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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번영과 몰락

서기 79년 8월 24일 한 차례 불가사의한 화산폭발로 불과 18시간 만에 폼페이 성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폼페이는 이탈리아어로 Pompeï라고 하며 고대 로마의 도시 이름이다. 원래는 로마시대 정치가이자 장군인 폼페이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 강(江) 하구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으며 로마 제국 당시 가장 번영한 도시의 하나였다. 이곳은 비옥한 토양, 풍부한 산물에 인구가 많았고 교역도 활발해 사람들의 생활도 아주 부유했으며 심지어 사치스럽기조차 했다.

만약 당신이 폼페이 성에서 생활하고 있고 아울러 중상류 계층에 속한다면 당신은 아마 넓은 정원이 딸린 양옥집에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담이 있고, 화원에는 화단, 등나무 덩굴, 회랑, 연못 등이 있을 것이다. 이외에 당신은 또 많은 노예를 거느려 제왕처럼 편안히 살았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지혜가 낮다고 얕잡아보지 말라. 폼페이 성곽의 전반적인 공공시설은 아주 선진적이었고 오늘날에 보아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이다. 지금 유행하는 ‘온천’이 당시 폼페이 성에서는 일찍이 성행했다. 그들은 공중목욕탕, 목욕통이 있었는데 공급되는 물도 냉수, 온수, 열수(熱水) 3가지 종류로 나뉘었다. 이외에 탈의실, 안마실, 미용실 등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귀부인들이 자녀를 데리고 목욕하던 전용 목욕통은 지금 보아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비록 이렇게 부유한 도시에 살았지만 폼페이 주민들은 이 천혜의 조건을 이용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지 못했고 자신들만의 부패한 생활방식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피비린내를 좋아했는데 폼페이 성내의 격투기 경기장(競技場)이 이를 증명한다. 이 경기장에는 모두 1만여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다시 말해 성 전체의 절반이상의 주민들이 와서 관람할 수 있었다. 이는 일반시민들이 이런 격투기에 대해 얼마나 뜨거운 반응을 보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사람이 맹수와 피 흘리며 싸우는 공연은 주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이런 경기는 종종 한쪽이 사망에 이를 때까지 진행되었으며 격투에 끌려나오는 희생자들은 대개 전쟁포로, 죄수 또는 노예였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취미가 성행했다는 것은 폼페이 성 주민들의 도덕과 인성(人性)이 타락했음을 설명한다.

폼페이 주민들의 도덕적인 타락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난잡한 성교와 동성애 장면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 노예들의 침실에는 남녀가 교합하는 상이 공개적으로 벽에 그려져 있었고 주민들의 문을 지키는 수호신도 ‘음란한 신(淫神)’이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폼페이에는 두 가지가 특히 많았는데 하나는 기생집이고 또 하나는 술집이었다. 벽이나 저택 안에서도 도처에서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춘화(春畵)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의 폼페이는 물질은 고도로 번영했지만 도덕의 붕괴와 부패가 동시에 병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차례 치명적인 재앙이 갑자기 발생한 후 폼페이 성의 생명들은 갑자기 끝났다. 폼페이 성은 화산재에 묻혀버렸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천 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지하에 매몰된 이 죽음의 성을 발굴해냈다.

뜨겁게 작열하던 용암은 이미 냉각되었고 무섭게 들끓던 짙은 연기는 이미 사라졌지만 미처 도망치지 못한 폼페이 주민들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단지 빈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속이 텅 빈 화산재 속의 시체에 석고를 주입한 후 재난을 당한 사람이 임종할 때의 각종 고통스런 자세와 표정을 되살렸다. 어떤 엄마는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또 담벼락에 엎드려 구멍을 파던 사람도 있다. 이들의 모습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고 두 눈에 역력하지만 역사는 단지 역사일 뿐이다. 폼페이가 인류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문장분류 : 천인사이(명혜주보 126)
문장위치 : http://zhoubao.minghui.org/mh/haizb/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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