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전염병, 잇따른 기적 출현
글/ 구진(古金)
[밍후이왕] 전편에서는 수많은 학자가 사료를 근거로 명나라가 흑사병으로 멸망했다고 지적했지만, 기이하게도 흑사병이 청나라 군대를 감염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명겁’에서 대역병의 재앙”이라는 글은 당시 신의(神医)였던 오우가(吳又可)를 언급했다. 그는 도가의 진언(眞言)과 달원음(達原飲) 약재로 일련의 백성을 치료했지만, 활동 범위에 한계가 있어 전국의 전염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청나라 군대가 천하를 통일하니 전국에서 맹위를 떨치던 흑사병이 종적을 감췄을까?
중세에 유럽을 짓밟은 흑사병이 수십 년 후 신기하게 사라진 일은 과학자들을 그야말로 당혹스럽게 했다. 명, 청의 사료에서 발굴한 내용은 이렇다. 당시의 맹렬한 흑사병은 이자성의 50만 의병을 감염시키지 않았다. 이자성이 북경을 공격해 들어가자 북경을 휩쓸던 흑사병이 갑자기 활동을 멈췄는데, 이는 현대인의 과학 상식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그러나 과학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사실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4. 관녕철기 군도 감염되지 않았다!?
(1) 오삼계의 관녕철기 군은 왜 흑사병에 걸리지 않았나?
전편을 자세히 읽은 독자는 생각할 것이다. ‘오삼계가 지휘한 산해관의 관녕철기(關寧鐵騎) 군이 이자성의 20만 대군과 결전을 벌일 수 있었는데, 그들도 흑사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뜻인가?’
확실히 그랬다. 1644년 5월 26일, 이자성의 대군은 산해관에 도착해 오삼계의 관녕철기군. 5만과 대전을 벌였다. (보병이 포함됐고, 관녕철기군의 정예 병사는 2만도 안 됐음) 오삼계의 군대는 28일 새벽이 되어서야 버티기 어려워졌다. 그때 바람의 방향이 크게 바뀌어 날씨가 순나라 군대에 불리하게 변했고, 청나라 군대가 갑자기 공격했다. 청나라 군대가 출동하기 전, 관녕철기군은 적은 병력으로 대순군(大順軍)의 맹공을 이틀 밤낮으로 막아내며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절대 흑사병에 감염된 군대가 아니었다!
명나라 말기의 맹렬한 흑사병은 12년간 유행했고, 후기에는 베이징의 전염병이 가장 심각했지만, 각지의 왕래는 줄곧 끊이지 않았다. 오삼계가 영원성[지금의 랴오닝 싱청(興城)]과 산해관 일대에 진주하고 있었지만, 군사 보급이 모두 북경에서 왔고, 가족도 모두 북경에 있었으니 흑사병이 어떻게 전해지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사실상 관녕철기군은 흑사병에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오삼계는 그 정예 부대로 순나라 군대를 추격해 남명(南明)을 섬멸하고, 하북을 지나 산동을 평정하고 금주(錦州)를 돌아 한중(漢中)으로 들어와 서북 지역을 토벌하고 운남과 귀주를 안정시키고 미얀마에 진출했다가 운남으로 돌아왔는데, 중국의 절반을 편력하면서도 줄곧 막강한 전투력을 유지했다. 무수한 흑사병 지역을 해치고 다녔고, 사나웠던 흑사병은 관녕철기군의 몸을 수없이 스치고만 지나갔지만,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전편에서 우리는 이미 자세히 분석했다. “말이 벼룩과 흑사병을 막았다”라는 가설은 사실과 논리에 모두 부합하지 않는 눈가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명나라가 흑사병에 감염되고, 군대의 전투력이 급감한 상황에서 유독 관녕철기군만 예외가 됐는데, 그들의 특별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2) 원숭환의 정예 부대, 반(反) 박해의 특수한 사례
관녕철기군은 원숭환(袁崇煥)이 설립한 명나라 말기 최강의 부대다. 천계(天啟) 6년의 영원대첩(寧遠大捷)에서 원숭환은 1만여 명으로 고립된 성을 지켰고, 화포를 이용해 4일에 걸친 13만여 누르하치 대군의 강공을 격퇴함으로써 백전백패하던 명나라의 패색을 돌려세웠다.
천계 7년의 영금대첩(寧錦大捷)에서 원숭환은 24일에 걸친 홍타이지의 6만 대군 공격을 격퇴했다. 영원과 금주(錦州) 두 성의 화포가 위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야전에서도 팔기군과 대등한 전력을 나타냈다.
숭정 2년의 북경 방어전에서 원숭환은 관녕철기군. 8천여 명을 거느리고 광거문(廣渠門) 밖에서 청나라의 용장 망굴타이, 아바타이, 아지거, 도르곤, 호오거와 몽골 친왕이 이끄는 4만여 명의 정예 기병을 철저히 격파하며 수천 명을 죽였다.
당시의 승리는 거의 모든 학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일개 문인인 원숭환이 어떻게 천하제일의 용맹한 기병을 길러낼 수 있었을까? 청나라 팔기군의 가장 뛰어난 기병을 맞아 야전에서 자신의 다섯 배나 되는 적을 격파하다니? 그의 종군 기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원숭환이 친히 출전했으나 거의 전사할 뻔했다. 양쪽 옆구리가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 같았으나, 다행히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어 관통되지 않았다.[3]” 정말 운이 좋았는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역사 기록에 과장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이런 역사를 말할 때는 적당히 넘어간다.
원숭환은 명나라 조정의 박해로 살해됐지만, 그의 관녕철기군은 세 개로 갈라져 그중 하나가 오삼계에게 넘어갔다. 영화 속에서 외치는 “관녕철기 천하무적”이라는 구호는 오삼계의 허풍이 전혀 아니었다. 그 정예 부대는 확대 편성된 후 오삼계를 따라 중국의 절반을 휩쓸며 순나라 군대, 대서(大西) 군대, 남명(南明) 군대를 섬멸했다. 청나라군에 대해서도 연전연승이었으므로 강희제는 청나라 군대와 관녕철기의 야전을 금지했다. 결국, 무적의 철기군은 화포로 섬멸됐다.[4]
전쟁에 가장 뛰어난 군대라는 점보다 전염병이라는 천벌을 피한 것이 더욱 대단한 일이다. 인류에게는 흑사병에 대해 자연 면역력이 없다. 관녕철기군이 다른 명나라 군대와 유일하게 다른 것은 원숭환이 설립했다는 것이다. 원숭환이 박해를 당하게 되자 조대수(祖大壽)는 이 부대를 이끌고 철군해 산해관과 영원으로 돌아갔다. 자신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황명에 맞서며 원숭환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었다. 매우 놀란 숭정제는 황급히 원숭환에게 조대수를 소환하는 편지를 보내게 했다. 조대수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수도 지역으로 돌아왔고, 닷새 만에 네 개의 성을 수복함으로써 원숭환을 구하기 위해 큰 공을 세웠다. 비록 그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반(反)박해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왜 이런 일로 천벌을 면할 수 있을까?
5. 명나라에 전염병이 많은 것은 억울한 송사 때문
(1) 과학은 표면에서 원인을 찾아 ‘경향설’, ‘목적론’ 형성
현대 과학은 늘 표면에서 원인을 찾는데, 전염병이 천재이며 위생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여긴다. 이런 해석은 추측에 불과하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현대 학술계에서는 고대의 재해 년과 평년이 엇갈려 순환했고, 서로 다른 지역끼리 교대로 발생했음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천재인화가 역대로 항상 존재했지만, 모두 명나라와 같은 형태가 아니었고, 언제나 부분적인 전염병으로 발전했다. 그러므로 상술한 해석은 완전히 비과학적이다.
과학으로 해석할 수 없는 원인은 정말로 ‘하나만 붙잡고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는’ 과학적 해석이며, 목적성이 몹시 강하고 경향성도 아주 강하다. 이런 ‘경향설’, ‘목적론’은 그 자체가 바로 편파적이고, 비과학적이며 기점부터 성립될 수 없다.
(2) 명나라 역사의 두 가지 특징
명나라 역사에는 양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전염병이 많았다는 것인데, 특히 후기에 많았다. 어떤 사람은 통계를 냈다. 명나라가 통치한 277년 동안 적어도 168년에 걸쳐 전염병이 발생했고, 여러 지역에서 각종 전염병이 330번 이상 발생했다. 또 하나는 억울한 재판이 많았다는 것이다. 명나라 시대에는 첩보 기관이 가장 발달해 환관이 장악한 동창(東廠)과 서창(西廠), 금의위(錦衣衛), 진무사(鎮撫司) 등이 신하에 대한 박해를 전담했고, 공포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억울한 사건을 크게 일으켰는데, 고문과 살해가 역사 중 가장 많았다. 법률에 완전히 벗어난 ‘정장(庭杖, 조정에서 집행하는 곤장, 유죄 판결 없이 황제의 말 한 마디면 대신을 때렸는데 심지어 죽이기도 했음)’과 ‘조옥(詔獄, 관리를 가두는 감옥이며, 동서 감옥, 금의위 감옥, 진무사 감옥 등 포함)’을 발명했고, 능지(凌遲, 산 채로 수많은 포를 떠 죽이는 형벌)의 등급을 정했는데, 수천 번으로 정했을 때, 만약 수천 번을 뜨기 전에 죄인이 죽으면 사형 집행자가 중형을 받았다.
(3) 양대 특징에 숨은 인과
사실 상술한 명나라의 양대 특징에는 인과관계가 있고, 억울한 재판이 전염병 등 천재의 근원 중 하나다. 역사서에는 재난, 괴로운 일, 질병이 닥치거나 가족이 질병에 걸리면 늘 황제가 사면령을 내렸고, 조정의 관리들이 군주에게 억울한 송사를 처리해 재난을 해결하도록 간언했다는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과학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한다. 전편의 사실이 벌써 과학의 인지를 깨뜨렸고, 그래서 초과학이라는 논리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순풍(李淳風)의 기상학 저서 ‘을사점(乙巳佔)’에는 ‘사면으로 (하늘의 난을) 해결한다.’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대사면으로 해결하는 것은 억울한 사건인데, 어떻게 하늘의 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 세상의 억울한 재판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 일부 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면으로 억울한 사건을 해결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면 자연히 상응하는 하늘의 난이 해결되는 것이다. ‘을사점’에서는 원인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조금 완곡하게 표현했는데, 이는 천기를 그대로 누설하면 하늘의 질책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의 학설이 만약 정확하지 않다면 반드시 역사에 따라 도태될 것이다. 점괘가 바로 그렇다. 정확하면 수준이 높기 때문이고(희박한 확률의 사건은 운이 좋아서 맞는 것이 아님), 정확하지 않으면 수준이 미흡하거나 사기이기 때문이다. 점을 잘 못 치면 점괘는 모두 가짜다. 대신이 제왕에게 억울한 송사를 바로잡고, 대사면으로 재해를 해결하라고 간언했는데 만약 아무 효과가 없다면 똑같이 역사 속에 도태된다. 예를 들어 고대의 기우제가 전해 내려온 까닭은 송 태조가 몸을 돌보지 않고 맑은 하늘을 갈구하고[5], 정협(鄭俠)이 신종에게 왕안석(王安石)의 새로운 법을 폐지할 것을 간언함으로써 큰비를 내리게 해 가뭄을 해결하고[6], 명나라 왕양명(王陽明)이 기도문[7]으로 비를 기원[8]하는 등등 신기한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사면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며, ‘을사점’도 특정한 천체 현상하에서 ‘사면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4) 조정의 범죄에 백성이 연루되다
많은 사람은 물을 것이다. “만약 억울한 재판이 명나라 전염병의 원인이라면 왜 그런 억울한 판결을 내린 자, 동창, 서창과 아둔한 군주가 응보를 받지 않고 백성이 먼저 난을 당했는가?”
이 문제는 ‘전염병의 눈’이라는 글에서 이미 심층 분석한 바 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 남겨진 수수께끼이며, 하늘의 도리에 부합한다. 백성의 순종, 인정, 지지는 어리석은 군주와 난신이 강대해지고 함부로 행동하는 기반이다. 그래서 이런 백성이 난을 당하는데, 백성들이 먼저 벌을 받으면 완충의 여지가 있고, 잘못을 깨달아 구원을 얻을 기회가 있다. 가장 나쁜 사람은 마지막으로 난을 당하며 기회가 없다. 숭정제와 그의 후비, 자녀들이 바로 그렇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명나라 말기 최대의 전염병에 대응하는 최대의 억울한 송사는 누구와 관련된 것일까?
6. 세 곳의 기적은 모두 원숭환과 관련
(1) 원숭환을 능지처참한 죄가 하늘에 닿다
많은 사람이 알듯이 명나라 말기 최대의 억울한 사건은 바로 명나라를 지킨 일등 공신이며 충신인 원숭환 사건이다. 그는 무고하게 숭정제에 의해 투옥되어 날조된 죄명으로 명나라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인 능지(陵遲)형에 처했다. 원숭환은 황제의 명으로 3,600번(실제로는 3,500여 번이었음) 포를 뜨는 능지형을 받았는데, 망나니는 또 잘라낸 살을 현장에서 팔았다.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조정의 거짓말에 속은 백성들은 참혹한 형벌을 보면서 큰소리로 원숭환을 매국노라 욕했을 뿐 아니라 그의 살을 앞다투어 샀다. 원숭환은 3일 동안 학대를 받고서야 사망했는데, 백성들은 또 내장을 놓고 쟁탈을 벌였고, 그것을 칼로 다져 한을 풀었다.[9] 현장의 참혹함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명사(明史)’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조정은 원숭환의 집을 몰수하면서 집안에 모아둔 재물이 없음을 발견했고, 친족을 3천 리 밖으로 추방했다. 천하의 사람들이 크게 억울하다고 했다.”[10] 주의할 것은 사실상 ‘천하의 사람’이 모두 원숭환을 억울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고, 당시 대부분의 ‘천하의 사람’은 조정의 선전을 믿으면서 원숭환을 매국노로 오인하고 죄가 있어 죽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수도의 백성들이 그렇듯 격렬하게 그를 증오하는 반응을 보였고, 일부 민간 역사서 작가는 원숭환을 진회(秦檜)에 비유했다.
그 진상을 아는지 모르는지가 명나라 시기 ‘생명의 분수령’이 됐다. 거짓말에 눈이 멀어 박해를 선동했는지, 억울한 사정을 알았는지에 따라 운명이 판이하게 달랐고, 전염병 신의 눈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도는 지극히 쉽고 간단하다.”<도덕경>는 이렇게 하늘의 이치를 밝혔다. 청나라 대군과 이자성의 의병, 오삼계의 명나라 관녕철기는 모두 감염되지 않았는데, 이 세 부분의 기적과 하늘이 명나라를 소멸한 근본 원인이 모두 하나의 간단한 원인, 바로 원숭환으로 귀결된다. 맹렬한 흑사병은 하늘이 내린 벌이다. 명나라 왕조가 지독하게 하늘을 거역했으므로 조정의 거짓말을 믿거나, 진상을 모르거나, 하늘을 거역한 조정의 편에 선 사람이 모두 명나라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2) 억울한 사형이 흔했는데, 전염병은 드물었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 것이다. “역사상의 억울한 재판, 억울한 사형은 너무나 많았다. 당신 말에 따르자면 마땅히 매번 큰 전염병이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없었는가? 서한(西漢) 초기에 한신(韓信)이 억울하게 죽고, 남송(南宋) 초기에 악비(岳飛)가 억울하게 죽은 일이 모두 컸었는데, 어째서 서한과 남송이 모두 오랫동안 이어졌고, 전염병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가? 설마 일반적인 사형과 능지형의 차이가 그렇게 크다는 것인가?”
역사의 기밀은 표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한층 더 깊이 들어가야만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있다. 한신과 악비가 억울하게 죽었지만, 천하의 모든 백성과 관리가 그들의 억울함을 알았고 진상을 알았다. 그래서 백성이 죄업을 나누어 갖지 않았고, 난을 만나지 않았으며, 전염병이 왕조의 모든 백성을 짓밟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원숭환의 억울한 사망에 대해서는 상당한 비율의 관리와 대다수 백성이 조정의 거짓말을 믿고 박해를 옹호했다. 진상을 알고 원숭환을 위해 목소리를 낸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모든 사람이 박해에 동조하는 이것을 전통문화에서는 ‘공업(共業)’, 즉 공동으로 만들어낸 죄업이라 부른다. 그래서 공동의 천벌이라는 형식으로 천리에 역행한 모든 사람이 응보를 받는 것이다. 전염병이 명나라를 멸망시킨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다.
황제가 정하면 군신이 동조하고, 정부가 선동하고, 백성이 열렬히 추종해 다투어 원숭환의 살을 먹는 정도에 이르렀다. 하늘을 거역하는 거짓말과 박해가 전염병이라는 천벌을 초래했으니 명나라 왕조는 그렇게 멸망했고, 천만을 넘는 백성이 하늘을 거역한 왕에게 말려든 것만으로 순장됐다.
이런 역사의 인과를 알면 현재의 전염병이 빈발하는 근본 원인을 알 수 있다. 사스, 신종 코로나(사스2), 조만간 닥칠 대역병(사스3)…. 해와 달은 순환하고, 역사는 거듭되며, 인류는 대재앙과 천벌에 직면해 있다.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전혀 해결책이 없으니 진정하게 구원받는 것은 다음 역사가 흘러가는 징조를 보아야 할 것이다.
(전문 끝)
참고문헌
[1] <청사고(清史稿) 오삼계전(吳三桂傳)>
[2] <청태종실록>
[3] 주문울(周文鬱)이 쓴 <요사입위기사(遼師入衛紀事)> : “적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공과 나의 옆구리가 고슴도치 같았으나 다행히 두꺼운 갑옷을 뚫지 못했다.”
[4] <청성조실록(清聖祖實錄)>
[5]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17권>
[6] <송사(宋史) 정협전(鄭俠傳)>
[7] 왕양명(王陽明)의 <기우사(祈雨辭)>
[8] 유장경劉長景), 진양동(陳良棟), 왕기(王驥)의 <회창현지(會昌縣誌)> 청나라 동치 11년(1872년)판
[9] 장대(張岱) (명말청초), <석궤서(石匱書)>
[10] <명사(明史) 원숭환전(袁崇煥傳)>: “3년 8월, 숭환을 시장에서 능지형에 처하고, 형제와 부인을 3천 리 밖으로 유배해 호적을 등록했다. 숭환에게 아들이 없어 집안이 남은 것이 없으니 천하에 억울한 일이다.”
원문발표: 2020년 6월 19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19/4077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