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청언(淸言)
【명혜망 2007년 1월 18일】 범순인(范純仁)의 자(字)는 요부(堯夫)이며 북송 초기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범중엄(范仲淹)의 둘째 아들로 참지정사(參知政事 부재상에 해당)를 역임했다. 그는 평생 겸손하고 온화했으며 정직하고 너그러웠다. 사람을 대할 때 종래로 엄한 목소리나 화를 낸 적이 없다. 또 도의(道義)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곤란하고 위험한 일이라 해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견해차이나 사사로운 원망에 직면하거나 굴욕이나 불공정한 일을 당할지라도 한 번도 따진 적이 없다. 늘 너그럽게 대하고 공평무사했으며 전체적으로 큰 국면을 중시했다.
희녕(熙寧) 2년(1069년), 범순인은 바른 말로 상서를 올려 왕안석(王安石)의 변법(變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사마광(司馬光)이 다시 재상이 된 후 왕안석이 추진하던 신법(新法)을 전부 폐지하려 하자 범순인은 도리어 “너무 지나친 것들만 없애도 됩니다.”라고 반대했다. 아울러 사마광에게 만약 신법에서 취할 만한 곳이 있다면 가급적 받아들일 것을 권하자 사마광이 몹시 화를 냈다. 범순인은 “어찌 이번에도 또 고집 센 재상을 만났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채확(蔡確)이 무리를 결성해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자 범순인은 그를 몹시 반대했다. 하지만 나중에 어떤 대신이 채확의 시(詩)가 황제를 비방한다고 여겨 탄핵하려 했지만 범순인은 관대하게 처리했다. 시로 인해 발생한 옥사인 ‘시옥(詩獄)’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에 채확을 귀양 보내는데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채확과 한 무리라고 오해했다.
소철(蘇轍)도 범순인과 의견 차이가 많았다. 한번은 소철이 전시(殿試)의 제목을 결정할 때 한소제(漢昭帝)가 한무제(漢武帝)의 법도를 개혁한 일을 인용한 일이 있다. 이는 선제(先帝)를 한무제와 비교했다 하여 황제의 진노를 샀다. 소철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죄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대소 관원들은 감히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오직 범순인만이 침착하게 앞으로 나서 황제에게 소철을 위해 해명해주었다. 결국 황제의 노기는 점차 가라앉았고 소철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범순인은 나중에 또 이 사건으로 인해 직책을 강등 당했다. 소철은 나중에 범순인에게 크게 탄복했다.
장돈(章惇)이 재상으로 있을 때 원우(元祐 1086-1094)년간에 일찍이 재상 등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대신들을 모두 영남 지역으로 쫓아버렸다. 범순인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70이었다. 조정의 명령을 받은 후 그는 곧 흔쾌히 귀양길에 올랐다. 범순인은 매번 자식들에게 “마음속에 절대 조그마한 불평이라도 품지 말아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또 자식들 중 장돈에게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몹시 화를 내며 제지시켰다. 영남으로 가던 도중에 범순인의 배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지만 그는 다만 옷이 젖었을 뿐 다치지 않았다. 이때도 그는 자식들에게 “설마 배가 뒤집힌 것도 장돈이 나를 해친 거라고 여기진 않겠지!”라고 말했다.
범순인이 영주(永州)로 귀양 간 후 한유(韓維)가 균주(均州)로 귀양 온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한유가 집권했을 때 사마광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면서 적극 해명한 결과 한유는 귀양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범순인의 아들도 부친을 대신해 사마광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범순인이 제지하며 말했다. “나는 사마광의 추천을 받아 재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전에 내가 비록 사마광과 함께 조정에서 일할 때 불협화음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너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품고 사느니 차라리 부끄러움 없이 죽는게 낫다.” 그러자 그의 아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만 두었다.
영주에서 있던 3년 동안 범순인은 평화롭고 즐겁게 살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거칠게 굴며 무리하게 대했는데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범순인은 오히려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또 나중에 그를 탓하지도 않았다. 매번 손님과 대화를 나눌 때면 오직 성현(聖賢)의 말씀을 담론하고 수신양성(修身養性)의 도를 언급할 뿐 다른 일은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그의 기색과 태도는 갈수록 편안하고 조용해 마치 경성에 있는 것 같았다.
범순인은 일찍이 “내가 평생 배운 것은 오직 ‘충서(忠恕)’ 두 글자만을 얻었는데 평생 무궁한 수익을 얻었다. 조정에서 군주를 모실 때나 동료나 벗들을 접대할 때,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낼 때 등 언제 어디서도 나는 이 두 글자를 떠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늘 아들에게 “설사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을 탓할 때는 역시 청성하지만 아주 총명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흐릿하다. 너희는 마땅히 다른 사람을 탓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탓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범순인의 동생이 서쪽 국경에 위치한 관협(關陝)을 지키고 있었는데 서하(西夏)와의 문제에서 늘 공을 세우고 싶어 했다. 범순인이 동생의 마음을 알고는 “천자가 탄 수레와 땔감을 실은 수레가 앞을 다투고, 군자와 소인이 다투며, 중국과 외국이 승부를 가린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승리할 가치가 없다. 설사 승리한다 해도 옳지 않다.”라고 편지를 썼다.
범순인의 사람 됨됨이와 일하는 태도는 이로써 알 수 있다. 다툼이나 굴욕 혹은 불공정한 일을 당했을 때 초연하고 높은 자태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범순인이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남과 더불어 논쟁하거나 다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의 친척들이 수신양덕(修身養德)의 도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자 그는 “오직 검소하고 순박해야만 남을 도와 청렴결백하게 할 수 있고 오직 너그럽게 용서해야만 덕행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문장발표 : 2007년 1월 18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문사만담(文史漫談)
문장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1/18/14637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