두 쓰레기이지만 소위 예술의 조류 중에서는 오히려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승인한다. 쓰레기가 어떻게 가장 좋은 것이 되겠는가? 왜냐하면 사람의 관념이 반대로 되었기 때문에 쓰레기가 가장 좋다고 인식한다.

이것은 사람의 미술역사로서, 내가 금방 하나의 대체적인 과정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다시 서양예술로부터 이야기하겠다. 여러분 알고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엇 때문에 프랑스사람들더러 투항하게 하였는가? 프랑스 사람들은 싸울 능력이 없는가? 이 민족도 한때 나폴레옹․루이 14세 같은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 민족 역시 휘황한 역사가 있었지 않았는가? 사실 인류의 전쟁은 신이 통제하는 것이며 목적이 있게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람이 뭘 나타내려고 해도 안 된다. 프랑스는 직접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속으로 투입되지 않았는데, 신의 목적은 이번 인류문명 중에서 겨우 남은 프랑스의 그런 예술품을 보존하려는 것인바, 그것 또한 인류가 이번 문명 중에서 가장 휘황하고 인류가 가장 긍지를 느낄 가치가 있으며 진정한 인류의 가장 정통적이고 가장 완미한 예술이다. 만약 전쟁을 치른다면, 루브르궁과 베르사유궁전 등에 보존한 예술품은 모두 없어지게 되며, 파리 거리의 그런 예술도 없게 된다. 신이 사람에게 요만한 것들을 남겨주려고 했으며,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에 그래도 사람자신의 예술을 되찾아오는 참조가 있도록 하려는 것인바, 대법제자들도 이런 정통예술의 기본(功底)으로부터 되돌아 걸어올 수 있는 것이다.

서양예술은 과거 몇 차례의 문명 중에서, 사람은 모두 학술의 방식으로 새롭게 성숙되어 전 한 시기(一期) 문명의 길을 걸어 지나왔다. 그러나 전 한 시기(期) 문명이 훼멸된 후에는 기본기(基本功)가 미숙한 시기가 나타나게 된다. 여러분들은 서방의 미술작품 중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文藝復興) 이전의 작품과 르네상스시기의 작품, 르네상스시기 이후의 작품과 근대의 것, 이러한 하나의 과정이다. 르네상스 이전, 총체적으로 보면, 작품의 예술수준은 매우 성숙되지 못했다. 구도(構圖)․구조․비례․색채 등 여러분들 모두 보았으며 매우 성숙되지 못하였다고 느낀다. 회화와 조소를 막론하고 모두 성숙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 서양에서 출토된 문물가운데서 일부 전 시기 문명의 것들을 파냈는데, 일부의 신상(神像)이 있었으며, 또한 전 한 시기 고대 그리스문명 중의 기타 조소 작품도 있었으며, 모두 매우 성숙되고 완미(完美)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고대 문명의 기초가 있기 때문에 서양예술은 또 매우 빨리 성숙으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이전의 것이 있어서 배우고,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성숙됨이 매우 빨랐다. 르네상스시기 이후가 되어 다빈치와 그러한 예술가들의 출현도, 사실은 신(神)이 의도적으로 그들더러 사람을 이끌고 예술의 성숙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며 사람에게 어떻게 작품을 완성하는가를 알려주게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 그들의 작품은 인류에 대한 영향이 매우 컸다. 그러나 근대의 현대 예술 역시 일부 다른 유형의 신이 배치한 것인데, 바로 오늘날 정법을 좌우한 구세력 무리이다.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반 고흐가 나왔는가?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피카소가 나왔는가? 이런 사람들 역시 그것들이 배치하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면(負面)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며, 목적은 바로 인류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갈 때 인류문화 중의 일체 역시 모두 동시에 패괴(敗壞)되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바로 인류의 예술을 난잡하게 만들려고 온 것이며, 바로 인류예술을 패괴(敗壞)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완전히 인류의 문화를 훼멸시켜버리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들이 애초에 소위 현대파(現代派)에 대한 기초를 다졌기에, 인류의 예술은 비로소 오늘날 이러한 하나의 마성(魔性)의 상태로 걸어오게 되었다.

당초에 서방정통예술은, 소위 인상파의 공격을 받고 있었을 때는 바로 사진기술이 나타날 때였다. 논쟁(論戰) 속에서 소위 그러한 인상파들의 가장 전형적인 말은 “당신이 아무리 정확하게 그려도 사진 찍는 것처럼 정확하겠는가?”라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물체를 비슷하게․진실하게․정통적․표준적으로 그린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사실 정통적 예술은 사람에 대하여 놓고 말하면 높은 질의 완벽한 추구이며 끝이 없는 것이다. 정통 예술공간은 매우 광의적(廣義的)이다. 왜냐하면 완벽하고 좋은 한 폭의 작품은 비단 마치 진짜와 같을(逼眞) 뿐만 아니라, 사실 또한 작자 본인의 자신의 인생체험과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작자가 인생 중에서 접했던 것, 인생 중에서 장악한 여러 면의 각종 학과의 지식과 기능은 모두 그의 작품 중에서 표현되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똑같은 것도 작품 중에서 매 개인이 표현해낸 것은 모두 같지 않은바, 색채에서 표정과 태도로부터 기법에 이르기까지 장악한 정도를 막론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매 개인의 인생경력은 같지 않고, 작자의 성격특징도 같지 않기 때문에 모두 작품으로 하여금 차이가 있게 한다. 게다가 표현하려는 것은, 대천세계와 더욱 높은 경지의 생명으로부터 신 및 신의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를 펼쳐 보여주는(展現) 것이다. 그러므로 끝이 없는 광명대도(光明大道)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알고 소조(塑造)할 줄 아는 예술가들은 사상의 대부분을 모두 자신의 예술에 쏟아 부었기(灌注) 때문에 다수는 언사(言辭)에 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릴 줄 모르거나 소조(塑造)할 줄 모르는 그런 자들은 오히려 말솜씨가 좋으며 하는 말은 모두가 생억지로서 사진 찍는 기술(照像術)의 진(眞)을 논하는 이론으로 정통예술을 뒤엎었으며, 점차적으로 오늘날의 이러한 정도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당시의 초기에 정통예술을 뒤엎으려고 한다면 미술을 완전히 알지 못하거나 미술을 모르는 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초기에 배치한 그 몇몇의 현대파의 대표 인물들도 그들로 하여금 아동 시절에 먼저 기본기(基本功)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이래야만 비로소 세인들을 더욱 미혹시키게 할 수 있었다.

당초 대학파가 인상파․추상파와의 정(正)과 사(邪)의 논쟁(論戰) 중에서, 인류도덕과 관념의 하락이 인류 진정의 신성한 예술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정통예술가들은 생존을 위하여 겨우 조그마한 작디작은 공간을 짜내었는데, 현재는 정통예술을 “사실파(寫實派)”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설이 없었다.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더러 인류가 숭상하는 선과 미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는 인류의 도덕에 대하여 바른 면(正面)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인류도덕의 패괴(敗壞) 때문에 정통의 인류예술은 오히려 마성으로 발전하는 추세에 의하여 정식의 대학전당으로부터 밀려나왔다. 정통예술은 생존할 수 있도록 위하여 사실파(寫實派)로 변하였는데, 사실(寫實)이란 설(說)은 바로 이렇게 온 것이다.

현재의 인류는 무엇이든 모두 이렇게 반대방향의 방면으로 걷고 있다. 당신들은 발견하였는가? 그러한 발성(發聲)할 줄 모르고 악리(樂理)를 모르며 무도(舞蹈)의 기본기(基本功)가 없는 자들이 가수․무용 스타로 되었으며 진정한 예술가들은 오히려 밥그릇을 잃게 되었다. 심지어 머리를 깎을 줄 아는 사람조차도 거리로 밀려나가서 노점을 하게 되었으며 머리를 깎을 줄 모르는 자들은 오히려 아주 화려한 미용실 안에 있다. 인류의 일체 것들은 모두 반대의 방향을 향하여 미끄러지고 있으며 모두가 이렇게 패괴(敗壞)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소위 그러한 현대파들이 과거에 추구한 것은 바로 그 무슨 개인의 감수였으며, 후에는 자아의 통제상실(失控)로 나아갔고 현재는 자신의 신체를 귀신에게 맡겨 조종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한 폭의 소위 현대파의 것을 거기에 걸어놓고 사람들더러 보게 하면서 ‘아, 이 그림이 얼마나 좋은가 보시오’라고 한다. 그가 가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가 좋다고 말한 것이 어디가 좋은지를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말한 좋다는 것은 오히려 마성의 것이며, 아울러 예술에 대한 유치하고 가소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의 사상이 그를 따라 그의 그 마성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가 말한 소위 좋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낼 수 없다. 사실 그러한 물건들은 모두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쓰레기들이다.

당연하다. 많은 사람들은 조류(潮流)에 따라 떠들썩하는 것으로서, 대다수의 민중들은 현대파라고 하는 그 일련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모두를 쓰레기라고 당신이 말하면, 이러한 것을 하는 그러한 사람은 쓰레기 같으면 같을수록 더욱 좋다고 말한다. 여러분들은 모두 들었다. 중국에 그 무슨 소위 예술가라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죽은 아이의 고기를 먹는다. 지난 한 동안 보도를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바로 마성을 추구하여서 비로소 이 한 걸음에 이른 것이다. 이 일체가 더 발전해 내려간다면 무섭지 않은가? 인류의 예술이 이렇게 내려간다면 장차 무엇으로 나아갈지 사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또 인류의 예술은 마땅히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를 말하겠다. 인류의 예술은 사람자체를 표현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산수(山水)의 환경을 표현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신을 표현하기 위함인가? 귀신을? 알아야 할 것은 인류의 진정한 예술은 우선적으로 신의 전당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신이 사람에게 이런 종류의 문화를 전해준 다른 하나의 목적 역시 사람들더러 신의 위대함을 보게 하려는 것이며, 선악에는 보응이 있어 악을 행한 자는 악한 보응이 있고 좋은 사람은 복으로 보답을 받게 되며, 수련자는 천당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방예술의 출현, 시작은 모두가 교회에서부터였다. 동양의 조기(早期) 조상(造像)은 거의 모두가 신의 소상(塑像)이었으며, 중국에서 유전하여 내려온 가장 오랜, 가장 초기 회화(繪畵)에서 그린 것 역시 모두 신이다. 사람이 신을 그리는데 또한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 것이다. 광활한 우주, 방대한 천우(天宇)의 일체를, 사람이 정말로 신을 믿을 때, 정말로 신을 표현할 때 신은 사람에게 펼쳐 보여(展現) 준다. 그것은 가장 완벽하고 가장 신성하며 또한 인류의 동경과 가장 아름다운 귀착(歸宿)으로서, 작품의 표현도 끝이 없게 된다.

여러분 알다시피 사람이 신을 그리려면 그것은 사람을 모방해야 한다. 이것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이 자신의 모양에 따라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기본기(基本功)의 연습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는 것도 안 되는 것이 아니며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필경 세간(世間)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산수를 그리는 것은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류 미술작품의 창작중심은 마땅히 신이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라, 사람은 업력이 있다. 당신들은 대법제자들로서 모두 알고 있는바, 사람들이 그린 일체는 모두 작자본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예술가의 작품 중, 그 개인의 일체 정황과 모델(被畵者)의 일체 정황은 모두 그 그림에 지니게 된다. 보통의 한 속인이 한 필을 그리면, 나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그에게 어떤 병이 있으며 얼마나 큰 업력이 있으며 사상정황․가정정황 등을 바로 알게 된다. 아울러 모델이 된 사람도 역시 그림 속에서 그 본인의 일체 사상과 그 신체가 지닌 일체 요소, 업력의 대소(大小)를 포함하여 충분하게 체현되어 나온다. 누가 그려진 이 인물화를 집에 걸면, 그러면 그림 속의 인물의 업력도 그림 속으로부터 발산(散發)되어 나온다. 이러한 물건을 집에 걸어놓으면 그 사람에게 이득이 있는가? 아니면 피해를 보고 있는가? 업력은 발산되며, 그는 그 사람과 연대를 갖게 된 것으로, 끊임없이 그림을 건 사람의 집 속으로 발산시킨다. 사람들은 물체의 연대관계를 보지 못하는데, 사실 사람들은 모두 불편한 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신을 그리려고 하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신은 광명하며 위대하며 자선(慈善)의 에너지를 발산시키고 있으며,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다. 아울러 그림제작자와 조각자(塑像者)는 모두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 중에서 이익을 얻게 되며, 동시에 작자는 신을 창작하는 예술작품 중에서도 역시 선념(善念)을 생성시키게 되어 이로부터 신은 또 그를 도와 아마 정념을 강화시킬 수 있으며 그 작자 신체상의 업력과 사상업력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을 사람이 본 후에는 이득이 있게 되며 흉금이 넓어지게 되며 사상 중에는 선념(善念)이 있게 되며, 인격으로 하여금 더욱 고상하게 한다. 신은 사람에게 정념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또 사람을 도와 위난(危難)을 해소시켜 주게 된다. 이는 인류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떤 것이 좋은 점이 있는가? 그러한 정통적인 작품, 신을 그린 그러한 천장․벽화, 또 신을 조소(彫塑)한 그러한 소상(塑像)을 나는 보기 좋아한다. 내가 보고 난 후 인류에겐 아직도 되돌아올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늘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작품은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신상(神像) 그쪽의 신 역시 정말로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비로부터 보면 여러분들은 인류의 예술이 마땅히 신을 표현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가?

물론, 현대사회의 예술은 그림과 조소 작품뿐만이 아니라, 또 공예미술․광고․복장․무대예술․TV․영화․제품조형 등이 있으며, 여러 방면에서 예술과 관련이 있는 업종이 있는데, 다시 말하면 모두 미술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어느 업종을 막론하고 만약 작자본인이 하나의 바른 기초를 다졌다면, 당신이 가서 무슨 작품을 창작하든 모두 바른 요소가 내비치며 모두 아름다운 것이고 모두 선한 것으로서, 모두 사람더러 이익을 보게 한다. 꼭 이러하다. 대체적으로부터 말해서 내가 보게 된 인류예술은 바로 이러하다.

방금 나는 동서양예술 중에도 여전히 조소(彫塑)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조소를 언급하니, 사실 동양의 소상(塑像), 그의 출처와 역사과정을 나 또한 말해보고자 하는데, 단지 본 차례 문명 중의 정황만을 말한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 들어오기 전에 수많은 조소 작품의 풍격은 모두 전 한 시기(一期)(다시 말하면 대홍수 이전)의 문화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불교가 중국(中土)에 전해 들어온 후와는 완전히 같지 않은 예술풍격을 갖고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본 차례 인류문명을 대표하는 동양의 조소 작품은 마땅히 불교의 부처․보살과 신을 표현하는 것을 대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기(早期)작품의 조상(造像)수법은 인도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아울러 인도의 조상수법은 또 이번 한 시기 인도의 불교 이전의, 부처를 믿던 시기로부터 남겨져 내려온 것이다. 아울러 전번 한 시기의 인도인들이 믿던 부처는 또 유럽의 고대 그리스인들 중, 부처를 믿는 사람들이 인도로 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더욱 조기의 유럽인들 중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부처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부처를 믿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 기타의 신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인도에 전해 들어온 후 부처의 형상과 조상(造像)의 수법도 인도로 전해 들어왔다. 그러므로 중국의 불상을 만드는 수법의 초기는 기본상에서 고대 그리스식이었다. 여러분이 보게 된 아주 많은 조기(早期) 부처의 소상은 안와(眼窩)가 깊으며 미릉골, 안면 부의 윤곽과 서양인의 윤곽은 같다. 코가 곧을 뿐만 아니라 매우 네모났다. 원인은 바로 고대 그리스가 더욱 초기의 부처의 문화를 인도로 전해주었으며 또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해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조상자(造像者)의 작품은 또 모두 그 본인의 요소가 있었기에 중국(中土)으로 전해 들어온 후의 조상(造像) 중, 부처의 형상은 또 중국인을 좀 닮았다. 중국으로 전해 들어온 시간이 점차 갈수록 길어짐에 따라 고대 그리스 문화가 중국으로 전해 들어온 초기 때의 요소를 점차 잃어버리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더욱더 중국향토의 느낌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사람의 표면의 문화에서 말하는 것이며, 그 외의 원인이 또 있다. 불교가 중국(中土)으로 전해 들어온 후, 확실히 수많은 사람의 副元神(푸왠선)은 부처․보살로 수련되었다. 그러나 중국(中土)의 그때는 계통적 학술체계가 없었고 조상(彫像) 또한 모두 석공(石匠)과 수도자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서양의 조소(彫塑)와 서로 비교한다면 매우 전문화 되지 못하였으며, 기본상에서 신체구조의 비례를 정확히 찾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중국의 수많은 조상(造像)은 어떤 한 파(派)의 작품의 특징이 아니라 기술이 성숙되지 못함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금방 나는 대체적으로 매우 간단하게 인류예술의 발전과정과 그것의 내원(來源)의 윤곽을 설명하였다. 과거의 예술은 통상적으로 신에 대한 표현이며, 신이 사람에게 이러한 것들을 전해준 것 역시 인류에게 ‘신이 인류를 비호(庇護)하고 있으며, 사람이 잘하면 곧 선과(善果)가 있게 된다.’ 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예술가의 작품 중에는 모두 어떤 것을 표현하려는 하나의 주체와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구도(構圖) 중에서 어떤 하나의 화면을 구상(構思)하며 당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 그 자신이 표현하려는 의의가 그 속에 있는데, 다시 말해서 그것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서방의 정통예술을 볼 때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특히 르네상스시기의 미술작품으로서, 오로지 그것의 화법(畵法), 수법만 보았다. 이것 역시 기본기(基本功)를 아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런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중에서 표현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므로 내가 회화와 조소작품을 볼 때 신변의 수련생은, 이것은 무엇을 그렸습니까? 라고 나에게 묻는데, 나는 그들에게 그린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었다. 물론 당신들 여러분들은 모두 예술을 하는 사람들로서 또한 매우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공동으로 탐구해보는 것도 무방하다. 그림 몇 폭을 골라서 나도 그림 중에서 표현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는지 말해보겠다. (박수)

여러분 앉으시오. 방금 내가 이러한 그림들이 표현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여러분들도 모두 내가 말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대법제자들더러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신들도 자기의 생각들을 말해보도록 하라, 어떤가?

문: (번역문) 우리는 박해를 표현하려고 하는데 대법제자가 형벌을 받는 형상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사부님: 표현할 수 있다. 대법제자가 박해당하는 정경을 표현할 수 있으며 대법제자가 법공부하는 것․연공하는 것․대법이 널리 알려진 후의 신과 천상의 풍경, 이것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

문: 우리가 대법제자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홍법하는 과정 그리고 행진과 같은 등등을 창작해도 괜찮습니까?
사부님: 이것을 모두 표현할 수 있지만 관건은 당신들이 구상과 창작 중에서 수준을 창출해야 한다.

문: 사부님, 중국의 사의(寫意), 중국의 일부 저명한 화가의 대다수는 사의(寫意)를 그리는 이들과 산수(山水)를 그리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그릴 수 있습니까?
사부님: 사의(寫意)는 문제가 없다. 중국화, 산수화 역시 괜찮다. 그것은 대법제자가 그린 것이기 때문에 전시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들은 대법제자이므로 지금 여러분 모두 다 법을 실증하고 있으며 중생에게 미래를 창조해 주고 있으므로, 가능한 한 진상을 알리고 사악을 폭로하는 것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 특히 이 시기에 이것은 대법제자의 책임이다. 사악을 폭로하고 대법을 펼쳐 보여주고(展現) 신을 펼쳐 보여준(展現) 이러한 작품이 좀 더 많으면 좋으며 이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대법제자의 기타 작품도 전시할 수 있다. 
  
문: 사의(寫意)는 변이(變異)에 속합니까?
사부님: 내가 말한 사의(寫意)는 작품 속에서 내포를 표현함을 말한다. 만약 사람이 정통정념(正統正念)의 도덕기초에 서서 정감을 표현하면 문제가 없다. 관건은 정념으로 창작하는가 아니면 소위 그 현대의식을 추구하는가, 정통표현수법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현대파 관념으로 표현하는가 하는 것인바, 문제는 의(意)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 사부님, 저는 한 가지 묻고자 하는데, 방금 전에 당신께서 말씀하신 이 작품들은 모두 서방 신의 형상에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그렇다면 대법제자로서 중국과 서방(西方)이 용합(溶合)된 이와 같은 그림을, 우리는 그들의 그림을 어떻게 참조하면서 또한 우리 자신의 동방의 특점이 있게 합니까?
사부님: 동서방인 형상의 신을 한 작품 속에 그리는 것은 문제가 없다. 정법 중에서 아주 많은 부동한 신들이 모두 바른 면(正面)의 작용을 일으켰다. 아주 많은 중국화들은 모두 아주 좋고 모두 긍정할 수 있다. 수법상에서 기교상에서 더 제고한다면 이것은 모두 문제가 없다. 만약 중국화와 서방유화를 한 폭의 그림에 체현한다면 아주 어려울 것 같다. 동․서방의 수법을 한곳에 용합(溶合)시키는 이 선례를 아직 연 사람이 없다.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니게 만들지 말라.

문: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더 높은 층차에서 말할 때, 동․서방의 아주 많은 신들은 모두 부처 이하의 층차인데, 만약 우리가 한 폭의 비교적 거대한 작품을 표현해내어 이 작품 속에 모두 있게 하여도 괜찮은지요?
사부님: 당신이 한 폭의 대작품을 창조하려고 하고 작품 속에 동방․서방인물 형상의 신이 동시에 있게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일부 도(道)를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또 일부 서방인 형상의 신을 그려서 동일한 작품 속에 있는 것은 문제가 없다. 만약 동일한 작품 속에 한쪽은 유화수법이고 한쪽은 중국화수법이라면 내가 봤을 때 안 된다.

문: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작품 중에서 주로 광명(光明)한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물론 어떤 작품은 내포가 비교적 많기 때문에 속에는 또 부정적인 인물이 나타나고 이렇게 하면 일종 장면을 비교해낼 수 있습니다. 저는 한번 확인하고 싶은데, 부정적인 인물에 대한 처리에서 당연히 어두운 구석에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괜찮겠습니까?
사부님: 괜찮다. 사실 당신이 이 그림을 보면 악경(惡警)이 대법제자를 때리고 있다. 색조의 표현에서 악경과 대법제자는 구별이 있으면서 정체적으로 또한 아주 잘 어울리며(協調) 문제가 없다. 그것은 당신들 기법상의 문제인바, 어떻게 그것을 잘 배치하는가이다.

문: 사부님, 저는 중국의 서법이 일종의 예술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초서(草書)는 올바른 것입니까?
사부님: 지금은 서예라고 부르지만 과거에는 글쓰기이다. 근대 이후에 와서 사람 또한 붓으로 글을 쓸 필요가 없어 그것을 일종의 예술로 여겼다. 사실 그것도 확실히 그것의 예술의 내포가 속에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차피 예술의 일종으로 여겨졌다면 미술전시에서 그것을 미술작품의 일종으로 여겨라.

초서를 언급하니, 엄격히 말하여 사람의 부정(負)적인 일면에 대해 방종(放縱)한 심리표현이다. 과거에 신이 사람을 도와 글자를 만들 때 무슨 초서가 없었다. 사실 나는 붓글씨를 연습한 적이 없고 그다지 잘 쓰지 못하지만, 늘 사람들이 나를 불러 무엇을 좀 써달라고 하면 나는 예서로 쓴다. 내가 예서를 편애하는 것이 아니라, 예서, 이런 글은 누가 그것을 날려서 쓴다고 하여도 날릴 수가 없으며 날린다면 예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관념 혹은 사상 업력을 방임하는 중에서 그것을 날려서 쓰기 아주 어렵다. 이 한 점에서 나는 예서를 쓰기 좋아한다.

문: 서예란 이 글에서 말할 때, 나는 일부 대법제자들이 사부님께서 예서글씨를 쓰기 때문에 그들이 일반적으로 글자체를 고를 때 예서를 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 가지 묻고자 하는데, 각종 글자체를 여러 사람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까?
사부님: 모두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떠한 글자체 모두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초서는 내가 느끼기에 사람의 부정(負)적인 일면을 너무 방임하며 사람의 표면요소가 너무 많으며, 사람의 진정한 정념으로 선행(善行)할 때 써낼 수 없는바, 주로 사람의 관념을 방종(放縱)할 때 써낼 수 있고, 엄중할 때에는 심태는 어느 정도 발광할 것이며, 바른 일면이 부족하다.

  문: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바로 삼원색에 관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삼원색은 다른 공간에서 대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우리도 보색(補色)에 관하여 토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원색을 이해해야 합니까? 사람 이 곳에서 우리는 빛 때문에 색이 나타나고 빛이 없기 때문에 색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공간은 전부 빛인데 그 색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사부님: 삼원색을 사람들은 회화의 염료 중에서 기타의 색으로 조합할 수 있으며 인류의 스펙트럼(光譜) 중의 삼원색 역시 부동한 색의 스펙트럼으로 굴절시켜 합칠(折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인류물질공간의 물질성으로 조성된 것으로서, 기타 공간과 다르고 물질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물체의 형태는 빛으로 조성되었다고 말하는데, 회화 중의 명암의 표현과 색깔의 출현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물체는 빛이 없는 정황하에서 그것은 모두 그 형태이며 빛은 단지 사람에게 시각상의 명암 감수를 조성할 뿐이고, 색깔은 빛의 강도변화에 따라 착각이 나타나지만 실질적으로 색깔과 물체형상을 개변할 수 없다. 수련의 말로 말한다면, 빛 또한 사람의 눈을 장애하여 사람에게 가상을 조성한다. 다른 허다한 공간에는 태양이 없고 또한 많은 공간의 일체 물체들은 전부 자신의 부드러운 빛 속에 있다. 만약 한 가지 물체가 태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만약 한 개 공간에 태양이 없다면, 물체의 형태는 역시 안정적이다. 어떤 공간의 일체 물체들은 모두 미미하게 눈이 부시지 않는 빛을 내보내고 있으며, 동등 층차의 생명 자신들도 보아낼 수 있다. 이런 공간 역시 태양식의 직사광원(直射光源)이 없지만 보게 된 물체형상은 여전히 그러한 형상이다.

다른 공간을 사람의 눈으로 보면 빛을 내보내는 것이며 색깔과 물체의 형상이 변하지 않는다. (물론 신과 신의 일체는 모두 변화한다. 물체의 존재방식도 사람이 알고 있는 소위 안정(穩定)상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칼라 네온사인과 같이 등의 형태와 색깔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만약 생명이 바로 그 한 층차의 생명이라면, 그는 사람이 그 공간을 본 것과 같은 느낌이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분자도 에너지가 있지만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일체, 눈을 포함하여 역시 분자입자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며, 만약 분자보다 낮은 더 큰 입자로 구성된 생명이라면, 마찬가지로 인체와 사람의 공간의 일체 물체가 빛이 있고 에너지가 있음을 보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위에서 말한, 태양이 필요 없어도 일체가 모두 빛을 내보내는 공간과는 같은 개념이 아닌바, 그것은 바로 물체 자신이 빛을 내보내는 공간이다.

사람의 이 공간이, 그것은 바로 정법을 위하여 특수하게 만들어진 이러한 곳이기 때문이다. 삼계 이 범위를 떠나면 완전히 달라진다. 삼계와 동등하게 존재하는 기타 더 많은 더 광범한 공간, 일체 물체들의 구조(結構)는 모두 변하게 되며, 인간세상과 모두 같지 않다. 물체의 형식을 보아도 세상 사람들이 보는 이런 명암(明暗)관계와도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 이곳에서 표현된 명암관계는 사람에게 특수하게 만들어준 환경표현이다. 천상의 신, 아주 많은 천체에 그것은 태양이 직접 비추는 광선이 없다. 그러나 또 아주 많은 천체에는 한 개의 태양이 비추는 빛뿐만 아니라 어떤 곳은 태양이 있고 어떤 곳은 태양이 없다. 생명이 부동한 층차에서 느끼는 빛의 강도 또한 다른바, 그들 역시 모두 부동한 층차의 빛의 존재형식에 부합된다. 수련생이 쓴 문장에서 삼원색과 眞善忍(쩐싼런)은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수련 중에서의 자신의 감수이고 眞善忍(쩐싼런)의 근본적인 실질이 아니다.

사람이 일단 천상의 정경을 본 후 깜짝 놀람을 금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사람은 ‘어떤 색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분자로 구성된 표면물질은 사람이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지만, 분자보다 더 미시적인 입자로 구성된 것은 일반적인 사람은 다만 그것의 에너지를 감수할 수 있을 뿐이다. 분자보다 더 미시적인 입자로 구성된 이런 공간의 물질 색깔은 사람 이곳에서 찾을 수 없다. 사실 분자도 에너지가 있으며 아울러 에너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에너지를 생기게 하는 작용을 한다. 세인들이 에너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세인의 신체구조․눈․피부와 혈육, 일체 모두 분자입자 한 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등한 층차에서 사람은 동등한 층차의 에너지를 느낄 수 없다. 미시적인 층차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람, 이 한 층의 물체로 구성된 입자 과립이 미시적인 입자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말하여, 그 색깔을 구성하는 요소 역시 한 층의 입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고층공간이 한 층 낮은 입자로 구성된 공간보다 더 밝고(明亮) 빛나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경지를 초월한 그러한 밝음이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는 이러한 색깔을 찾을 수 없으며 비록 형광색을 사용하여도 표현해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색깔로 그 한 경지의 신성함을 표현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인류의 현재 있는 색으로 화면구조와 장엄한 신의 자태(神態)를 표현할 수 있다. 그의 형상에서, 구조에서, 사람의 염료로 여전히 표현해 낼 수 있다. 당신이 완전히 신의 일체로 신을 인간세상에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신이 인간세상에 온 것이다.

문: 사부님께서는 佛․道․神의 그 옷 혹은 보편적인 그 복식(服飾)을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사부님: 우리가 보편적으로 본 부처의 차림새는 바로 황색의 가사(袈裟)이다. 보살은 중국 고대부녀의 그러한 차림새로 그리면 되는바, 당신들은 송대 부녀의 장식그림을 참조할 수 있고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백인형상의 신은 어느 세계이든지 그들은 보편적으로 모두 한 조각 큰 하얀 가사를 두르고 있고, 부처는 한 조각 큰 노란 천 가사를 두르고 있으며, 흑인형상의 신은 한 조각 큰 붉은 천 가사를 두르고 있다. 물론 더 다양하고 또 더 고층의 표현이 있는데, 어떠한 복식(服飾)을 하지 않는 이도 있다. 그리고 각종각양의 상당히 원시적인 복식을 한 각종각양의 신이 모두 있다. 작품 중에서 보편적으로 세인들이 능히 인식할 수 있게 표현하면 족하다. 도(道)는 당연히 중국고대의 복식이고 이것은 일반적인 도(道)이며 사실 아주 고층의 그 대도(大道)가 입은 옷도 각종각양이다.

과거에 수련하는 사람은 또 일종의 현상이 있었는데, 당신이 어느 때 어느 조대에 수련되었든지 간에 원만할 때 입고 지닌 장식이 바로 그의 이후의 옷으로 되었기 때문에 보통 일반적으로 이러하였다. 물론 부처는 다른바, 부처로 수련된 모든 이들은 반드시 부처의 형상이었고 부처의 그러한 옷을 입었다. 기타의 신(神)을 닦는 데 대하여 말할 때, 일반적인 정황에서 수련성취하였을 때 어떤 것을 입으면 이후에는 어떠한 옷을 입었다. 당신들 중에서 누가 무당산(武當山)에 간 적이 있는가? 그 현무(玄武)의 초상화(畵像)를 보았는가? 현무의 초상화는 왜 머리를 풀어헤쳤는가? 그것은 그가 수련되었을 때 머리를 풀어헤쳤기 때문에 그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그 형상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산 속에서 가부좌하였고 머리를 묶는 것이 번거롭다고 느끼고 묶지 않았으므로 수련되었을 때까지 그러하였다.

문: 사부님, 고대 그림속의 부처에는 옷을 입은 부처가 있고 어깨를 드러낸 부처가 있습니다.
사부님: 어떤 때는 사람이 자신의 관념으로 부처를 그린다. 예를 들어, 남아시아는 날씨가 아주 더워 스님들은 보편적으로 모두 어깨를 드러내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시원하다. 조금 북쪽에서는 스님들이 천으로 또 오른쪽 어깨를 가리는데, 오른 쪽 어깨를 가리니 춥지 않았다. 부처의 세계에는 이러한 개념이 없고 보편적으로 그들은 바로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낸 이러한 옷차림이다. 중국인이 부처상을 그릴 때 중국인의 관념은 그 어깨를 전부 가리는 것이지만, 사실 신의 옷차림은 바로 이러하여 서방인 형상의 신 역시 한 쪽 어깨를 드러낸다. 이러한 옷차림은 소매가 없기 때문에 양쪽을 모두 가리면 행동이 불편하다.

  문: 여쭙겠습니다. 우리가 그림그리기를 배움에 있어서 그 기본기(基本功)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배우기 어렵습니까?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중국에서 그림을 배울 때 어떻게 하면 기법(技法)의 수준을 제고할 수 있습니까?
사부님: 주로 서방국가의 교육이 소위 현대파 의식의 영향을 심하게 받으므로 학생의 기본기 훈련을 근본적으로 중시하지 않는다. 아울러 아주 많은 교사․교수 모두 그 현대파들이고 그들 자신도 모르며, 그림 그리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모른다. 기본기를 장악함에 대하여 말하면 그것은 간고한 훈련을 거쳐 비로소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물(靜物)을 그려야 하며 구조와 투시관계를 장악하여 정물을 잘 그리면 스케치를 연습한다. 그다음은 정확한 색채운용이며 일보 일보씩 그림그리기는 기본 솜씨를 장악한다. 기본기는 한 화가․조소가로서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것이다.

문: 중국은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모두 풍경화를 그렸습니까? 물론 중국에도 부처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중국역사에서 대다수는 산수화를 그린 것입니다.
사부님: 중국화는 의(意)를 중시함이라, 그것의 의경(意境)․내포를 그리기 때문에 대다수는 모두 산수를 그렸다. 필경 중국인은 반신(半神)문화였기 때문에 의식 중에는 사람을 너무 많이 표현하려고 하지 않은 것 또한 앞에서 말한 원인이므로 대다수는 산수를 그렸다. 그러나 또 사람을 그린 것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모델을 사용하지 않았고 완전히 구상해낸 것인바, 이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깨끗하였다. 물론, 완전히 진정한 사람을 그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역사상 일부 영웅인물․사람들이 기념하는 인물을 화가도 가서 그렸는데, 근대에 와서 비교적 풍부하였다. 사실 발견된 가장 초기의 중국화는 여전히 신을 그린 것이고, 아울러 사원에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모두 佛, 道, 神을 표현한 그림이 있었다.

문: 중국화는 선(線)을 위주로 하는 것이며, 색채가 아주 맑고 깨끗(淸淡)한데, 서방화는 색채를 아주 중시합니다. 우리 중국화는 색채에서 서방화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까?
사부님: 아니다. 동방화는 바로 동방화의 특징이며, 마땅히 어떻게 그려야 하면 그렇게 그려야 하는데 당신이 고치기만 하면 그것은 아니다. 동방화는 바로 선에 치중하고, 서방화는 선을 그릴 수 없고 당신이 선을 그리면 틀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명암으로 그림을 구성한다.

문: 사부님, 우리는 사의(寫意)나 혹은 사실(寫實)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릴 때 당신의 법신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뭇사람이 웃음)
사부님: 나의 법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뭇사람이 웃음) 그가 사상으로 한번 생각하면 당신은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당신은, 나는 지금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부님더러 그리도록 해야지, (뭇사람이 웃음) 그건 안 된다.
문: 그 때에 화가는 아마 일종 초상(超常)적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아마 매우 초상적일 수 있습니다.
사부님: 반드시 초상적인 것은 아니며, 어떻게 하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아주 이지적이고 아주 정상적이다. 마치 당신들이 대법을 수련하는 것과 같이 일체가 모두 아주 정상적이다. 대법제자가 마땅히 그려야 할 것이면 당신은 마땅히 그것을 잘 하면 되며, 어떤 상태로 들어간다는 설이 없으며 또한 이런 생각이 없어야만 비로소 맞다.

문: 사부님, 저는 부동한 사람형(人形)을 그리려고 하는데 사부님께서는 흑인의 신은 붉은 가사를 둘렀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어떠한지를 모릅니다.
사부님: 보편적으로 당신들이 서방의 그러한 신을 그리려면 르네상스시기의 미술작품을 참조할 수 있고, 서방 르네상스시기 미술작품 중의 신의 형상이 맞다. 성년남신(成年男神)은 일반적으로 콧수염이 있는 이가 비교적 많았는데 물론 콧수염이 없는 이도 있다. 부처는 일반적으로 콧수염을 기르지 않지만 또한 소수는 콧수염이 있다. 흑인형상의 신은 흑인의 머리카락과 같이 짧은 곱슬머리인데, 사람은 신이 자신의 모습에 따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문:(번역문) 저는 저의 학교를 위하여 한 폭의 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자화상입니다. 나는 그릴 때 마음을 써서(用心) 그리면서 되도록이면 관념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반응이 괜찮고 구도(構圖) 역시 마술처럼 더욱 좋게 변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문제는, 오로지 우리가 마음을 써서 그리면 잘 그릴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지도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사부님: 엄격하게 말하면, 그림을 그릴 때 반드시 마음을 써야 한다. 당신이 마음을 쓰면 모두들 당신이 잘 그렸다고 말하지만 기본기를 중요시하는 시대에 비하면 여전히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느끼기에, 기본기를 조금 더 잘 연습하면, 대법제자는 더 잘 그릴 수 있으며 후세사람들에게 한 갈래 바른 길을 남길 수 있다. 물론 마음을 써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맞다.

문: 제가 선생님 초상화(畵像)를 그릴 수 있습니까?
사부님: 아이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상을 만들었고(做像) 상을 그렸(畵像)지만, 결과는 모두 닮지 않았다. 그리는 것은 괜찮고, 문제가 없으며, 사진을 가지고 그려라.

문: 사부님, 저는 아주 많은 수련생들이 정말로 사부님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또 다른 공간의 상(像)을 그려낸 것이 어떤 것은 닮았으며, 그래도 정말로 법신의 위력이 있음을 느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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