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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위의(敬慎威仪)

 

주희상

글/ 칭옌(清言)

주희(朱熹)의 자(字)는 위안후이(元晦)이며, 호(號)는 후이안(晦庵)이다. 남송(南宋) 휘주(徽州)무원(婺源-오늘의 장시(江西)에 속함) 출신, 당시 대유학자로서 저명한 교육자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주자(朱子)’라고 불렀다.

주희는 점잖고 진중하고 용모단정 했다. 일상 생활 속에서도 엄격하게 자신의 용모와 행동거지에 신중했다. 그가 저술한 깊고 폭넓은 학식이 담긴 많은 서적은 중국 전통문화와 도덕관념, 교육과 예교(禮敎)에 커다란 기여를 할만큼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평소 집안에서 한가히 있을 때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단정한 차림으로 신을 신은 다음, 가묘(家廟)및 선대의 성인(先聖) 신위(神位)앞으로 가 경배를 올린 다음 자신의 서재로 돌아갔다. 그는 서재에 있는 긴 책상을 늘 바르게 배열했고 책꽂이도 반드시 깨끗하게 정리했다.

학문을 연구하다 피곤하여 휴식할 때면 곧 조용히 눈을 감고 단정히 잠깐 앉아 있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한 뒤 일어나서는 곧 양반걸음으로 천천히 잠깐 걸었을 것이다.

주희의 평소 용모와 행동을 관찰하면 언제 어디서나 예의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 없었다. 주희의 용모단정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갖춘 위엄은 젊어서부터 줄곧 노년에 이르기까지, 잠깐이라도 느슨하거나 포기한 적없이 줄곧 엄격하게 자신에게 요구했다.

주희가 세상을 뜬 후, 녕종(寧宗)은 주의 시호(諡號)를 ‘문(文)’이라고 불렀고, 세칭은 주원공(朱文公)이다. 리종(理宗)때에는 ‘신국공(信國公)이라고 추봉했다. 명숭정(明崇禎) 15년의 조서에서는 ‘선유주자(先儒朱子)’(후세 사람들은 ‘선현(先賢)이라 고쳐 불렀음)라고 불렀다. 청(淸)나라 강희(康熙)51년 조서에서는 ‘선유주자에 대해 십철지차(十哲之次)’로 높여주었으며, 문묘(文廟)를 정해 봄가을에 그의 제(祭)를 올렸다.

경신(敬慎)이란 공경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고, 위의((威儀))는 장중한 의용(儀容)과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범하기 위해, 전통경전(經典) 중에는 ‘예의삼백,위의삼천(禮儀三百,威儀三千)’이란 견해가 있다. 아이들은 어릴적부터 마땅히 준수해야할 예의규범을 배우기 사작한다. ‘서는 것, 앉는 것, 눕는 것(站立坐臥)’ 으로부터 일상 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아주 명확한 요구가 있다.

한 사람은 자신이 덕행(德行)과 성품을 끊임없이 고양시키는 것 외, 옷차림새도 깨끗하게 단정하게 입어서 자신의 언행, 용모와 행위를 예의에 맞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해야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역시 수양의 일종 체현이다.

《시경(詩經)》중에는 ‘곤경하고 신중한 위의(威儀)는 유덕(有德)에 가깝다(敬慎威儀,以近有德)’는 견해가 있다.

문장발표: 2011년 03월 11일
문장분류: 고금담론> 주보 205호
원문위치: http://zhoubao.minghui.org/mh/haizb/205/A05/8343/%E6%95%AC%E6%85%8E%E5%A8%81%E4%BB%A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