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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 200년간의 미술에 대한 해석 (4)

글/ 아르노 H.

[밍후이왕] 화려한 르네상스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영향력은 역사의 한 장에 나오는 황종(黃鐘), 대려(大呂)처럼 업적이 매우 위대하다. 이번 인류문명의 미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성숙해졌고, 향후 200년간 서양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 이후 200년은 각종 상생상극의 요소가 격렬하고 미묘한 갈등을 겪으면서 음양의 균형이 점차 무너지는 단계였다. 무수히 많은 관련 요인과 배후의 심원함은 필자가 한두 편 문장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개인의 얕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당시 서양 미술의 일반적인 상황과 그 역사 시기가 사람에게 준 일정한 시사점 등 몇 가지 측면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편에 이어)

날로 미미해지는 미술의 발전

과학과 사상의 변혁이 미술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종교적 주제 작품이 비례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로, 종교적 소재 창작을 장려하는 천주교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세기에 이르러 이 추세는 유럽 전역에서 거세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의 출현도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한 화가가 신을 믿지 않거나 별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의 창작의 중심은 당연히 신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주문이 없다면 화가는 개인적인 창작에서 신을 그리지 않을 것이며, 주문이 있을 때만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신을 그리면 그림에서 표현되는 심경은 진정 경건하게 믿는 경지에 비하면 천양지차가 되며, 작품이 어떠한 정보를 지니게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18세기 바로크 풍격의 로코코 시대에는 미술이 양면으로 발전했다. 종교작품에서 예술가들은 천국의 신성함과 영광을 변함없이 표현했으며, 미술 형식에서 기존 바로크양식의 활약적인 움직임과 웅장한 스케일보다, 가볍고 날렵하며 장식적인 요소들이 풍부하고 섬세함 등에 더 치중하고 있었다. 세속 예술에는 인류 사회의 외면치레와 섬세하고 낭만적인 감정을 더 많이 표현했다. 이때의 세속적 주제는 상류사회의 즐거운 생활과 애정 추구 등을 표현하거나 신화적 소재로 삶의 즐거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图例:位于德国的维斯教堂(Wieskirche)内部景观,建筑装潢采用了典型的洛可可风格。
작품 사례: 독일에 있는 비스 교회(Wieskirche)의 내부 경관은 로코코 풍격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인류의 예술은 당연히 세속 생활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세속 예술은 신성한 요소를 버린 하나의 추이를 형성해 점점 더 저속해졌다. 예술사에서 18세기 중후반의 유명한 작품들이 신화를 빌려 숨기던 것을 버리고 직접적으로 패륜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시대 남녀의 사통 행위나 외설적인 장면까지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퇴폐적인 사회 풍기는 오히려 일부 포르노 작가들을 미술계의 높은 지위에 올려놨으며 명성을 얻게 했다.

로코코양식 인테리어와 가구조형 등 실용예술은 예술적 수준에서 볼 때 비범한 미와 불후의 공예 가치를 지니고 있어 오늘날의 미술사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로코코 ‘대표작가’들의 창작 장르적 저속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은 구상이 훌륭한 로코코 작품들을 찾을 수 있지만 자유 추구와 전통예교의 속박 반대라는 이념적 계몽주의 같은 변종에 열광하는 데다 사회 고위층의 향락과 부패로 도덕성을 훼손하는 작품들이 치켜세워져 예술이 급속히 훼손되게 했다.

역사의 발전은 일관되게 일정한 법칙을 따랐는데 다중상생상극(多重相生相克)의 제약 작용에도 불구하고 음양은 점차 균형을 잃은 음으로 변해가고 양(陽)은 약해지고 있었다. 로코코 예술도 정통예술 중 하나지만 전통이 나중에 음성양쇠(陰盛陽衰)로 변한 것이다. 로코코 풍격의 예술품격은 섬세하고 세밀한 장식에 착안해 전대의 대범함과 웅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예술적 영향으로 남성들의 행동 스타일도 여성처럼 우아해졌다. 지난 세기의 미국 역사학자 헨드릭 윌렘 반 론(Hendrik Willem van Loon)은 그의 책에서 “이 시기의 예술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의 예술작품에서 인정한 남자다운 기개와 힘의 특징이 결여된 여성예술이지 남성예술이 아니다. 남자의 의상과 가구, 그리고 그들이 예쁜 중국 다기로 초코우유를 마시며 정치적 유언비어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로코코 시기는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기라고 단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를 그래도 용납할 수 있을 정도라고 본다면, 프랑스 혁명 이후 더 심한 변이는 용납할 수 없을 정도가 됐으며, 그런 것들은 정상적인 음양을 대신해 마귀가 세계를 차츰 지배하게 됐는데 그것은 다른 일이다.

예술의 타락은 단지 작품의 착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의식과 물질은 동일성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예술사상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담은 물질적 매개체도 문제가 됐는데, 이는 유물론자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작가들은 더 저렴하고 가격은 더 싼 안료를 얻게 됐다. 원래 비싼 천연광물에서 추출해야 했던 색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화학적으로 값싸게 합성할 수 있게 됐다. 군청(Ultramarine)의 경우 전통적인 군청색은 희귀 광석인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에서 유래한 것이어서 매우 비싸고 고품질 청금석은 금값도 넘었다. 보석을 원료로 한 파란색은 고급스럽고 포만하며 장엄하고 빛이 난다. 경건한 옛사람들은 가장 진귀한 안료로 신을 칭송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전통 회화에서 성 마리아(Saint Mary)의 옷은 항상 군청색이었다.

18세기 초 가격이 더 싼 프러시안블루(Prussian blue) 물감을 화학적으로 합성하자 값비싼 군청색의 대안으로 근사한 색상을 꼽아온 작가들이 이를 사용했고 신성 여부는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화학적 합성의 결과물을 자연 그대로의 보석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프러시안블루 안료는 순도, 밝기, 내구도, 내광성 등 여러 면에서 진짜 군청에 크게 못 미치며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특히 화학이 발달하지 않은 단계에 유화의 변색, 어둑어둑해지고 갈라짐 등 각종 문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속출했다. 유사한 상황이 다른 물감에서도 발생했는데 여기에서는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재료의 변화에는 조색유의 변화도 관련됐다. 역사적으로 주류 유화에 사용되던 건성유류는 리네이드 오일(Linseed oil)과 호두 오일(Walnut oil)인데 이 두 건성유는 공기 중에서 산화 후 결막이 단단해 유화 물감을 만들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유류는 작품이 시간이 지날수록 누렇게 변하는 단점이 있어 대체 기름을 찾으려는 작가들이 적지 않았다. 17, 18세기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와 이탈리아 화가들은 다른 유류보다 노란색으로 변하는 양이 적은 양귀비씨 오일(Poppyseed oil)을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양귀비씨 오일의 회화적 활용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발명은 아니다. 그러나 양귀비라는 식물은 서양 문화에서 수면과 죽음의 상징이기에 사람들은 멀리했다. 양귀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선물로 여겨졌다. 이런 불길한 식물이 신과 귀신을 믿었던 시절에 얼마나 배척당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계몽운동을 통해 세뇌당한 시대에 과학화되는 사상은 실용적 차원에 접근하고 고대문화를 방치했다.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 중국 청나라 ‘우대선관필기(右台仙館筆記)’에서도 뭇 신께서 도덕이 타락된 사람을 ‘아편담배 재난’으로 청산할 때 아편에 무간지옥의 죄혼이 담긴 고혈이 들어있다고 했다. 이 책은 2권에 ‘양귀비는 본래 풀과 꽃이며 예로부터 있었고 즙이 적어 연고를 달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구유주자(九幽主者)에게 명해 무간지옥에서 충성과 효도를 하지 않고 예의 없는 파렴치한 죄혼을 택해 고혈을 짜내 능원 습지에 무덤의 신으로 환원시켰다. 양귀비꽃 뿌리에 이 고혈을 부어 뿌리부터 꽃봉오리까지 오면 즙이 풍부해져 정제하면 색이 거무스름해진다“고 말했다.

신과 귀신의 설에 코웃음을 치는 실증과학은 눈으로 본 것을 미신하게 하지만 사람의 눈은 국한성이 커서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고 눈앞과 표면만 보기에 근시안이 생기기 마련이다. 단기적으로 양귀비씨 오일은 맑고 투명하며 색이 옅지만 유막이 노화되면서 수년 후 아마인유가 누렇게 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결막의 견고함 측면에서 아마인유는 양귀비씨 오일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또한 양귀비씨 오일은 건조가 매우 완만한 특성이 있어 색층을 항상 불안정하게 한다. 전통적인 다층화법에서는 아래층이 양귀비씨 오일을 썼다면 완전히 마를 때까지 여러 날 기다린 뒤 새 색층을 그려야 했다. 하지만 실제 그림을 그릴 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밑층이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색층을 그려 넣으면 갈라진다.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의 출현 빈도는 매우 높아서 미술사상 몇 세대에 걸친 재료학자로부터 18세기에 태어난 몽따베르(Jacques-Nicolas Paillot de Montabert, 1771~1849)부터 19세기 에이브너(Friedrich Eibner, 1825~1877), 다시 20세기의 도너(Max Doernerner, Max Doerner, 1870년~1939년)에 이르렀다. 에이브너는 심지어 이 기름이 유화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고 직언했다. 하지만 양귀비씨 오일은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미술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많은 튜브형 물감 생산업체들이 잘 마르지 않는 오일을 선호하기 때문으로, 상품이 팔리기 전에 더 오래 저장할 수 있고 또한 물감을 짜내서 누렇게 변하지 않는 투명한 오일감이 상품의 원색을 더욱 좋게 보이게 해 구매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은 발전했지만 미술은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고급 물감을 발명했지만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시대의 작품처럼 밝고 청아하며 아름다운 색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의 유화는 600년 동안 보존할 수 있었지만, 과학이 발달한 지금 유화 한 점이 50년 안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안료의 질을 칭찬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선진’ 과학기술의 시대에는 르네상스 거장 같은 예술 거장이 탄생한 적이 없다. 과학의 진보는 단지 표면의 빛과 그림자일 뿐이지만 도덕의 타락은 오히려 인류가 직면한 각종 어려움을 야기시켰다.

(계속)

 

원문발표: 2020년 9월 12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12/4115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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