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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自繩自縛)──중공 고위직의 종말

글/차이이(蔡義)

[밍후이왕] 옛날부터 ‘머리 석자 위에 신령이 있어 누가 나쁜 일, 악한 일을 하면 보응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중공고위직 중에 그런 악독한 일을 한 사람들의 결말을 본다면, 당신은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천리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 1956년 친청(秦城)감옥을 건설하자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은 베이징 시장 펑전(彭真), 공안부장 뤄루이칭(羅瑞卿), 베이징 공안국장 펑지핑(馮基平)이다. 그런데 1966년 가장 먼저 마오쩌뚱에 의해 친청 감옥에 감금된 사람이 바로 이들 세 사람이다.

2, 1957년 “반 우파”에서 제일 처음 뛰쳐나와 지식인을 비판하라고 한 장버쥔(章伯鈞)이 바로 우한(吳晗)이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당시 가장 먼저 타도당한 문인시장이 우한이고, 그 뒤 1967년, 가장 먼저 자살한 사람 역시 우한이다.

3, 1958년 군역의 “반 교조주의”운동에서 류버청(劉伯承)、쑤이(粟裕), 쇼요커(蕭克)등을 나쁜 선례로 처음 몰아간 사람이 펑더화이(彭德懷)이다. 하지만 1959년 노산회의에서 가장 먼저 숙청된 사람 역시 펑더화이이다. 펑은 나중에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뚱에게 무참히 압살됐다.

4, “후펑(胡風)사건”에서 앞장서서 전력을 다해 후를 비판한 문인 무뢰한은 저우양(周揚)이다. 하지만 나중에 “문화대혁명” 당시 선봉에서 숙청당한 문인 무뢰한 역시 저우양이다.

5, “앤안(延安)정풍”에서 모를 대신해 권력을 남용하고 남을 괴롭히는데 정력을 다할 뿐만 아니라 수익이 가장 컸던 사람은 류소기이다. 류소기는 1966년 비판받고 홍위병에게 마구 폭행당해 여러 사람 앞에서 치욕을 당했다. 1969년 카이펑(開封)의 한 칸의 지하실에서 고통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6,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을 가장 치켜세우고 신격화하면서 마오를 위해 군주 주변의 간신들을 제거한 사람이 림표다. 하지만 그는 1971년 마오와의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후 일가족 3명이 미스테리하게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7, 1955년 마오는 7기 5중 전체 회의에서 갑자기 판한녠(潘漢年)을 들어 먼저 손을 대어 한 차례 숙반 운동을 일으켜 “적의 스파이”를 숙청했다. 게다가 판한녠은 항일전쟁시기 마오와 일제를 위해 “상호 침범하지 않는 묵계” 얻어 잠시 왕위정부와 연계한 “홍색”스파이였다.

8, “문화대혁명”시기 “마오주석 어록”과 “림표 어록”에 곡을 붙여 유명해진 리제푸는, 바로 이런 “큰공”이 있어서 마오에게 감금되어 죽었다.

9, 왕리쥔이 랴오닝성 테링과 충칭에서 파룬궁수련생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을 가해 대대적으로 박해했고, 파룬궁수련생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여 폭리를 도모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즉, 중공을 위해 목숨을 팔다가 중공에 15년 판결을 당했다.

10, 보시라이는 랴오닝과 충칭에 있는 동안 “창홍타흑(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예찬하고 범죄와 부패를 척결)”이라는 깃발을 들고, 문화대혁명을 복원한 듯이 대대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생체장기적출의 죄악에 발을 들어놓아 이미 중공의 감옥에 들어갔다.

위의 사례를 다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있을까? 이는 중공이라는 반자연적이고 반인류적인 사악한 부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고 선악에는 보응이 있고 그 보응은 분명하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중공 악당과 악경은 요행수를 바라선 안 된다. 누가 나쁜 짓을 했으면 누가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문제에서 공산당을 믿었다면, 그 문제로 인해 목숨을 내주어야 한다. 다그쳐 악을 향하는 것을 정지하고 과감히 잘못을 고치며 중공의 당, 단, 대에서 탈퇴하는 것만이 목숨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문장발표: 2013년 9월 20일
문장분류: 천인지간>인과>악한보답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9/20/2798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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