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송용
[밍후이왕] ‘송사’ 기재에 북송의 양연소는 어릴 때 과묵하고 행군열진 놀이를 좋아했다. 그의 부친 명장 양업(楊業)은 “아들은 나를 닮았다.”고 말했다. 매번 출정할 때 반드시 아들을 데리고 갔다. 양업이 응주(應州), 삭주(朔州)를 공격할 때 양연소는 양업군대 선두를 담당했고, 삭주성 아래에서 교전할 때 날아온 화살에 어깨 상처를 입었지만용감하게 싸웠다. 삭주 전쟁 후 얼마 안 돼 양업은 나라에 몸을 바쳤고 양연소는 계속 종군하는 데 힘을 다했다.
함평(鹹平) 2년 겨울, 거란(契丹)이 변경에서 소란을 피울 때 양연소는 당시 수성(遂城)에 있었다. 성이 작고 준비가 되지 않아 거란군은 빠르게 성을 공격하고 며칠간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성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 마침 날씨가 추워 양연소는 사람들에게 물을 성벽에 바르라고 했다. 아침이 되자 성벽은 얼음으로 변했으며 미끄럽고 딱딱해 성벽을 탈 수 없어 거란인은 철수했다.
당시 송진종(宋真宗)은 대명(大名)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양연소를 행궁으로 소환하여. 국경 수비에 관해 물었다. 양연소는 거란의 급소를 찔렀다고 답했다. 진종황제는 기뻐하며 양연소를 가리키며 다른 왕들에게 “양연소의 부친 양업은 전조 명장이다. 양연소는 군대를 다스리고 국경을 보호하는데 부친의 풍채가 있으며 상금을 줘야 한다.”고 말하며 양연소에게 후하게 상금을 줬다. 이것은 황제가 처음으로 양연소를 만난 것이며 인재를 발견한 셈이다.
그해 겨울, 거란이 남쪽을 침입했다. 양연소는 양산(羊山) 서면에서 정예 병사를 매복시켜 뒀다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은밀하게 공격을 했고 공격하면서 후퇴했다. 적을 양산의 서면으로 유혹한 뒤에 매복하고 있던 병사가 갑자기 공격해 거란군을 대파했다.
양연소는 본주(本州) 단련사로 임명받고 양사(楊嗣)와 함께 힘을 다했다. 진종황제는 재상에게 “양사와 양연소는 함께 국경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데 궁중에서는 그들을 질투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그들을 보호했기에 비로소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질투는 좋은 사람을 해칠 수 있지만 어진 성품이 있는 군주는 질투로 좋은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함평 5년, 거란인이 보주(保州)를 침략할 때 양연소와 양사는 군대를 거느리고 지원하러 갔지만, 병사가 진을 갖추기도 전에거란군이 기습해 병사는 큰 손실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그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진종황제는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처벌하지 않고 힘을 다해 보호해줬다. “양사 등은 용감하다고 이름이 있으니 그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앞으로 개진의 태도가 있는지를 봐야 한다.”고 했다. 어진 군주가 용서하고 좋은 사람을 보호해야 더욱 많은 인재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다.
북송과 요나라가 합의한 후 더는 전쟁이 없었으며, 양연소는 국경 수비를 하는 장군을 담당했고 57세에 사망했다.
양연소는 지혜롭고 용감하며 잘 싸웠다. 받은 국록은 모두 병사에게 나누어주고 집에 보태주지 않았다. 양연소가 탄 말은 예를 들면, 소교(즉, 소대장)와 규격이 같다. 그는 엄격하게 명령하고 병사와 함께 고생하며 적을 만나면 병사보다 앞서 나갔다. 승리를 거두면 그는 공을 하사에게 돌렸으므로 사람마다 그의 명령을 들었다. 양연소는 20여 년 국경을 지켰다. 거란은 양연소를 두려워했으며 그를 ‘양육랑(楊六郎)’이라 불렀다. 양연소가 사망할 때 황제는 탄식하고 애도했다. 궁의 사자를 보내 관을 고향에 돌려보낼 때 하삭(河朔)의 많은 사람은 양연소의 관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참고 ‘송사’)
문장발표: 2015년 6월 20일
문장분류: 천인사이>문사만담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6/20/3111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