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송 태종 조광의(趙光義)는, 형인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후 나쁜 일을 많이 해 후손을 해쳤는데, 자손이 두 번이나 후사가 없었으며, 전체 황족이 금나라 노예가 되는 크나큰 치욕을 당했다. 그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물이, 북송의 이름 있는 신하 범중엄(範仲淹)이다. 그는 일생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행복하게 하였으나, 네 번이나 강직을 당하기도 했다. 범중엄은 일생을 청빈하게 살았지만, 후예는 흥성하여 부귀를 8대나 누렸다. 그 중의 오묘함은 어디에 있는가?
나라를 빼앗고 역사서를 왜곡한 송 태종의 6대 업보
송 태종 조광의는 여러 번 역사서를 왜곡했지만 많은 역사의 진상은 여전히 숨길 수가 없다. 그가 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으며, 형의 아들을 압박하여 죽게 하고, 황태자 남동생 조정미(趙廷美)를 압박하여 죽게 하여, 황위를 자기 아들에게 계승(子嗣) 하도록 독차지했다. 그는 또 화예(花蕊)부인을 쏘아 죽였고, 남당(南唐) 마지막 군주 이욱(李煜)을 독살하기 전에 그의 아내 소주(小周)를 폭행하고, 또 본 오월(吳越) 왕(國主) 전숙(錢俶)을 독해했다 …….
그는 이렇게 해놓으면 자신의 강산(江山)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면, 보응은 한 장의 하늘의 그물처럼 펼쳐지는바, 이 그물이 그의 가족에게 펼쳐졌다.
태종의 장자는 미치게 됐고, 둘째 아들은 황태자로 책봉됐지만, 결과는 병이 들어 죽었고, 셋째 아들은 천자의 자리(眞宗)에 올랐으나 그의 아들딸들이 잇따라 요절하고, 유일한 아들인 인종(仁宗)만 남았다. 그러나 인종은 후대의 자식이 없었다. 당숙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고 나서 아래로 2세, 3세를 전했는데, 정강지치(靖康之恥 – 송나라의 황제인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잡혀가 신하의 예를 갖춘 역사적인 사건)의 치욕적인 난을 당했다. 태종의 황실 후예들이 금나라에 잡혀가 노예로 되었는데, 가족 중의 부녀자는 관기(官妓 -그중 조구(趙構)의 생모와 본처도 있다.)로 되었으며, 유일하게 조구가 도망가 남송을 건립했으나, 아들과 딸은 요절했다. 그 후 조구는 금나라 병사에게 놀라 한 번 실패한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으며, 또한 후사가 없다. 역사서에 기재된 바로는, 그의 큰어머니 원우(元祐) 태후는 ‘이몽(異夢)’에서 깨닫고, 남아 있는 태종의 후예 자식들 대신 황위를 다시 태조의 후손에게 돌려주었다.
당시 태종은 왕법을 어기고 악을 저지르고도 징벌을 받지 않았지만, 도덕의 힘은 일체를 제약한다. 하늘의 이치는 분명하고, 선악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게 마련이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해 행복을 가져다 준 범중엄 가족은 번성
범중엄(範仲淹)은 북송의 이름 있는 신하로, 유명한 문학가이며 군사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의 ‘악양루기(嶽陽樓記)는 천고의 절창(絶唱)이었다. 그는, “고생스러운 일에는 자기가 앞장서고, 즐거운 일에는 남보다 뒤에 선다.”의 경지는 중화명사의 이상적인 풍모와 도량이 됐다.
범중엄(초상화)
범중엄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청빈한 생활에서 열심히 공부해 진사에 합격했다. 늘 백성을 위해 걱정하고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흥화(興化) 현령(지금 장쑤성 씽화시)직에 있을 때 방파제를 구축하여 전국적인 방파제를 다스리게 되었다. 한 번은 심한 해조로 1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는 해조를 대비하여 직접 현장에서 인부들을 진두지휘하며 방파제를 서둘러 건설했다. 얼마 후 방파제 몇백 리가 황해 모래사장에 걸쳐졌다. 그러므로 염전과 농지는 보전되고, 흩어졌던 수해 난민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이 방파제를 ‘범공제(範公堤’)라고 불렀으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범중엄은, 조정의 잘못된 지시는 집행하지 않고 가차 없이 거절했다. 이 때문에 네 번이나 수도에서 파면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성품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병사를 거느리고 서하(西夏)를 막아 내고 성을 굳게 지켰다. 조정은 무모하게 돌진하다 대참패를 당한 후 범중엄의 전략으로 성과를 이루었다. 적의 왕은 범중엄의 군사 지휘를 경외하여, 후에 마침내 협상으로 전쟁을 풀었다. 범중엄은 폐정(弊政)에 대해 주도적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사회의 면모가 달라졌다. 역사에서는 이를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고 칭한다. 거짓 참소(讒言)로 파면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백성의 복지를 도모했다.
범중엄은 임지에서 병으로 임종할 때 조정과 재야의 상하가 온통 슬픔에 빠졌다. 전국 백성들은 연이어 제사지내며 울었고, 서하국의 소수민족도 연일 몸과 마음을 깨끗이(齋戒) 하고 모여서 추모했다. 조정은 그를 문인 중에서 가장 높은 ‘문정(文正)’ 시호를 내렸다.
범중엄은 일생 선행을 좋아하여 죽을 때 가족은 빈곤했다. 하지만 그는 복덕을 후세의 자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그의 아들 범순인(範純仁)은 후에 재상직에 올랐다. 부귀는 3대를 지내기가 어렵다고 전해지는 사례들이 있지만, 범 씨 가족은 자손이 번성하여 그 음복은 800년간이나 이어졌으며, 민국시대에도 범 가의 명성은 아직도 혁혁하게 아주 높다. 이것이 바로 덕을 쌓고 선을 행해 후대에 복을 주는 진실한 모습이다.
오늘 파룬궁(法輪功)에 대한 박해를, 중공의 관원과 군경은 당의 지시라는 구실을 대며 법률을 능가하면서도, 징벌을 받지 않고 보응이 없다고 생각한다. 송 태종이 왕법을 능가하며 악을 저지른 예를 일일이 대조해 보면, 자손에게 6대에 걸쳐 악보를 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역사가 두드려 울린 경종이다.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성쇠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조대의 성쇠가 있고, 개인은 가족의 흥망이 있다.
문장발표: 2013년 12월 10일
문장분류: 천인사이>문사만담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2/10/2838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