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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傳文化】 의리와 효순으로 악인을 감화시킨 유평

글/청언(清言)

[밍후이왕]

유평(劉平)은 자(字)가 공자(公子)이다. 본명은 광(曠)이지만 한명제(漢明帝) 이후 평(平)으로 개명했다. 동한(東漢) 초기 초군(楚郡) 팽성(彭城)사람이며 관직이 종정(宗正)에까지 이르렀다. 사람됨이 덕행이 있고 의리와 효순(孝順)을 중시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의 감화를 받아 몸을 닦고 의를 행했다.

유평이 처음 군리(郡吏 군의 하급관리)를 맡았을 때 갱시(更始)의 난이 발생해 유평의 동생 유중(劉仲)이 도적들에게 살해되었다. 도적들이 다시 침범한다는 소문이 돌자 유평은 옷을 갈아입고 모친을 돌보며 이리저리 피난을 다녔다. 동생이 사망한 후 한 살짜리 조카딸을 남겼는데 유평은 피난을 다니는 와중에도 자기 자식은 현지에 남겨둔 채 조카딸만은 데리고 다녔다. 모친이 돌아가서 유평의 아이를 안으려 하자 유평은 “제 능력으로 두 아이를 다 양육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유중의 후대를 끊게 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자기 자식보다도 동생의 후사를 먼저 걱정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유평은 모친과 함께 도적을 피해 은신했다.

어느 날 아침 유평이 모친의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밖에 나갔다 우연히 굶주린 도적떼들을 만났다. 도적들은 배가 고픈 김에 유평을 잡아 삶아먹으려 했다. 그러자 유평이 통곡을 하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아침에 은신처에서 나온 이유는 모친께 산나물이라도 뜯어 드실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친은 제가 있어야만 사실 수 있으니 잠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모친이 배불리 드신 연후에 다시 죽으러 오겠습니다.” 이들 도적들이 보니 그의 태도가 너무나 간절한지라 가련한 생각이 들어 그를 풀어주었다.

은신처로 돌아온 유평은 모친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중을 든 후 “저는 이미 도적들과 약정을 맺었습니다. 도의상 그들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도적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도적들은 깜짝 놀라면서 “우리가 의로운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보는구나. 돌아가세요. 우리는 차마 당신을 잡아먹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리 하여 그는 모친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건무(建武) 초년 평적(平狄) 장군 방맹(龐萌)이 팽성(彭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군수 손맹(孫萌)을 잡으려했다. 당시 유평은 군리(郡吏)로 있으면서 손맹을 모시고 있었다. 그는 반란군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져 손맹을 보호하고 나섰다. 결국 그는 반란군에게 7군데 상처를 입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와중에도 유평은 반란군이 군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눈물을 흘리면서 요청했다. “제가 군수님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러자 반군이 칼날을 거두며 말했다. “이 사람은 의로운 선비이니 죽일 수 없다.” 그리고는 포위를 풀고 떠났다.

이때 손맹은 부상이 아주 심해 혼절한 상태였다. 그는 깨어난 후 목이 마르니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유평은 곧 자신의 상처에 고인 피를 가져다 마시게 했다. 며칠 후 손맹은 끝내 사망했다. 유평은 자신의 상처를 돌볼 겨를도 없이 그의 상여를 고향까지 호송했다.

나중에 유평은 충효(忠孝)와 절의(節義)로 효렴(孝廉)의 천거를 받아 제음군(濟陰郡)의 군승(郡丞 군수를 보좌하는 중요직책)으로 발탁되었다. 이 기간에 부친이 사망하자 집에 돌아가 3년 상을 치렀다. 상을 다 치른 후에는 다시 전초현(全椒縣)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했다. 그는 임기 동안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고 백성들도 모두 그에게 감격했다. 어떤 이는 일부러 자신의 재산을 많이 보고해 세금을 더 내려 했고 또 어떤 이는 일부러 나이를 줄여 노역을 더하려 했다. 모두 유평에게 감동받아 자발적으로 우러나와 한 것이다.

때 마침 군의 자사(刺史 지방 감찰관)와 태수(太守)가 이 지역을 순시했는데 감옥에 죄수가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또 이곳 백성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 특별히 문제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 결국 조서만 반포한 후 곧 이곳을 떠났다.

한 명제(明帝)가 즉위한 후 상서복야(尚書仆射) 종리의(鍾離意)가 상서를 올려 낭야(琅邪)의 왕망(王望), 초(楚)나라의 유평, 동래(東萊)의 왕부(王扶) 등 세 사람을 천거했다. 종리의는 이들이 다스리는 지방이 모두 교화가 잘 되고 백성들도 수양과 덕행을 알아 몸소 인의(仁義)를 행한다면서 조정에서 현명하고 유덕한 이 세사람을 중용해 줄 것을 희망했다. 명제는 이에 특별히 유평을 불러들여 의랑(議郎)에 제수했고 영평 3년에는 종정(宗正 종친의 사무를 관장하는 9경의 하나)에 임명했다.

신전문화(神傳文化)에 ‘의를 중시’함이란 정의의 원칙과 하늘이 인류에게 정해준 도덕규범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의 이해득실 앞에서도 ‘의(義)를 생각할 수 있고’ ‘의를 중시하고 이익을 가볍게 볼 수 있으며(重義輕利)’ 심지어 ‘의’를 자신의 생명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때문에 ‘사생취의(捨生取義 의를 위해 생명을 버린다)’란 말이 생겼다.

또 효순(孝順)에 관해 말하자면 백가지 선행(善行) 중 효가 으뜸이란 말이 있다. 이는 부모에게 효순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선심(善心)이란 의미이다. 자신의 부모조차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선량하고 엄격하게 천리와 도덕규범을 준수해 일을 하는 이런 좋은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을 수 있다. 유평은 바로 남을 위하는 방면에서 덕행이 뛰어나 주변을 감화시켰고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중문: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4/17/15282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