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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傳文化】 아들의 성적을 낮춰 가난한 선비에게 양보한 장정옥

[밍후이왕] 장정옥(張廷玉)은 청나라 옹정(朝雍)황제 시대의 대학사(大學士)이자 군기(軍機)대신이다. 몸은 비록 고위직에 있었지만 겸양의 도리를 잘 알았다. 그는 자식들에게 늘 소박하고 덕을 중시할 것을 요구했으며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다 장정옥의 큰아들 장약애(張若靄)가 향시(鄕試)와 회시(會試)를 통과해 조정에서 치르는 전시(展示)에 응시하게 되었다. 여러 대신들이 고시답안을 심사한 후 밀봉된 답안지를 옹정황제에게 올렸다. 옹정황제가 다섯 번째 답안지를 읽다가 “선(善)은 서로 권하고 허물은 바로잡는다면 속임이나 근심이 없어져 반드시 성실하고 신뢰가 있게 될 것인즉 관리들도 하나가 되고 안과 밖이 하나가 될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너무나 간절한 문장에 정신이 번쩍 난 옹정제는 “자못 고대 대신의 풍격이 있구나”라며 좋게 평가했다. 이에 그를 일갑(一甲) 중 3등인 탐화(探花)로 결정했다. 옹정제는 나중에 밀봉된 봉투를 열어본 후에야 대학사 장정옥의 아들이 쓴 답안임을 알았다. 이에 장정옥에게 사람을 보내 기쁜 소식을 미리 알려주었다.

그런데 기뻐할 줄 알았던 장정옥이 뜻밖에도 황제를 찾아와 말했다. 자신은 이미 조정의 대신으로 있고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일갑의 3등으로 급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한 것이다. 옹정황제는 “짐이 아주 공정하게 평가한 것이지 대신의 아들이라 하여 일부러 선발한 것은 아니오.”라며 해명했다. 하지만 장정옥은 거듭 간청하며 “천하에 인재는 많고도 많습니다. 3년에 한번 치르는 과거에서 모두들 일갑(역주: 과거 1등을 장원, 2등을 방안, 3등을 탐화라 하며 이 셋을 일갑 또는 정갑[鼎甲]이라 하여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에 들기를 원합니다. 신이 아직 고위직에 있는데 자식이 또 일갑 3등이 된다면 이는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청컨대 자식의 등수를 낮춰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잠시 문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청나라 때의 과거제도를 설명해보자. 과거는 향시, 회시, 전시 세 차례를 치르는데 최종시험인 전시를 치른 후 삼갑(三甲)을 선발한다. 일갑(一甲)은 장원(壯元), 방안(榜眼), 탐화(探花) 3명을 뽑는데 보통 진사급제(進士及第)라 표현한다. 이갑(二甲)은 약간 명을 뽑는데 진사출신(進士出身)이라고 한다. 삼갑(三甲)도 약간 명을 뽑는데 동(同)진사출신이라 했다. 일, 이, 삼갑에 선발되면 모두 진사(進士)로 불리긴 했지만 대우에는 차별이 있었다. 일갑은 곧장 관직을 제수 받아 한림원 수찬(修撰)이나 편수(編修)가 되는데 이는 승진에 유리한 요직이다. 반면 이갑과 삼갑은 수년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관직을 제수 받았으며 그나마 임명되는 관직도 주현(州縣)급의 지방관이었다.

장정옥은 이런 규칙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이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승진하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이다. 대신 각고의 노력을 거쳐 서서히 덕과 복을 쌓은 후에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착실하다고 보았다.

옹정제는 장정옥의 이 발언이 단지 겸양의 표시라고 여겨 “경의 가문이 충성을 다하고 덕을 쌓아 이렇게 우수한 자식을 두게 된 것이오. 경의 아들이 고시에 일갑으로 선발된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니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장정옥이 벌떡 일어나 황제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다시 청했다. “황상께서는 지극히 공정하십니다. 하지만 신의 가문은 이미 많은 은덕을 입었사오니 바라옵건데 폐하께옵서 신의 진심을 가엽게 여기시고 일갑의 영광을 부디 다른 사람에게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폐하의 은혜와 조상의 덕이 있어 신의 자식에게 장차 승진할 자격이 주어진다면 그 또한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옹정제는 장정옥의 청이 간곡한 것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즉, 장약애를 이갑(二甲) 1등에 올린 것이다. 옹정제는 얼마 후 과거 결과를 공포함과 동시에 장정옥이 자식을 대신해 겸양한 미덕을 반포해 천하의 독서인(讀書人 글을 읽는 사대부)들로 하여금 모두 알도록 했다.

장약애 역시 부친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꾸준히 실력을 갈고 닦아 학문에 큰 진전이 있었으며 나중에 남서방(南書房), 군기처(軍機處) 등 요직에 기용되었다. 그는 늘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하고 겸허하게 처신했으며 자못 부친의 유풍이 남아 있었다.

“권력이 있다고 하여 함부로 할 수 없고 복이 있다고 하여 전부 누릴 수는 없다.”

“충성스럽고 너그러워야 가문이 오래 전해지고 겸손하고 삼가야 후손이 오래 간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의 처세에 있어 금과옥조가 되며 또한 자식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규범들이다. 장정옥 부자는 모두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힘써 실행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들은 진정으로 정직하고 또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들이다.

문장발표 : 2007년 4월 7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문사만담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4/7/15226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