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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지진을 위해 저승에서는 50년 준비

[밍후이왕] 청나라 도광(道光), 함풍(鹹豐) 시기, 우수매(牛樹梅) 선생은 영원부(寧遠府) 지부(知府)로 있었다. 청렴하고 근면하게 벼슬을 지냈으므로 명성과 업적이 높아 백성들은 일제히 그를 칭송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성(城)안의 모든 집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관청도 여러 곳이 훼손됐다. 선생의 아들도 불행히 죽음을 면치 못했고, 그 자신도 발꿈치가 다쳐 걷기가 매우 불편했다.

우 선생은 분하고 답답한 나머지 한 편의 소문(疏文, 부처나 명부전 앞에 죽은 이의 죄를 아뢰는 글)을 써 지부 성황신(城隍神)에게 질문했다, 소문에는 성황신이 만민의 향불을 받으면서도 백성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큰 성안의 사람들이 다 악인이란 말입니까? 저는 관직에 있으면서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아들은 뜻밖에 죽고 저도 다쳤습니다. 정말로 천도(天道)를 믿어야 합니까? 천지신명의 감찰에도 착오가 있단 말입니까?”

밤이 되자 선생은 꿈에서 성황신을 만났다. 성황신은 예에 따라 그를 자신의 앞에 앉게 한 다음 말했다. “선생은 기세당당하게 비난했지만 아쉽게도 귀신지도(鬼神之道)를 모르네, 그 때문에 선생을 청하여 의심과 비방에 대해 좀 해명해 주려고 하네. 무릇 큰 재난이 온 것은 모두 많은 사람이 지은 업보로 인한 것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네.

이번 지진 재난은 저승에서 50년 조사하고 기록했네. 재난을 당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겼네. 최근에 새로 다시 죄를 지었다면 다시 옮겨오네. 설령 잠시 출입에 변화가 있어도 사람의 목숨을 돌봐줘야 하므로 절대 빠뜨리지 않네”

“그렇다면 온 성안에 좋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까? 저와 저의 아들도 죄가 있어 벌을 받은 것입니까?”라고 선생이 물었다.

성황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확실히 짧은 시간에 이사하기 어려운 세 집이 아직 있지만 지금 모두 평안 무사하네. 한 집은 모(某) 거리에 있는 열녀인데 삼세(三世)에 과부로 있으면서 손자 하나를 키우고 있네. 한 집은 모 의사인데 평생 가짜 약을 팔지 않고, 그에게 진찰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심야에 비가 오고 도로가 질퍽거려도 즉시 그 집으로 가서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네. 또 한 집은 유자(油糍, 찹쌀 도넛 비슷함)를 파는 노부녀인데 그녀의 어린 손자와 그녀 모두는 재난을 당하지 않고 있네. 선생은 돌아가서 조사하면 찾을 수 있는데 당신을 속이지 않네.

선생의 아들은 전생에 업이 많아 피할 수 없었네. 선생조차도 본래 액운 안에 있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게 처신했기 때문에 관대히 처분해서 발만 다치게 했네. 하여간 신이 벌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하지 절대로 사정을 봐주지 않네. 아무런 이유 없이 재난을 당하는 일이 없고, 재난을 요행으로 모면하는 일도 없네. 선생은 열심히 좋은 일을 하시면 장래에 ‘진얼[陳臬, 안찰사(按察使)의 별칭]’이란 관직에 오를 것이네.”

우 선생은 듣고 난 후 성황신에게 사의를 표하고 사과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 후 도처에 탐문 조사해 보니 과연 그 열녀와 의사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평안 무사했다. 다만 집이 작아 양쪽에 있는 집에 의해 가려져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유자 파는 노부인만 여러 번 찾아보아서야 겨우 찾았는데 그는 서까래가 받쳐져 무너지지 않은 집의 구석에서 발견됐다. 우 선생은 그녀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평소 이곳에서 장사하는데 노약한 장애인을 만나면 돈이 모자라도 그들에게 팔고, 가끔 한 푼도 받지 않고 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지진이 일어나기 하루 이틀 전, 갑자기 유자를 사려는 사람이 많아져 공급이 달린 그녀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밤에 유자를 만들어 팔 준비를 했다고 했다. 지진 발생 후에는 손자와 함께 무너진 집 안에서 3일 동안 갇혀 유자로 배를 채웠고, 또 누르는 힘이 너무 커서 혼자서는 나갈 수가 없었는데 생각밖에 지금 다시 빛을 보게 됐다고 했다.

우 선생은 듣고 나서 매우 놀랐다. 그 후로는 귀신인과(鬼神因果)의 도리를 깊이 믿고, 더욱 열심히 좋은 일을 하는 관리가 됐다. 그 후 과연 사천(四川) 안찰사로 승진했다.

주: 역사상 확실히 우수매란 사람이 있었다. 우수매(1791~1875), 자는 설초(雪樵), 호는 성재(省齋), 감숙(甘肅)성 통위(通渭)현 사람, 도광(道光) 21년 진사(進士), 사천 장명(彰明)현[현 강유(江油)시 지현(知縣)], 무주(茂州), 직례주(直隸州), 지주(知州), 영원지부(寧遠知府), 사천 안찰사 등 직무 역임.

[청사고(清史稿)]에서는 그를 ‘판결을 신중히 하여, 백성들이 과오를 숨기지 않고, 모두 우러러 섬겼다’라고 했고, 현지 백성들은 ‘우청천(牛青天)’이라 불렀다. 또 그를 위해 ‘덕정방(德政坊)’을 세웠는데 이 패방(牌坊)은 현재 아직 남아 있다. 오늘의 사천 강유시 청련(青蓮)진에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수매는 도광 28년(1848)에 영원부 지부 역임. 당시 영원부는 사천성 관할이고 부치서창[府治西昌(현 쓰촨성 시창시, 량산이족자치주 정부 소재지)]였다.

이번 지진은 청나라 도광 30년 8월 초 7일(1850년 9월 12일) 밤에 발생한 진도 약 7.5급의 서창 지진이다.

‘청사고’ 기재에 따르면 ‘땅이 크게 진동하여, 온 성이 함락되고,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우수매는 땅에 파묻혔지만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우청천이 선을 행하여 하늘이 살려주었다고 말했다. 우수매는 덕이 적음을 자책하고, 자신을 반성하면서 더욱 많은 백성을 돌봐주어 그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의 사천 총독 서택순(徐澤醇)은 청나라 조정에 올리는 상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창현 지현 명겸주(鳴謙奏)의 말에 따르면 8월 초 7일 밤 해시(亥時)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위아래로 흔들거리더니 집이 무너졌다. 온 성안에 울부짖는 소리가 요란했고, 밤에 내린 비 때문에 구원할 길이 없었다. 날이 밝자, 온 성의 집들은 골목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다 무너졌고, 절과 성루, 문무아서(文武衙署) 및 감옥, 창고가 모두 무너져 있었다……. 파묻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우수매 본인도 ‘서창지진기변(西昌地震紀變)’이란 시를 써서 지진 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밤중 갑작스러운 천둥소리 울리더니 산악이 요동치며 무너지네. 침대는 춤추는 사람처럼 흔들거리고, 만 채 가옥은 고엽처럼 부서졌네, 동틀 무렵 나가보니 온 성이 평평해졌네. 이 처참한 피해를 누가 알 것인가.”

노산(瀘山)에 있는 서창 지진비림(地震碑林)에도 이번 지진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적혀 있다,

[각원필기(覺園筆記)에서 발췌]

 

원문발표: 2020년 3월 9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3/9/4021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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