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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들의 결말로부터 본 인과응보

글/ 지진(智眞)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자고로 계략이 깊으면 화(禍)도 깊거늘(自古機深禍亦深), 부귀를 탐해 양심이 어두워지지 말라(休貪富貴昧良心), 처마 밑 낙수도 조금도 착오가 없거늘(簷前滴水毫無錯), 보응은 예로부터 여전하구나(報應昭昭自古今)”라고 했다.

역사상 일부 간신들은 조정의 기강을 손상시키고 충신을 모함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잇따랐는데 결국 모두 화를 입었다. 예를 들면 채경(蔡京), 엄숭(嚴嵩) 등은 한때 권세가 대단하고 사치가 극에 달했지만 모두 굶어 죽었다. 이 같은 고사는 사람들에게 인과응보의 천리를 생각하게 한다. 간신 채경이 조정을 틀어쥔 23년은 북송(北宋)이 가장 혼란했던 시기다. 그는 악행이란 악행은 다했는데 황궁에 화려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대규모 공사를 벌여 거금을 탕진했다. 군비를 마련한다는 핑계로 ‘서성괄전소(西城括田所)’를 세워 백성들의 논밭을 마구 수탈했다. 또 재정 적자를 채우기 위해 소금법과 차(茶)법을 고쳤으며 10대 화폐를 주조해 화폐제도의 극심한 혼란을 초래했다. 또 조정에서 관직을 사고팔았으며 공공연하게 뇌물을 주고받아 벼슬을 저울에 달았는데, 사람들은 “쌀 삼천석에 직비각(直秘閣), 오백관에는 통판으로 발탁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풍속이 퇴폐되고 탐관오리들로 득실거렸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수호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양지(楊志)가 금은을 호송하고 오용(吳用)이 지혜로 생진강(生辰綱-뇌물꾸러미)을 빼앗다‘를 기억할 것이다. 양지가 호송하다가 이후에 오용 등에게 빼앗긴 것은 채경의 뇌물이었다.

채경은 무리를 이뤄 사리사욕을 꾀했고 충신을 모함했으며, 그의 문하에 들어간 자는 벼슬이 높아지고 부자가 됐다. 일부 투기자들과 후안무치한 자들은 권세에 아부하며 앞 다투어 그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과 한패가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관직을 박탈했으며 살해하기도 했다.

1125년, 금나라 군사가 대거 남침해 개봉성 밑에 이르자 송나라 휘종은 흠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전국에서 채경을 탄핵하자는 상소가 눈꽃처럼 날아들었다. 태학생 진동향(陳東向)은 흠종에게 여러 사람이 서명한 상소를 올렸다. “현재 금나라 군대가 파죽지세로 개봉에 접근한 것은 전부 채경 무리들이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온 것입니다. 즉시 간신 채경 및 그 무리들을 엄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흠종은 채경을 파면시키고 그 무리들을 유배시켰다.

채경은 유배길에서도 여전히 아주 기세등등했는데 그는 평소에 끌어 모은 돈과 재물을 큰 배에 가득 실었고 오직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경은 개봉에서 장사까지 3천리되는 유배길에서 큰 고난을 당했다. 송나라 사람 왕명청(王明淸)이 쓴 ‘휘진후록(揮塵後錄)’의 기재에 의하면 백성들은 채경에게 ‘먹고 마실 것’을 팔지 않았고 욕하는 소리가 끝이 없었다. 장사(長沙)에 이르러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한 채경은 한 무너져 가는 절간에 묵을 수밖에 없었는데 질병과 빈곤이 한꺼번에 겹치고 굶주림과 추위까지 닥쳐 끝내 굶어 죽고 말았다!

엄숭(嚴嵩)은 명나라 시기 간신이다. 아첨하는 능력이 좋기에 이부상서와 재상이 됐다. 그는 권력과 이득을 위해 강력하게 반대파를 제거했으며 또 군량을 횡령했고 국경수비를 문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70세 후, 조정을 아들 엄세번(嚴世蕃)에게 넘겨 처리하게 했다. 그들 부자는 똑같이 사악했는데 관직을 사고팔았고 조정 관리의 임명과 승진을 독점했으며, 벼슬이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가격을 매겼다. 관리의 자질과 능력을 보지 않고 전부 뇌물을 기준으로 했다. 관아에 모두 그 심복과 앞잡이들이 있었으므로 세력을 믿고 잔악무도한 짓을 했으며 진귀한 보물을 수탈했고 백성들을 파산시키고 죽여 분노를 일으켰다.

‘명사·간신전(明史·奸臣傳)’에 엄숭이 박해한 신하들을 기록한 긴 명단이 있다. 이런 신하들 중 어떤 이는 관직을 박탈당했고 어떤 이는 살해됐다. 모두 엄씨 부자를 탄핵하다가 초래된 것이다. 예를 들면 명나라 시기 제일가는 ‘직간(直諫-곧은 간언)’으로 불리는 사람은 병부원외랑 양계성(楊繼盛)이다. 그는 ‘청주적신소(請誅賊臣疏)’를 갖고 엄숭을 탄핵했는데 엄숭의 ‘5간 10대죄’를 열거했다. 즉 ‘조상이 만든 법을 어지럽히다’, ‘황제의 대권을 빼앗다’, ‘군사와 국가에 해를 끼치다’, ‘충신을 배제하고,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는 사람을 임용하다’, ‘뇌물을 받고 탐오하다’, ‘자신보다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시기한다’ 등이다. 양계성 역시 결국 엄숭에게 모함당해 살해됐다. 재상 하언(夏言)은 사람됨이 바르고 흉금이 넓으며 일을 처리함이 진지해 조정에서 위신이 높았다. 엄숭은 하언을 미워하면서도 또 두려워했다. 하언은 엄숭이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온 진실한 면모를 여러 차례 폭로했다. 엄숭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실패하자 역시 그를 모함해 죽였다.

엄숭의 집이 가산을 몰수당할 때 재산이 얼마였는가? ‘세종실록(世宗實錄)’ 기재에 의하면 “금은 3만2960냥 남짓하고, 은은 202만7090냥 남짓했으며, 옥그릇 등은 857건이 있었고, 옥대는 2백여 개가 있었다…” 단지 앞 두 가지 항목에서만도 당시 전국 1년 재정 총수입과 맞먹었다.

1562년, 명나라 세종은 어사 추응룡(鄒應龍)과 대학사 서계(徐階) 등 여러 사람의 엄숭 부자에 대한 탄핵 요구에 따라 엄숭을 파면시키고 엄세번을 참수했으며 가산을 전부 몰수했다. 엄숭은 몸둘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묘지에서 걸식했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가 2년 후 질병으로 죽었다.

수천수만의 재물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단지 천고에 악명만 남겼을 뿐이다. 채경, 엄숭의 운명은 세인의 거울이 됐다. 악행은 악보(惡報)가 따르며 인과응보는 벗어나기 어렵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세간의 형벌과 후환이며, 볼 수 없는 것은 천지신명의 책벌이다. 처세하고 관료 노릇을 하자면 수양하고 스스로 단속해야 하며 백성을 위해 복리를 도모해야 한다. 천리양심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중공의 일부 관리들은 탐오부패를 일삼고 뇌물을 받아먹으며 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장쩌민과 뤄간 등 한 무리 원흉을 따라 선량한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말로는 채경, 엄숭보다 더욱 비참할 것이다. 왕리쥔과 보시라이 등 인물들의 악보(惡報)도 이미 시작됐고 더욱 큰 악보는 아직 뒤에 있다.

문장발표: 2012년 3월 20일
문장분류: 천인사이->신전문화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3/20/2544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