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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정직하고 너그러우며 덕행을 근본으로 삼다

글/ 소옥(蕭玉)

[밍후이왕] 중국 전통문화는 덕을 중히 여기고 선을 행할 것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이 덕행을 처세의 근본으로 삼았다. 역사상 일부 유명 인물뿐만 아니라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들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들의 처세관을 엿볼 수 있다. 당나라의 당림(唐臨)이 바로 됨됨이가 정직하고 너그러운 사례로 꼽힌다.

당림은 경조(京兆) 장안(오늘날 섬서성 서안) 사람이며 북주내사 당근(唐瑾)의 손자다. 당나라 초에 당림은 만천현승(縣丞, 정8품), 어사(禦史), 대리경(大理卿, 현대의 최고법원에 해당), 이부상서(吏部尚書, 오늘날 인사부장에 해당됨) 등 관직에 있었다.

당림이 만천현 현승에 임직했을 때 만천 현에 죄수 몇 십 명이 있었다. 이들의 죄가 비교적 가볍고 때는 봄철 농번기여서 당림은 만천현 현령에게 죄수들을 집에 돌려보내 그들 가족의 농사를 도와주도록 건의했다. 종래로 유사한 사례가 없었기에 현령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유는 경작이 끝난 후 죄수들이 돌아오지 않거나 혹은 늦게 돌아오게 되면 법령이 유명무실해져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때 당림이 대답했다. “만일 문제가 나타날 것이 근심되면 제가 모든 책임을 질 것입니다.”

그 후 현령은 건강이 좋지 않아 업무를 볼 수 없어 당림은 곧 죄가 경한 죄수를 집에 돌려보내 경작하게 했다. 아울러 그들과 약속하기를 현령이 복직하기 전에 반드시 감옥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죄수들은 당림이 이렇게 너그럽고 백성들의 고통을 자상하게 돌보는 덕행에 감화되어 약정된 시간에 모두 돌아왔다. 당림은 이 일로 만천현에 이름을 날렸다.

당림은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공정했고 권력과 부귀에 짓눌리지 않았다. 어사직에 있을 때 대부 위정(韋挺)이 조정에서 규정을 위반하고 도종(道宗)과 귓속말을 하여 당림은 그 자리에서 도종에게 말했다. “당신은 조정의 질서를 문란하게 했습니다.” 도종은 이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로 말했다. “대부 위정과 간단한 몇 마디를 했거니 이렇게 엄격하게 한단 말이오?” 당림은 엄하고 조금의 여지도 없이 대답했다. “대부도 조정의 질서를 교란시켰습니다. 이는 절대로 안 됩니다.” 위정은 당림의 정직함과 엄숙함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신들은 모두 놀랐고 조정은 삽시간에 정숙해졌다.

당림은 사자로 영외(嶺外, 5령 이남지역)에 있는 기간에 교주(交州, 오늘날 베트남 북부, 중부와 중국 광시 일부 지역) 자사(刺史) 이도언(李道彥) 등이 3천여 명의 사람을 억울하게 감금한 사건을 심리하게 됐다. 그 사이 여러 차례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승진됐다. 또 그는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여 은청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봉해졌다. 당림은 개인 생활에서도 당시 관리들의 본보기였다. 그는 검소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관저주택을 건설하지 않았고 먹고 입는 것이 간단하고 소박했다. 사람에 대함에 너그럽고 대범했으며 종래로 다른 사람이 부주의로 범한 과실을 떠벌이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당림이 친구 조문에 가려했을 때였다. 그는 노복에게 상복을 가져오게 했다. 한참 지나서 노복이 가져온 것은 다른 색깔로 된 옷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조문을 가지 않았다. 당림은 노복에게 말했다. “오늘 기분이 좋지 않구나. 애통하게 울어야 할 때 울 수조차 없다니. 내가 네게 흰 옷을 가져오라 했거늘…… 오늘 조문은 가지 말아야겠다.” 또 한 번은 당림이 아랫사람을 시켜 탕약을 달이게 했다. 그런데 하인의 실수로 탕약을 제대로 달이지 못했다. 당림은 이 일을 모르는 체하고 하인에게 말했다. “오늘 날씨가 흐려 약을 먹기에 맞지 않구나. 그 약을 버리거라.” 그는 그렇게 하인의 과실을 추궁하지 않았다. 다른 관리들은 그의 너그럽고 인자한 품성을 칭송하고 따라 배웠다.

당고종이 왕위를 계승한 후 당림은 이부시랑을 조사하는 직에 있었고 그 후 대리경으로 승진했다. 어느 한번 고종이 감옥에 감금된 죄수 숫자 등 사실을 물었는데 당림은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대답했다. 당고종은 기쁘게 말했다. “전에 과인이 태자일 때 당신은 나를 가르쳤고 오늘 황제가 되어 또 나의 신변에 있게 됐구나. 이에 보답하고 전의 공로를 따져 상을 내려 이 관직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림에 중요한 것은 형법인데 법을 너무 과하게 사용하면 목숨을 잡초같이 여길 것이고 법을 너무 관대하게 사용하면 범죄를 방종하게 된다. 당신은 능히 중간을 취할 수 있어서 나의 뜻에 맞는구나!”

고종은 사형수를 직접 심문한 적이 있다. 기타 대리경이 판결한 죄수들은 큰 소리로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으나 오직 당림이 판결한 죄수는 한사람도 억울하다고 하지 않았다. 당고종은 심히 놀라워 그 까닭을 물었다. 죄수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확실히 죄를 범했습니다. 당대인의 판결은 억울하지도 않고 고문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판결을 뒤집을 생각이 없습니다.” 황제는 오랫동안 감탄하고 말했다. “판관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느니라!”

영휘(永徽)원년(650년)에 당림은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이듬해 화주(華州, 오늘날 섬서성 화현) 자사 소령(蕭齡)이 뇌물을 받은 일이 고발되어 황제는 대신들에게 명해 죄를 다스릴 것을 토론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소령에게 사형을 내려야 한다고 했으나 당림은 황제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죄행의 경중에 의심될 만한 곳이 있으니 마땅히 가볍게 다스려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여 소령은 사형을 면했다. 현경(顯慶, 당고종 연호)4년 사건에 연루되어 조주(潮州) 자사로 강직됐고 재임기간 중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0세였다.

문장발표: 2011년 11월 8일
문장분류: 천인지간>신전문화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1/8/2488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