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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唐紹)가 묵은 빚을 갚다

글/ 화춘밍(華春明)

[밍후이왕] 당소(唐紹)는 수도 장안(長安) 사람으로 이부(吏部) 상서(尚書) 당림(唐臨)의 손자다. 그는 박학다재하여 조정에서 급사중(給事中)직을 맡았다. 그의 맞은편에 이막(李邈)이라는 이웃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자주 이막을 찾아가 담소를 나누고 때로는 이막을 집으로 초대해 먹고 마시기도 했다. 당소의 아내는 “당신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왜 늘 당신보다 급이 낮은 이막 같은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 하나요?”라며 의아해했다. 당소는 “나중에 사유를 알려 주겠소.”라며 웃었다. 선천(先天) 2년(서기 713년) 10월 12일, 당소는 정중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현모양처여, 나는 오늘에야 사유를 말해줄 수 있소. 나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전생을 알 수 있는 신통력이 있었지만 줄곧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오.”

“나는 전생에 한 여자였는데 16살에 파릉(灞陵)의 한 왕(王) 씨 가문 아들의 아내가 됐소. 시어머니는 내게 몹시 엄하셔서 나는 그녀를 매우 두려워했다오. 17살이던 그해 동지 전날, 나는 밥을 다 짓고 이미 매우 피곤했지만, 시어머니는 다시 나를 불러 다음날 입을 손님을 맞이할 비단 치마를 봉제하게 했소. 나는 하는 수 없이 등잔불 아래서 밤을 새워가며 서둘러 만들었소.”

“그런데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달려와 등잔불을 넘어뜨렸고 등유가 치마 위에 쏟아졌소. 나는 몹시 화가 나서 큰소리로 그 개를 꾸짖었다오. 개는 침대 밑으로 숨었고, 나는 촛불을 밝히고 치마 위의 기름때를 깨끗이 지우려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깨끗하게 지우지 못했소. 나는 두렵기도 하고 밉기도 해서 가위를 들고 가서 개를 찔렀는데 처음에 개의 목덜미를 찔러 가위 한 쪽이 부러졌소. 나는 또 다른 한 쪽으로 잔인하게 개를 찔렀는데 잠시 후 개는 죽었다오.”

“아마 오랫동안 시어머니에게 억압당해서인지 나는 19살에 죽었고 그 후, 지금의 나로 환생했다오. 그해 나에게 살해된 그 개는 금생의 이막으로 환생했소. 내가 평소 그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내가 그의 목숨을 빼앗은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라오. 나는 내일이면 곧 죽는다오. 나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이막이 될 것이오. 이런 일을 나는 죽기 전날에서야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게 됐소. 인과응보의 천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오. 현모양처여, 당신은 슬퍼하지 마오.”

다음날(10월 13일), 당 현종은 여산 기슭에서 큰 열병식을 열었고 20만 장병이 여산에 운집해 깃발이 수십 리나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기세가 드높은 현종은 직접 북을 울렸다. 그런데 병부상서 곽원진(郭元振)이 급히 아뢰느라 예를 갖추지 않아 현종은 크게 노했다. 현종은 곽원진을 큰 깃발 아래로 끌고 가서 참형에 처할 것을 명했다. 재상(宰相)과 장설(張說) 등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사정하며 곽원진은 국가의 대공신이니 마땅히 사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종은 곽원진을 신주(현 광동 신흥)에 유배 보냈다. 현종은 노기가 채 가시지 않아 또 제군의 예절이 엄하지 않은 죄로 급사중 당소를 참수할 것을 명했다. 군신들이 미처 간언을 올리지 못했는데 이미 금오(金吾) 장군이었던 이막이 즉시 형을 집행했다. 이상하게도 처음 칼로 베었을 때 칼이 부러져 그는 다시 칼을 바꿔서야 당소를 베어 죽일 수 있었다. 역시 두 번 베어서야 비로소 죽일 수 있었는데 정말 응보는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 후, 당 현종은 당소를 죽인 것을 후회했고 이막이 형을 너무 빨리 집행했다고 책망해 그를 면직하고 영원히 임용하지 않았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서>

 

원문발표: 2020년 6월 23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23/4080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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