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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로 보는 인류 사상의 변천(2)

글/ 프랑스 수련생

[밍후이왕]

조각상의 배후

제단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외하면 교회 건축에 있어 또 하나의 주요한 장식은 자연히 조소 작품이었다. 고딕 양식의 조소는 주로 고부조(高浮彫)와 환조(丸彫)였고, 깊은 심도를 확실하게 낼 수 있는 이런 조각상으로 교회의 공간감을 키웠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당시의 조소는 단지 건물의 부속품이었는데, 예를 들어 교회의 문이나 창문 등 여러 곳의 작품이 일반적으로 모두 조각가와 건축가의 공동 노력에 따른 것이었다.

圖例:巴黎聖母院(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右側門像柱浮雕裝飾,從左到右表現的主題依次是哲學、天文學、語法學和音樂。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오른쪽 문 조각 기둥의 부조 장식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표현된 주제는 차례대로 철학, 천문학, 문법론과 음악이다

이런 교회의 조소는 이치대로 말하자면 마땅히 순수한 종교 소재의 작품이어야 했지만, 어떤 작품은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한 기독교의 것이 아니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과 샤르트르 대성당 등 종교 건축물에서 인문칠과(人文七科)와 기타 학문 분야 주제의 조소를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일부 비기독교의 오랜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

‘자유칠과(自由七科)’라고도 하는 ‘인문칠과(人文七科)’는 고대 사회에서 자유를 가진 서양 사람들이 반드시 배워야 했던 일곱 가지 학문 분야다. 12, 13세기 유럽에서 차츰 흥성한 중세시대 대학에서 먼저 교수에게 요구된 것은 세 가지의 기초 학과인 문법학, 수사학과 변증법, 즉 ‘3학(三學, Trivium)’이었고, 그 기초 위에 다시 네 개의 학과인 산술, 음악, 기하, 천문, 즉 ‘사과(四科, Quadrivium)’가 요구되었다. ‘3학’과 ‘4과’를 합하면 곧 7과로, 이를 완성한 학생은 다시 철학, 신학 등 고등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칠과든, 철학이든, 중세기가 되어서야 출현한 것이 아닌, 고대 그리스 시대의 문화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약 천문, 별자리까지 말한다면 심지어 더욱 먼 고대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것들은 기독교 신앙과 무관했다. 철학을 예로 들면 원래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세계, 우주와 진리를 인식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고, 동방의 불(佛), 도(道) 양 가의 수련방식과 일부 유사했다. 당시 서양 학술계의 적지 않은 역사학자, 철학자가 인식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은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학문과 전혀 달랐다. 그것은 바로 일종의 정신적인 수련이었고, 석가모니와 노자가 전한 수련의 법문과 비교됐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철학’ 개념과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전해 내려온 일부 수행 문파와 수련법문(지금 사람들은 철학의 유파로 생각한다)은 내재된 지혜가 세간의 일반적인 학문을 초월했으므로 생명력이 강했다. 그래서 유럽 기독교가 대통일을 이룬 시대에도 고대 수련법의 불꽃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휘황찬란한 문화, 전통 속의 철학적 사고방식이 이미 유럽인의 핏속에 녹아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초기 일부 선교사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 논증을 기독교 교리의 합리성과 결부시키자 일부 기독교도가 대자연의 신비를 탐색해 하느님의 위대함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무의식중에 기존 종교 교리의 단순함을 파괴하면서 이질적인 사상과 잡다한 것들이 섞여 더는 종교 신앙을 순수하지 않게 만들었다. 다른 수련법문이 잡다하게 섞인 종교의 수행은 종교 자체의 생명력을 약화시켰다.

다른 학과, 예를 들어 천문학도 같은 영향을 받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현대과학의 천문학 개념이 없었다. 당시에 논의되던 천문학은 소량의 천문연구를 제외하면 주로 점성술로 불리는 별자리 학문이었고, 통속적으로 말하면 운명을 점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천체현상과 운명을 믿었던 각국의 통치자는 늘 궁궐 안에 점성술사를 고용해 자신들의 정책 결정을 돕게 했고, 그 방면의 연구를 지원했다. 모두 알다시피 하늘의 모든 별에는 이름이 있다. 예를 들어 목성을 서양에서 주피터로 부르는데, 고대 로마 신화 속에서는 신들의 왕을 지칭한다. 금성은 비너스로, 고대 로마 신화 속 사랑과 미의 여신이다. 그리고 그런 별자리의 명칭 대부분이 고대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나 인물, 동물에서 유래했고, 가장 유명한 황도 12궁은 더욱 이른 시기인 고대 바빌론의 종교요소와 관련이 있다. 한 기독교 신도가 온종일 다른 체계의 신의 이름을 외우며 별자리 연구를 한다면 분명히 보기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기 6세기부터 12세기까지 교회 통치구역 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많은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의 사물이 만약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거나, 전적으로 허구적인 것이라면 역사적으로도 일정한 생명력을 갖출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점성술이 만약 점을 치는 데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거나, 아무런 효과가 없는 얕은 속임수에 불과했다면, 이번 차례 인류문명에서 수천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역사상 시간의 변화가 줄곧 계율이나 종교 규칙의 해이와 약화를 수반한 데다, 무슬림 세계가 점성술 방면의 연구 성과를 이끌었고, 비잔틴 세계도 갈수록 흥미를 느꼈으며, 일부 서양국가 황실 법원이 문서로 공식 허가를 했으므로 기독교 종교와 완전히 달랐던 이런 문화가 결국 유럽에서 다시 흥성해졌다.

종교 건축물의 조각이 표현하는 그런 이질적 문화의 것들은 신앙이 그때부터 이미 더는 순수하지 않게 됐고, 외재적인 지식과 사람의 이성에 따랐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바깥에서 구하는 방식은 사실 원시 기독교의 마음속으로 수행하는 전통과 전혀 부합하지 않았고, 갈수록 사람들의 주의력을 현실 생활과 물질로 돌려 결국 점점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정화시켜 신의 은혜를 증명하기보다는 세간의 성취에 매달리게 했다. 이런 조소는 인간의 사상속의 신성(神性)을 점점 약화시키고 세속적인 것과 인성(人性)이 점점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과정을 충실히 기록했다.

매너리즘 화풍

휘황찬란한 르네상스의 한껏 무르익은 정통예술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이번 차례 인류 역사에서 거대한 종처럼 울려 퍼지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르네상스가 끝난 후, 그 여운이 2백 년이나 지속되며 인류예술사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 신이 전한 정통예술의 요소와 문화의 내포를 후세에 전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에 미친 의미와 요소는 늘 단순하지 않았다. 음양의 평형 속에 긍정적인 요소만 있기는 불가능하며, 문화의 충격에는 자연히 그것의 부정적 일면이 존재한다. 사실 세간의 것들도 항상 그랬다. 특히 르네상스의 전성기가 지난 후, 부정적인 요소도 갈수록 분명히 드러났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르네상스 전성기의 3대 거장 중 예술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19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1년 후, 3대 거장 중 르네상스 예술의 정점을 상징하는 회화의 대가 라파엘로마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 큰 별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가 점차 쇠약하기 시작했다. 사학계는 1527년의 로마 약탈을 전성기의 종결 시점으로 규정한다. 비록 3대 거장 중 한 사람이 남아 있었지만, 조소에만 재능을 가졌던 미켈란젤로가 혼자서 이탈리아 예술의 쇠락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일 년 내내 계속된 전란, 교회의 부패, 경제의 침체와 예측할 수 없는 인심 등 많은 부정적인 요소는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상황과 맞물려 당시 예술가들의 사상과 심태를 점점 바꾸고, 예술의 양상까지 바꾸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숭배하던 고대 그리스 문화는 사람을 계몽하는 데 있어 이성을 중시했는데, 바로 사람의 이성을 통해 진리를 장악하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상은 비록 르네상스 시기에 생겨났지만, 그것만의 역사가 있었다.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 초기 일부 선교사는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철학으로서 교리의 합리성에 대한 논증을 시도해 교부철학(patristic philosophy)을 형성했다. 교부철학은 이후 중세시대에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으로 발전했다. 비록 고대의 비기독교적 요소가 섞였지만, 이런 요소와 종교의 이론은 역사를 거치는 동안 서로 닦이며 결합됐고, 교회로부터 체제 내의 결과물에 속한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이성과 철학의 관점에서 종교의 교리를 논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혼란한 형세에다 교회가 부패하고 심지어 음란해져 갈수록 인심을 잃어가면서 신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도 힘을 잃었고, 현실 생활, 그리고 사람 자신의 이성과 자아의식이 더 중시되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의 사상은 점점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고, 개인의 자아발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사람의 이치와 적극성에 의지해 현실적인 환경을 변화시킬지언정 예로부터 추앙하던 덕행의 제고와 하늘의 구원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데 의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신성(神性)과 신앙 방면의 요소는 감소했고, 인간성을 중시하는 향락주의 경향이 갈수록 많은 곳에서 나타났다.

이렇게 예술가들의 머리가 인간성으로 가득 차게 되자 감정이 점점 이성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예술가들이 종전처럼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격렬한 사업 경쟁 속의 예술가들이 모두 이전 사람의 스타일을 넘어서는 독특한 것을 추구했는데, 고객의 호감을 사기 위해, 또는 시류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들의 구미에 할 수 없이 영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세기 예술 시장에서도 비평가의 찬사와 예술 상인의 관심을 얻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각 방면 요소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예술 표현 형식과 스타일에서는 이전 르네상스 시기의 창작 수법과 다른 것들이 더욱 많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점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실한 회화 원칙과 라파엘로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에서 멀어졌고, 르네상스 시기에 있었던 고전주의와 상반되는 특징을 형성했는데, 후세에 이것을 ‘매너리즘’이라고 불렀다.

지적해야 할 것은 ‘매너리즘’이 후세의 학술계에서 지어낸 모호한 명사이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확실한 개념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매너리즘 화가가 각자의 독특한 화풍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화가들이 머리를 쥐어짜며 참신한 시각효과를 창조해 르네상스 시기 대가들을 넘어서려 했지만, 예술은 단지 외재적인 형식에 국한되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여전히 작품 속에서 표현하려는 정신적 풍모와 사상의 내포,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신성한 아름다움은 단련을 거친 완미한 예술 형식으로 표현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런 내재적인 것은 조화로운 구도, 정확한 형체, 진실한 색채 등 외재적인 시각 요소에 포함된 것이었는데, 외재적인 기본적 시각 요소를 위배하고부터는 더욱 숭고한 내재적 정신을 표현할 수 없었고, 변형된 형체로 표현한 ‘참신함’은 독이 든 술로 갈증을 푸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관객의 심리로 봤을 때 이런 그림 속 인물의 형체가 변형된 데 따른 순간적인 신선함은 오래 가지 않고, 위화감을 느끼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한 폭의 꼴사나운 그림이 사람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괴로움을 느끼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작품은 결국 미술사에서 많은 영예를 누릴 수 없었다.

사진기가 없던 시대에 초상화는 사진의 기록 기능을 맡았고,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첫 준칙이었다. 생각해 보면 만약 어떤 사람이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했는데, 화가가 모종의 참신한 ‘스타일’을 위해 투시 수법을 써서 상대방의 머리나, 몸을 마치 꼬인 것처럼 변형시켰다면 누가 돈을 내려 하겠는가? 그대로를 그린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의 시각적 본능이다. 그래서 이렇게 단순화되고, 변형된 스타일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었으며, 점점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되었다.

나체 예술의 등장

교회 세력의 쇠락과 세속왕권의 강화로 인해 예술 시장의 출자자도 더는 과거처럼 천주교회와 관련 계통이 주를 이루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의 예술 소재와 종류는 획일화된 종교 그림이나 조소가 넘쳐나던 때와 달랐다. 초상, 역사, 풍속, 그리스 신화 등 수많은 소재가 갈수록 많이 미술작품 속에 등장했다. 당시 각국 황실의 심미적 취미도 중세시대보다 더욱 세속적이었다. 예술가들은 시기를 더욱 정확히 간파해 최고 수준으로 단련된 이탈리아의 나체 예술기교를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다른 국가로 끌어들였다.

圖例:巴黎聖母院西面高浮雕裝飾。左側的主題是創造夏娃;中間部份表現了亞當和夏娃在伊甸園被引誘的情景;最右側的內容是亞當夏娃被逐出伊甸園。由於當時藝術作品表現的形像必須遵循《聖經》的記載,因此他們皆為裸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서쪽 부조 장식
. 왼쪽의 주제는 이브 창조, 중간 부분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유혹을 당하는 장면, 가장 오른쪽의 내용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모습이다. 당시 예술작품의 형상이 반드시 <성서>의 기록대로 표현되어야 했으므로 그들은 모두 나체다.

사실 예술작품 속의 나체형상이 중세시대에도 절대적인 금기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성서>의 기록에 따라 나체로 표현된 아담과 이브, 또는 지옥에 떨어진 악인에 대한 묘사가 허용됐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3세기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안팎에 설치된 아담과 이브의 조소는 모두 옷을 입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의 관점에서 원죄 이후의 나체는 기독교의 금욕 취지에서 벗어나며, 쉽게 사람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풍기문란을 조장한다고만 여겨졌다. 그래서 나체의 형상은 흔히 수치, 성욕, 죄업, 마귀 등의 개념과 하나로 연결돼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일률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오히려 다른 해석을 가져왔다. 오스만제국이 굴기한 후,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침략받아 멸망했다. 현지의 수많은 학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진귀한 예술품과 각종 철학, 역사 등 고대 서적을 대량으로 지니고 서쪽으로 피난했다. 이 일은 유럽, 특히 최근에 비잔틴과 결별한 이탈리아로 하여금 본토의 고고학적 성과와 결합해 고대의 휘황한 문명과 예술적 성취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했다. 그 속에는 자연스럽게 고대 그리스, 로마 시기에 대량으로 출현한 나체 예술이 포함되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상은 당연히 위대한 신이며, 고대 그리스의 신이 또 자신의 형상을 모방해 사람을 창조했고,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예술작품을 통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구현했다. 사실 이는 유럽 대부분 민족이 관념상 나체를 부끄럽게 여긴 것과 큰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발굴되자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참고로 삼았는데,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도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을 모방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의 형상은 완미한 것이었고, 그래서 모방 제품인 인체도 아름다운 특질을 갖춘 것이었다.

처음에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그리스 문명의 신화적인 인물이나, 고서적에 기재된 옷을 입지 않은 신의 나체형상을 빚음으로써 저속한 수치심으로 오염되지 않은 성결하고 순수한 ‘진(眞)’을 표현했다. 그래서 아무런 색정적인 뜻이 없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런 종류의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나체화가 점점 유행하게 되었다. 화가들에게도 각자의 다른 사상적 기초와 심미안이 있었고, 출자자와 감상자 대부분은 세속적인 감정과 욕망을 가진 보통사람이었다. 적지 않은 의뢰인이 이런 그림을 산 것은 대중 앞에 보이기 위함이 전혀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감상하고 소장하거나, 상류사회에서 인맥을 트기 위한 선물로 사용했다. 작품 속의 나체인물이 비록 ‘비너스’나, ‘아프로디테’ 같은 여신의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 사람들은 모두 그런 이름이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성적인 미인을 표현하기 위한 명목상의 포장과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

그 시대에는 인체 전문 모델이라는 직업이 없었고, 화가가 나체를 그릴 때는 주로 용모가 출중한 고급 기녀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모두 수입이 적지 않았고, 호화로운 집에서 살았으며, 시학(詩學)과 음악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러나 손쉬운 기녀들이 우아하고 비현실적인 미모를 가졌지만, 마음속의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기녀를 모델로 한 여신의 형상으로는 성결하고 숭고한 신성(神性)을 나타낼 수 없었고, 화가의 수정이 필요했다. 예술가의 사상 속에서 성결함과 신성함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 사라지자 사람들에게 보여 진 것은 단지 기술이 출중하고 적나라한 색정의 그림에 불과했다.

사회 조류가 오염되고 사람들 마음속 신앙이 약화되어 사람들도 천주교를 믿는 화가에게 왜 다른 체계에 속한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신을 그리는지를 추궁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서양인들이 모두 불가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는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평소 기독교의 유사한 교리를 배운 적은 있었다. 이런 이질적인 것은 종교 신앙의 힘을 더욱 약화시켰고, 나아가 종교 도덕으로 하여금 사람의 도덕을 계속 유지할 수 없게 했다. 동시에 욕망을 가진 일반 대중은 색정의 의미가 없는 것을 대할 때도 보기 좋은 이성의 나체화나, 조소가 보이면 정욕 방면의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설령 예술 창작을 할 때 예술가의 사상이 순정했더라도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이 나체형상이면 감상자의 욕정을 불러일으켰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색정 예술이 사람의 감각기관을 직접 자극했으므로 현실 생활, 심지어 사회 인구 구조까지 영향을 받았다. 당시 베니스의 사학자 마리노 사누도(Marino Sanudo, 1466~1536년)가 이런 현상을 기록했다. 16세기 초 베니스의 12만 인구 중 등록된 기녀는 최고 11,654명에 달했다. 19세기 스위스의 저명한 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는 연구를 통해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한 외도는 혼인한 가정의 도덕적 추락으로 사회적 위기가 초래된 것을 밝혀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시기 이탈리아의 특징 중 하나는 혼인과 그 권리가 다른 어떤 것보다 빈번하게 계획적으로 짓밟힌 것이다…. 부부가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의심할 여지 없이 흔했고, 어떤 상황에서는 또 피비린내 나는 복수로 이어졌다.” 사회의 이런 풍기문란은 문예 작품의 인도, 선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도덕을 단속하지 않고 욕망을 방종한 결과는 가정과 사회의 위기에 그치지 않았다. 의학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1494년부터 1495년까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사망률이 극히 높은 성 전염병이 대규모로 퍼졌고, 이후 유럽 전체에 만연했는데, 바로 후세 사람들이 말하는 ‘매독’이었다. 유효한 치료수단이 없었으므로 이 질병은 순식간에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각국을 놀라게 했다. 놀란 사람들은 음란한 세상에 내린 하늘의 벌이라고 했다. 그때야 할 수 없이 자신의 욕망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사실, 사람들이 강렬한 욕정에 사로잡혔을 때는 설령 감염되거나, 심지어 죽음의 위험이 닥쳐도 일부 사람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 점은 역대로 대량의 감염자 집단이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병을 다스리기 위해 사람들은 그저 신체를 크게 손상시키며 부작용이 극심한 수은 요법에 의지해야 했다. 20세기 40년대 전까지 인류는 매독 치료에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병을 예방하는 유일하고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순결을 지키는 것이었다.

당시 도덕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유럽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의 방종적인 향락주의는 아주 낯선 것이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심지어 ‘이탈리아화 된 영국인은 마귀의 화신(An Englishman Italianate is a devil incarnate)’이라는 극단적인 속담이 유행했다. 셰익스피어 희곡 중의 몇몇 이탈리아인이 도덕이 타락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악당으로 묘사된 것을 보면 이탈리아식 사고방식이 모든 서방국가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본인도 그런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의 비너스와 아도니스> 등 작품에서도 사실은 그런 방면의 묘사가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유럽 각국에서 매독이 유행한 것으로 보면 당시 유럽 전체는 이미 도덕이 떨어지는 단계에 있었고, 어느 한 국가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런 질병은 90% 이상이 성 접촉으로 감염됐고, 한 국가의 음란한 정도가 곧 발병률과 정비례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욕망을 방종 하는 향락주의 사조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예술기법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이 감각기관을 동원해서는 추한 부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적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이탈리아화와 예술상의 번영이 당시 학술 사조를 가장 앞에서 이끄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예술기교 상 다른 지역을 멀리 초월하면서 지극히 아름답고 정교해 탄성을 자아내는 작품은 또 사람들 속에서 이탈리아의 문예 작품은 어떤 것도 좋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표면상의 화려함에 이끌린 사람들은 심층의 본질적인 것을 더 많이 고려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술작품이 사람들의 감각기관을 가장 직접적으로 자극해 감화시킬 수 있었으므로 사람의 도덕에 미치는 영향도 가장 컸다. 문예 작품 속의 반복적인 과장은 그런 작품과 접촉하는 사람들을 점점 작품이 표현한 사상에 동화시켰다. 이런 사상은 사람들 속에 확산되면서 사회 전체의 여론을 형성하고 도덕관념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비록 당시 사회의 대다수 사람이 여전히 종교를 믿었고, 심지어 상당수가 열정적인 종교 신도였지만, 도덕성이 떨어진 후의 행위는 성경의 요구와 판이하였다.

당시 각국의 화가는 분명히 그런 사조에 더욱 많은 물이 들었다. 예를 들어 16세기부터는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나체화가 등장했다. 나체화의 대량 유입은 비록 화가들로 하여금 인체구조를 그리는 방법에 더욱 능숙하게 했고, 회화기법을 새로운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지만, 그 부작용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인 마르그리트 당굴렘(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년)의 저서 엡타메롱(Heptaméron)>을 보면 당시의 귀족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갈수록 심각한 색정적 풍속이 가져온 대규모 성병과 분노한 종교개혁파의 성토에 직면하자 1561년 1월 말의 삼부회(États généraux; 귀족, 성직자, 평민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가 끝난 후, 프랑스는 음란 금지령을 선포하고 기생집과 남녀가 혼욕하는 대중목욕탕을 폐쇄했다. 비록 매음 활동이 이때부터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결국은 삼가 하게 되었다.

1563년, 18년을 끌던 트렌트 종교회의(Concile de Trente, 1545~1563년)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결정적인 회답과 구체적인 방안이 도출됐다. 당시 사람의 절대다수가 종교 신도였으므로 이런 조치도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예술작품에서는 나체가 금지되기 시작했고, 기존 회화와 조소에 포함된 나체인물을 모두 당시 예술가가 수정하면서 옷과 장신구, 화초, 나뭇잎 등을 생식기 위에 덧붙여 민감 부위가 직접 노출되는 것을 피하게 했다. 동시에 예술계가 종교 주제의 난잡한 장면을 남용하는 것이 발각됐으므로 회의는 교회로 하여금 향후 종교 예술품의 내용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진행하게 하고, 예술가에게는 종교 이야기를 묘사할 때 장엄하고 신성한 장면으로 표현하고 미덕에 대한 예술의 확산 작용을 강조했다.

(계속)

 

원문발표: 2019년 11월 18일
문장분류: 천인사이>문사만담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9/11/18/3957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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