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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성 탕산시 시장 천쉐쥔, 파룬궁 박해로 보응 당해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이성 보도) 2015년 6월 5일, 전 탕산(唐山)시 시장 천쉐쥔(陳學軍)이 보응을 받아 ‘쌍규(雙規: 당원을 구금 상태에서 조사하는 것)’를 받았다. 아직도 파룬궁을 박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중히 알리는데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돌아서지 말고 재빨리 돌아서서 보응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

1998년 2월부터 2001년 6월까지 천쉐쥔은 탕산시 카이핑(開平)구 부서기, 구청장을 맡았고 2001년 6월부터 2003년 4월까지는 카이핑구 당서기에 임직했다.

천쉐쥔은 카이핑구에서 임직하는 동안 현지 파룬궁수련생들을 박해했고 2001년 5월 24일 카이핑 마쾅바이(馬礦柏) 수림 단체 연공 체포 사건에서 파룬궁수련생들 20여 명을 납치했다. 어떤 이는 당시 단체연공에 참가했다고 의심을 받아 카이핑 세뇌반으로 납치됐다. 천쉐쥔은 파룬궁수련생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해 아주 빨리 탕산시 부시장으로 진급했다.

2004년 9월, 파룬궁을 박해한 원흉 중 하나인 저우융캉(周永康)이 탕산에 왔다 간 후 진선인을 수련하는 대법제자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고 10월 19일에 카이핑구는 한차례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대법제자들을 체포했다. 그중 대법제자 쑨젠민(孫建民), 장쥔링(張俊玲), 정춘란(鄭春蘭), 장원량(張文亮), 즈원쉐(智文學), 딩훙언(丁洪恩), 왕추이펀(王翠芬), 장리(張利) 부부, 선샤우징(沈小靜), 리전(李眞), 장리민(張利民), 췌인후이(闋銀會) 등이 박해를 당했다.

카이핑구 ‘610’ 주임 우리더(武利德)는 직접 현장에 가서 지휘했고 카이핑구 분국 부국장 리궈쥔(李國軍)은 직접 대법제자들을 고문했다. 각 파출소는 여러 길로 나누어 관할구역 대법제자들을 야간에 납치하고 집을 수색했으며 전화를 이용해 감시하고 잠복하며 블랙리스트에 따라 사람을 체포했다. 한 명이 암이 있어 석방된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1년에서 3년의 노동개조 판결을 받았고 또한 탕산시 카이핑 TV에서도 이를 보도했다.

파룬궁수련생 류진위, 천쉐쥔의 ‘특별 비준’으로 구치소에 수감

카이핑구 마쾅신구의 류진위(劉金玉)는 대법을 얻기 전에는 심장병, 폐 질환, 경추질환, 위염, 관절염, 저혈압 등 질병을 앓고 있어 종일 머리가 아파 침대에 누워있었으며 손발이 차서 여름에도 전기장판을 사용했으며 온몸이 아프고 무기력했다. 크게 웃어도 안 되고 웃다가 쓰러지면 심장이 견디지 못해 이후 직장 출근을 포기했다. 1997년 3월 7일에 파룬궁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사람을 더 좋게 만든다는 말을 듣고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체질이 허약하던 그녀는 며칠 수련하고 정신이 나기 시작했다. 6층 집을 사서 꾸밀 때 모래 한 차, 벽돌 한 차, 바닥 블록, 시멘트 33포대를 모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메고 올라갔다. 그 당시 52세였던 그녀는 35~40kg 되는 벽돌을 메고 하루에 20번씩 가볍게 6층까지 올랐다. 한 아저씨는 젊은이도 6층까지 20번 오르내리기 힘든데 그녀는 초등학생이 책가방을 메고 오르내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9년 11월 19일 그녀는 마루(馬路) 파출소에 납치되고 가택 수색을 당했으며 카이핑 분국에 갇히게 됐다. 당시 카이핑구 구청장 천쉐쥔은 그녀가 사회치안을 방해했다고 말했다. 파출소는 그녀를 구치소에 보내려다 단지 연마만 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후 천쉐쥔이 서명해주자 구치소 측은 파격적으로 그녀를 수감하기로 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박해당한 전형적인 사례

멍칭푸(孟慶福, 남, 1956년생)는 1996년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카이핑진 판사처 서기를 맡은 적이 있다. 2001년 5월 24일, 파룬궁수련생을 조직해 카이핑 마쾅바이 수림에서 단체 연공을 하다 붙잡혔다. 구청장 천쉐쥔은 그를 죽도록 때리라고 지시했고 카이핑 분국 부국장 리궈쥔은 앞장서 대법제자를 손수 때리는 악행을 자행했다. 카이핑 분국 지하실에서 대법제자의 입을 때리고 발로 차며 나무 몽둥이로 때리고 옷을 벗기며 넓은 가죽 띠로 때렸다. 또 ‘살승(殺繩: 살해하는 끈)’ 고문에 시달리게 했는데 멍칭푸를 거꾸로 매달고 때려 여러 차례 기절하게 했다. ‘살승’의 줄이 몇 번이나 끊어졌다. 멍칭푸는 카이핑 법원으로부터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먼저 지둥(冀東) 감옥에 감금됐고 이후에 바오딩(保定) 감옥으로 이송됐다. 동시에 공직에서 제명됐고 강제로 아내와 이혼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매달 2백 위안(약 3만 7천 원)의 최저수입밖에 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2013년 3월 22일에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세였다.

酷刑演示:杀绳

고문 재연: ‘살승’

선샤우징(沈小靜, 여, 43)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원래 있던 심장병, 고혈압이 치유됐다. 2000년 3월, 진 정부를 방문했기에 카이핑진에 불법으로 5일 감금 후 또 탕산 구치소에 15일 감금됐다. 2001년 5월 24일에 마쾅 공원에서 단체연공을 하다가 카이핑 ‘610’의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돼 불법으로 3년 반 형을 받았고 (집행유예) 심신이 심하게 손상됐다. 감옥에서 나온 후 또 몇 차례 교란을 받았다. 2004년 10월 19일, 카이핑구 공안 분국에서 대법제자를 15명 정도 붙잡았는데 그중에 선샤우징이 포함됐다. 그녀는 악독한 공산당의 박해로 이전의 병이 재발해 2005년 10월 17일에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쑨젠민(孫建民)은 2001년 5월 24일에 10여 명 파룬궁수련생들과 마쾅 공원 바이 수림에서 단체 연공을 했다. 당시 악인의 제보를 받은 카이핑 ‘610’과 카이핑 분국 악독한 경찰들이 연공장을 포위하고 카이핑 분국 리궈쥔이 지시해 파룬궁수련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카이핑 분국 유치장(지하에 위치)에 갇혀있는 동안 파룬궁수련생들은 끊임없이 고문에 시달렸고 쑨젠민은 악독한 경찰에게 신발 바닥으로 얼굴을 맞고 눈이 퉁퉁 부어 앞을 볼 수 없었으며 유치장에 20여 일 갇힌 후 강제로 탕산 제1구치소로 납치돼 불법으로 10여 개월 수감됐으며 이후에 또 카이핑 세뇌반에 10여 개월 감금됐다가 3천 위안(약 55만 원)을 갈취당하고 풀려났다.

2004년 10월 19일, 쑨젠민은 카이핑 분국의 악독한 경찰 다이잰쥔(戴建軍), 왕바오허(王寶和)에게 납치당하고 가택 수색을 당했으며 악독한 경찰 장판(張凡)은 쑨젠민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또 고문 했으며 고압 전기봉으로 머리와 전신에 충격을 가했다. 카이핑 분국 부국장 리궈쥔은 직접 사람을 때리는 것을 지휘했고 “내가 때리는 것을 누가 봤지? 너를 때렸다고 누가 증명하지?”라고 기고만장하여 떠들어댔다. 리궈쥔은 또 강제로 파룬궁수련생들을 무릎 꿇게 했고 꿇지 않으면 뒤에서 오금 부위를 가격해 꿇게 했다. 그는 파룬궁수련생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을 알고 담배에 불을 붙여 파룬궁수련생의 콧구멍에 꽂아 강제로 담배를 피우게 했다. (리궈쥔은 갖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2005년 12월에 발생한 카이핑 류관툰 탄광 가스폭파사고 혐의자를 석방해 현재 공직에서 해고됐다.) 쑨젠민은 이틀 후 탕산시 제1구치소로 연행됐다. 28일 감금 후 2004년 11월 18일 불법으로 노동개조 3년형을 받았고 탕산시 허화컹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를 받다가 뇌출혈이 와서 2005년 10월 19일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가족들이 데려갔다. 그 후 현지 경찰서는 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워 온 가족이 공포 속에서 생활했다. 쑨젠민은 여러 차례 뇌출혈이 재발해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고 2009년 4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였다.

푸웨이쥔(付衛軍), 왕구이즈(王桂芝) 부부는 2001년 5월 24일에 10여 명 파룬궁수련생들과 함께 카이핑 마쾅바이 수림에서 단체 연공을 했다. 당시 악인의 고발로 카이핑 ‘610’과 카이핑 분국 악독한 경찰들이 연공장을 포위했고 카이핑 분국 부국장 리궈쥔(이미 업보를 받아 공직에서 해고됨)의 지시로 파룬궁수련생들을 때려 상처투성이가 됐다. 푸웨이쥔은 불법으로 탕산 제1구치소에 8개월 감금됐고 이후에 카이핑 세뇌반으로 옮겨져 계속 박해를 받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세뇌반에게 2천 위안(약 37만 원)을 강탈당했다. 구치소에 있는 동안 직장에서 압류 당한 3천 위안(약 56만 원)을 포함해 총 5천 위안(약 92만 원)을 강탈당했다. 푸웨이쥔은 2013년 2월에 박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 왕구이즈는 탕산 제1구치소로 납치됐고 이후에 탕산 제2구치소로 옮겨져 박해를 받아 병이 재발했고 불법으로 5개월 감금 후 집으로 보내졌다. 2006년 6월에 병이 엄중해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후 마루 파출소 훠퉁시국의 7, 8명 경찰이 갑자기 쳐들어와 불법 가택 수색을 했고 일주일 후 왕구이즈는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원래 랴오닝 부대 미사일 발사기지 책임자였던 장원량(張文亮)은 전역 후 탕산 식품공장에서 근무했다. 2000년에 베이징을 방문했기에 탕산 제1구치소에 감금되어 불법으로 1년 여 동안 감금당한 후 석방됐다. 며칠 안 되어 쭌화(遵化)시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돼 불법으로 3년 형을 선고받아 탕산시 허화컹 노동교양소에 감금됐고 직장에서 해고당해 아무런 생활 자금이 없게 됐다. 심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장원량은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믿었고 이후 스자좡 노동교양소로 옮겨졌다. 거기에 있는 동안 각종 고문 혹형을 받아 두 다리로 걷기 힘들었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됐다. 악독한 경찰은 책임을 질까 두려워 2003년 말에 석방했다.

2004년 10월 19일에 장원량은 재차 카이핑 분국에 납치되고 가택 수색을 당했으며 불법으로 3년 형을 선고받아 허화컹 노동교양소에 갇혔다. 2005년 10월에 또 한단 노동교양소로 납치돼 박해가 가중됐고 2006년 11월 8일에 악독한 경찰 가오진리, 청이웨이, 장원산, 린타오 등 4명은 끈으로 묶어 십자형을 하고 전기 막대 2개로 목에서부터 앞가슴, 앞몸에 충격을 가하고 허벅지 안쪽, 생식기를 2시간 동안 충격을 가하는 등 전신을 지져 성한 곳이 없었다.

문장발표: 2015년 9월 15일

문장분류: 천인지간>인과>악보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15/31569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