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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문화】 순박한 가풍으로 대대로 선을 행한 도씨 가문

【명혜망 2007년 1월 29일】 도주(陶澍)의 자(字)는 자림(子霖)으로 청나라 호남(湖南) 안화현(安化縣) 사람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가풍이 순박하고 두터웠고 선행을 즐겼다.

도주의 고조(高祖)인 백함공(伯含公)은 선을 행하고 덕을 쌓기를 좋아했다. 당시 향리에서는 도적을 붙잡으면 모두 강물에 빠뜨려 죽여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날 백함공이 강변을 지나는데 마침 물에 빠져 죽어가던 한 도적이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저를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다시는 도적질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백함공이 가련한 생각이 들어 사람들을 불러다 이 사람을 구해주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또 옛날처럼 나쁜 짓을 계속할까 두려워 그를 작은 배에 태워 강을 건너게 했다. 강을 건너가 살길을 도모하게 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많이 있었는데 백함공은 일생 동안 8척의 배에 사람을 태워 보냈다. 이들은 모두 개과천선해서 좋은 사람이 되었다.

백함공은 또 행인들이 깨진 사기나 기와에 상처를 입을까 우려해 매번 외출할 때마다 작은 광주리를 휴대하고 나섰다. 길을 가다 깨진 기와나 사기조각을 보면 곧 주워서 작은 광주리에 넣은 후 집에 가져왔다. 이렇게 꾸준히 한 결과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빈방에 쌓인 기와와 사기 조각이 천장만큼 높이 쌓였다.

한편 도주의 증조부인 문형공(文衡公)도 아주 순박했다. 어느 날 큰 눈이 내렸는데 문형공의 집에서 쌀을 도둑맞았다. 문형공이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쌀을 훔친 사람이 원래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집에 돌아왔고 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발설하지 않았다. 30년이 흐른 후 문형공의 아내가 우연히 자손들에게 이 이야기를 언급한 후에야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쌀을 훔친 사람의 이름은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으니 그 너그러운 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강희(康熙) 무자(戊子)년 9월 문형공의 이웃집에 불이 나서 집이 거의 다 타버렸다. 하지만 이웃한 문형공의 집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이웃집과 인접해 있던 문형공의 식량창고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 끄는 작업을 도와주러 왔던 사람의 말에 따르면 큰 화재가 발생했을 대 붉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부채를 들고 담에 서서 불을 향해 부채질하자 그 큰 불이 문형공의 담까지 와서는 곧 멈췄는데 담벼락만 벌겋게 달군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는 평소 도 씨 가문에서 선을 행하고 덕을 쌓아 신선이 보호해준 것이라고 여겼다. 이웃집이 완전히 전소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자 문형공의 아내는 자기 집 식량창고에 있던 식량을 꺼내 전부 이웃에게 주었다.

도주의 조부인 인량공(寅亮公)은 성품이 담백했는데 집이 그리 부유하진 않았다. 어느 날 인량공이 강가에서 큰 돈을 주웠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린 끝에 어떤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찾는 모습을 보았다. 이에 그에게 다가가 무엇을 찾는가 물으니 그 사람이 말했다. “저는 수년간 외지에서 품팔이를 하느라 집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집에는 늙으신 모친이 계시는데 오늘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모친을 봉양하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라고 했다.

인량공이 얼마를 잃어버렸는지 묻자 그 사람 정확하게 대답했다. 이에 인량공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돈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 사람이 감사를 표시하며 기어코 절반을 사례하고자 했으나 인량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만약 당신의 사례금을 탐했다면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오.” 웃음을 마친 후 그 사람에게 빨리 돌아가라고 권하자 그는 고개 숙여 감사한 후 떠났다.

도주의 부친인 향현공(鄉賢公)에게도 재물보다 의리를 중시한 일이 많이 있었다.

선(善)에는 선한 보답이 있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다. 도 씨 집안이 역대로 이렇게 덕을 중히 여기고 베풀었으니 어찌 가문이 번성하고 자손이 부귀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주의 대에 이르러서는 한미한 가문 출신의 도주가 잇달아 큰 벼슬을 했다. 그는 가경(嘉慶) 5년 가을에 과거에 급제했고 2년 후에는 진사(進士)가 되어 한림원 서길사(庶吉士)가 되었다. 나중에 관직이 양강(兩江)총독에 이르렀고 나중에 태자태보에 추증되었다.

도주는 평생 청백리로 살았으며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즐겨 선을 행하는 가풍을 이었다. 그는 재직 기간에 여러 차례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봉록을 전부 내놓은 적이 있다. 도광(道光)황제가 그에 관한 말을 듣고는 감동해서 “신하된 사람들이 모두 도주와 같이 청렴할 수만 있다면 천하가 태평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라고 말했다. 아울러 도주를 장려하는 뜻에서 3천량의 은자를 하사했다.

하지만 도주는 여전히 거칠고 소박한 음식을 먹었으며 황제가 하사한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전부 가난한 고향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아울러 고향인 안화현에 48개에 달하는 무료학교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신전문화의 훈도(薰陶)를 깊이 받은 사람들은 왜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것을 아주 존중하는가? 이는 선을 베풀길 좋아하는 것이 바로 우주의 ‘진선인(眞善忍)’ 특성에 부합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좋은 사람은 장차 하늘의 보호와 복을 받게 된다. 아울러 사람이 만약 좋은 일을 해서 덕을 쌓을 수 있다면 사람의 복록과 수명은 모두 덕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선행을 많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장발표 : 2007년 1월 29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문사만담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1/29/147617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