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프랑스 수련생
[밍후이왕]
서문
오늘날의 역사 시기는 전통문화가 점점 깨어나는 과정에 놓여 있고, 적지 않은 사람이 전통문화와 예술의 부흥이 힘을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전통문화가 서로 다른 천체 층차에서 왔고, 성질이 판이한 각종 요소를 갖고 있으므로 전통의 서로 다른 갈래와 흐름, 그리고 그 발전과정을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 십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물과 불을 제멋대로 함께 놓는 것처럼, 그 결과는 물이 증발해 마르고 불이 꺼지게 될 것이다. 원래는 모두 전통적인 것이지만, 만약 성질이 다른 것이 함부로 섞여 들어가고 혼합된다면 뿌리가 없고, 심지어 변이되어 손상될 것이다. 사실상 인류가 성주괴멸(成主壞滅)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해 오늘에 이른 역사가 일찍이 이 점을 증명했다.
인류의 예술사, 사상사가 연관된 범위는 거대하며, 본 문장의 편폭과 여러 한계로 인해 각 방면의 각 요소를 똑똑히 담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역사의 작은 일부 내용과 소량의 요소를 고를 수밖에 없으며, 인류의 사상과 신앙의 붕괴를 한 단락 예술사 중 약간의 표현과 필자의 한정적인 견해 속에서 논술함으로써 고견을 끌어내려 한다. 여러분이 일부 지나간 일들을 돌아보고, 역사를 거울로 삼아 이 방면에서 일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 가운데 하나를 인용하고 만 가지를 빠뜨리는 것을 피하기 어려우니 독자 여러분의 용서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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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창공으로 돌려 은하 속의 한 입자인 지구를 대비해 보면 작고도 미약하지만, 이 행성의 주민에게는 실로 거대하고 광활하며, 게다가 하나하나의 찬란한 문명을 품고 있다. 이 행성의 운행에 따라 인류의 역사도 한 걸음 한 걸음 반전을 거듭했고, 오래된 문명이 생겨나 흥망성쇠 했으며, 오래된 국가가 건립되어 번영하고 멸망하고, 이어서 또 새로운 문명이나 새로운 국가가 그들을 대신했으며 그 과정이 인간이 항상 이야기하는 역사를 엮어냈다. 우주에 우주의 역사가 있고, 은하에 은하의 역사가 있으나, 인간이 더욱 많이 담론하는 것은 바로 인류의 역사다. 역사의 바퀴가 어느 단계로 굴러오면 피할 수 없는 일이 발행할 것이며 인류의 예술도 이와 같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천 년을 넘는 유구한 세월 속에 얼마간의 진보를 얻거나, 뛰어난 작품을 창조하지도 못했지만, 갑자기 5백 년 전부터 180년 동안 기예(技藝)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는 절세의 걸작을 잇달아 대량으로 창조해 인류 역사를 자랑스러운 기록들로 채웠다. 역사가 특정한 시간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상연되는 중에서 르네상스 전후의 중요한 단막도 포함됐다.
중세시대 도시 환경
르네상스 이전, 천 년 동안의 장구한 시간을 역사학자들은 중세시대라 칭한다. 이전에는 적지 않은 학자들이 당시를 무지몽매한 암흑시기라고 여겼지만, 오늘날 학술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두 그것이 착오임을 알고 있다. 세속의 정권이 사분오열하고, 온갖 번잡한 전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시대에 교회는 점차 유럽 사회의 인심을 안정시키고 대중을 구제하는 핵심 도구가 됐다. (주: 본문은 언급되는 종교나 문화에 대한 좋고 싫음 없이 역사를 단순하게 묘사할 뿐이며, 절대 어떠한 종교 유파를 겨냥하지 않음)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수도사들은 평소 사람들 속에서 선행을 펼치고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해 고결한 모습을 차츰 사람들의 마음에 심었고, 기독교 신앙을 모든 사람에게 보급하기 위해 좋은 평판을 만들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당시 사회는 의심할 바 없이 더욱 정신적이었다. 사람들이 더욱 중시한 것은 영혼의 귀속이었지, 현세의 생활이 아니었다. 종교 문화 전통은 사람의 사상을 안정적으로 단속했고, 집단의식 속에서 통치의 지위를 가졌다. 이렇게 강대하고 단일한 의식에는 사람의 도덕 표준을 보호하는 힘이 있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경건하게 가르침을 믿고, 종교의식을 하면서 형성된 분위기는 역으로 다시 이런 의식을 견고하게 강화해 기독교 문화의 강대한 번성을 유지했다.
중세시대에는 수많은 독실한 종교인이 도덕규범을 준수하면서 평소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덕으로 원한을 갚고, 심령을 정화했으며, 종교활동 참가를 지속함으로써 사후에 영혼이 천국에 오를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교구, 교회와 사람들의 생활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국민종교란 각 방면의 일상적인 일에서조차 수도하는 기운이 분출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종교의 일과 세속의 일이 오늘날과 전혀 다르게 엄격히 구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종소리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영성의 수련, 또는 혼례와 장례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하루의 일과 휴식 시간을 제시했다. 도시와 읍에서 교회는 단지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전 시민이 함께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대중에 대한 교회의 중요성에 비추어 그것의 형상에도 일정한 미적 감각을 갖출 것이 요구됐는데, 그래야만 사람들의 종교 감정을 불러일으켜 마음을 교화하는 작용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 맞추어 일종 예술적 풍격(風格) 생겨났다.
12세기부터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드프랑스 지역에서 기원했지만, 후세인들이 ‘고딕 양식’이라 부르는 프랑스 스타일 건축이 그 후 몇 세기에 걸쳐 발전하며 전파됐고, 15세기에는 지리적으로 오늘날의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북부와 이탈리아 북부 등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고딕식 건축은 프랑스식 교회의 발전에 따라 시작된 것으로, 천천히 성숙한 후에는 성루나 궁전 건축 구조에서도 등장했다. 하지만 언제나 대성당, 대 수도원과 교회 등 종교 건축이 주를 이루었다. 사실상 서양 예술의 탄생과 발전은 모두 신전과 교회 안에서 시작됐고, 특히 전 국민이 신을 믿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고딕식 건축물인 프랑스 아미앵 대성당, 1220~1269년 건축, 사진 속에서 건물 바깥을 둘러싼 버팀도리가 벽을 지탱하게 하는 역학적 구조로 벽체의 하중 부담을 분산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아미앵 대성당 내부, 고딕식 교회의 웅장한 예술 구조 프레임. 군집 기둥과 아치가 어우러져 시각적으로 높고 깊은 공간감을 형성하고 있다.
고딕식 건축의 갈수록 완벽해진 첨두아치와 버팀도리 등의 구조는 역학적으로 벽체의 하중 부담을 경감시켰고, 프레임 구조는 정상부 지지를 강화해 교회를 더욱 높고 크게 지을 수 있게 됐다. 이로써 겉으로는 더욱 웅장한 외관이, 내부에는 더욱 광활한 공간이 출현하게 됐다. 도시 건축과 민간 주택이 일반적으로 높지 않았던 이전 몇 세기에 고딕식 대성당은 주변 건물과 대비되어 더욱 높이 솟아 보였다. 이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술 구조는 수직적인 감각으로만 가득했고, 상당히 높은 군집 기둥이 있어 시각적으로 수직으로 상승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정상부에 가까워져서는 계속 위로 뻗어 나가는 첨두아치와 연결되어 시각적으로 더욱 높은 공간감을 형성했다. 건물 전체가 끊임없이 위로 뻗어 나가 광대하며 높고 심원한 공간에 이르는 광경으로 신과 천당에 대한 사람의 지향과 동경을 구현했다.
만약 도시 속의 작은 건물과 주민의 건물이 횡적인 선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고딕식 교회의 선은 종적인 것이었다. 가령 횡적인 선이 모두 사람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세간의 활동을 상징한다면, 수직적인 선에는 차원을 초월하는 의미가 있고, 더욱 높은 층면의 승화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고딕식 건축의 선은 끊임없이 사람의 시선을 위로 이끌며, 사람에게 인간 세상이 아닌 하늘에 주목하게 한다. 곧장 하늘로 솟구치는 힘은 생명의 에너지와 전진하는 방향을 나타내며, 사람들에게 심령을 위로 제고하는 것을 잊지 않고 천국으로 회귀하는 생명의 목적을 이루도록 알려주는 의미가 있다.
수련을 보조하는 예술 환경
자연적인 일조의 조건에서 고딕식 건물 내부는 흔히 로마식 건축물보다 훨씬 밝아 보인다. 그 원인은 고딕식 구조의 벽체가 역학적으로 창문의 수량과 면적 증가를 허용해 더욱 좋은 채광을 얻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이런 건축물의 내부에서는 이탈리아식으로 대형 벽화가 혼재된 넓은 벽면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시대의 사람은 신이 세계를 빛으로 가득 채웠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현실 속의 빛은 신의 빛의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신성한 주제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 빛이 교회 안을 비출 때, 그것은 현실 중의 물리적인 빛이 신성한 속성을 가진 빛으로 변화한 것을 상징했다. 왜냐하면, 기묘한 빛을 발산하는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에 묘사된 각각의 신, 또는 성인의 이야기가 인심을 교화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맹률이 높던 시대에 번쩍이는 광채를 내며 높은 곳에 세워진 그림을 통해 그것들을 우러러보는 대중에게 선교하는 것도 일종의 필연적인 방식이 됐다.
그 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 창 예술은 ‘성경’ 이야기와 성인의 기적 등 상황의 묘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선(善)에는 선의 응보가, 악에는 악의 응보가 있음을 알려주었고, 수행 원만한 사람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등의 이치를 알려주는 회화의 서사적인 작용이 예전과 다름없이 펼쳐졌다.
대중에 대한 선교의 기능을 맡은 것 외에도 이런 현란한 색채의 예술 자체가 또 일종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즉 일종의 특수한 시각적 분위기를 만들고 건물의 높은 공간감과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써 사람의 종교 정서를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공간예술 환경을 형성했다. 이 점은 수도사가 운집한 종교 장소에서 특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고, 그것은 수도사에게 명상 상태로 빨리 진입하게 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바로 그들의 수련을 돕는 것이었다.
일생을 수련에 바친 수도사들의 생활은 대단히 단순했다. 특히 현대의 각종 첨단기술로 무장한 오락과 정보의 홍수 없이 생활하던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간단하고 조용하게 지냈다. 당시의 사원 제도에 따라 수도사들은 반드시 개인의 감각적인 오락, 물질적 보수, 가정생활 등 세속적인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왜냐하면, 세속의 일체 욕망을 포기한 수도사가 추구하는 것은 일반인의 수준을 초월한 정신생활이었고, 이것이 13세기 이전에는 지극히 엄격하게 요구됐기 때문이었다.
현대사회의 보통 사람은 고대인의 정신상태를 체험할 방법이 없다. 첨단기술 세계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각종 정보, 관념, 유혹이 사람의 머리를 채우지 않을 때가 없고, 모든 사람의 머리는 거의 매초 각양각색의 일을 생각하고 있어 고요해질 틈이라곤 없다. 만약 한 일반적인 현대인에게 명석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잠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어떤 염두도 일으키지 말라고 한다면 아마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일반 대중을 받아들이는 교회와는 달리 고대 수도원에서는 세상과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는 수행 생활로 인해 수도사의 사상도 대단히 단순했다. 그곳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 종교 그림을 통해서 뿌려지는 성스러운 빛이 노래나, 연주되는 종교음악과 어울려 일종의 서라운드 시청 환경을 만들어내 건물 내부의 광활한 공간을 진동시켰다. 이렇게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은 사상이 단일한 수도사들의 만 가지 생각을 하나로 모아주었고, 기도와 묵상 시에는 빠른 속도로 잡념을 버리게 해 아주 쉽게 동양의 수련에서 정신을 집중해 입정하는 것과 유사한 상태에 들어가게 했다. 전해져 내려온 이런 활동은 수도사의 정신을 물질세계에서 비 물질세계로 진입하게 했고, 오묘한 상황에서 신의 은덕을 느끼게 했다.
또 하나, 서사적 기능을 제대로 펼쳤던 회화는 바로 수 세기에 걸쳐 흥성했던 필사본 서적의 장식 그림과 삽화였다. 비록 1470년 파리에서 첫 번째 인쇄소가 문을 열었고, 짧디짧은 몇십 년 만에 유럽에서 최고로 명성을 떨친 인쇄출판 중심이 됐지만, 인쇄술이 없거나 보급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필사에 의존했다. 수공이 복잡하고 비싼 금가루 장식의 수많은 필사본은 흔히 제단에 놓이는 ‘성경’이나, 기도문의 사명을 짊어졌다. 책 속에서 묘사된 종교 이야기와 성인 전기의 채색 삽화들도 늘 실력이 뛰어난 화공에 의해 꼼꼼하게 완성됐는데, 이는 적지 않은 화가들이 소형의 세밀화에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책의 크기가 아주 한정적이었으므로 화가에게는 사물의 형상 묘사에 대해 극도의 정밀함이 반드시 요구됐고, 그래야만 정확한 형태와 상응하는 화면의 효과를 표현할 수 있었다.
기도, 또는 경서 읽기 등 종교 수행 방식이 중세시대에는 사람의 도덕 수준 유지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를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에 “대중을 사랑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타인에게 관용을 베푼다.” 등 높은 도덕 표준을 갖춘 시구를 반복해 낭송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런 내용은 사람의 관념에 녹아 들어가 사람의 행동 준칙이 됐다. 문예, 영화, 텔레비전, 전자게임 제품을 통해 태우고 죽이고 음란하고 약탈하며, 폭력적이고 색정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환경에 잠겨 있지 않을 때가 없는 오늘날 사람들과 이전의 도덕의식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사람의 사상에 대한 커다란 긍정적 작용이 명백하다. 비록 고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신도 각자의 수행에 달렸고, 상대적으로 순정한 그런 상태가 중세 후기에 이미 사라져 되돌릴 수 없게 됐지만, 당시의 정교 신앙은 그래도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려 하는 사회 전체의 상태를 보호할 힘이 있었고 한 권, 한 권 필사된 책의 효용도 사라질 수 없었다.
찬조자의 개입
당시의 대형 작품은 대부분 제단 그림이었다. 제단화는 보통 나무판에 그려져 교회의 제단 위에 안치된 종교화를 가리킨다. 제단은 많은 사람이 기도와 참배를 하는 곳으로, 종교 장소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므로 제단화의 중요성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신도들이 종교 서적의 그림에 절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에 전해 내려온 적지 않은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고, 당시에는 여전히 수많은 신도가 성물(聖物)과 성상(聖像) 등 일부 관련 미술품의 힘을 맹신한다는 질책을 교회로부터 받고 있었다. 책 속의 신이나 성인의 형상이 신도의 머릿속에 경건하게 새겨졌으므로 사람들은 잠재의식 속에서 제단화를 신성한 것으로 대했다. 이런 작품의 의미도 일반 예술품의 개념을 멀리 넘어선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작품에 요구되는 품질 수준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림 속 인물의 특징은 반드시 성경의 묘사와 일치해야 했고, 신과 성인의 형상도 반드시 찬란하고 완벽하며 아름다워야 했다.
초기의 제단 장식은 모두 교회의 규정에 따랐지만, 기독교 신앙이 국민화됨에 따라 수많은 비 종교 인사와 일부 민간단체까지도 일부 교회, 왕궁, 그리고 개인 주택 내부에 황실의 것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가정식 예배당처럼 작은 것도 있었는데, 제단화 창작을 제어할 수 있는 권한도 더는 전적으로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 수많은 출자자는 자신도 만인이 우러러보는 화면에 얼굴을 내밀고 싶어 했고, 독실한 신도로서 그림 속 성인 곁에 동석하려 했으며, 또한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 했으니, 그것은 또한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 돈의 힘은 작지만 비범한 희망이 실현되게 했고, 그런 방식은 점점 불문율이 됐다. 그래서 그림 속에 찬조자가 출현하는 것도 중세시대 후기 이후로는 모종의 ‘전통’이 됐다. 제단화에 국한하지 않고 종교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 그림에 들어가는 상황도 흔했다.
‘아비뇽의 피에타’, 목판에 템페라, 163x218cm, 작가는 학계 감정에 따라 프랑스의 앙게랑 콰르통으로 밝혀짐. 1455~1460년 사이에 창작, 그림 속 가장 왼쪽 인물은 이 그림의 출자자.
그림 속 신과 성인의 형상이 모두 완벽하게 그려졌지만, 이런 완벽하게 처리하는 예술 수법을 그림 속의 찬조자에게 적용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일단 형상을 너무 미화하면 특징을 잃어 그 사람 같지 않게 그려지기 때문에 그림 속의 찬조자는 여전히 현실 속의 모습을 모두 갖추도록 그림으로써 사람들이 알아보기 편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형상은 제단에서 기도하고 영혼을 닦는 사람에게 비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림 속 신성한 요소가 약화되고, 세속의 요소가 수행자의 사상 속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밀종 수련자를 생각해 보면, 매일 마주하고 가부좌하는 탱화 속에 돈이 많은 사람의 형상이 있다면 잘 수련할 수 있겠는가? 동시에 단지 돈과 세력이 있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두상을 날마다 사람들이 경건하게 우러러보는 신성한 그림에 넣은 것을 일반 신도들에게 보인다면 사람들 마음속에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런 각종 요소는 모두 뒷날 종교 신앙 유지에 대해 숨은 폐해를 심었다.
(계속)
원문발표: 2019년 11월 16일
문장분류: 천인지간>우주시공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16/3957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