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청언(淸言)
【명혜망 2006년 12월 15일】 맹지반(孟之反 맹지측을 말함)은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이다.
노나라 애공(哀公) 11년(기원전 484년) 제(齊)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노나라 조정의 실권은 삼환이란 불리는 맹손(孟孫)씨, 중손(仲孫)씨, 계손(季孫)씨가 쥐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계손씨의 세력이 막강했다. 당시 집정대부인 계손비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와 맞서 싸우고자 했으나 다른 가문에서는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쨌든 나라를 침략한 제나라에 맞서 노나라에서는 계손비가 중군(中軍), 중손설이 우군(右軍), 계손비의 가신이자 공자의 제자인 염구(冉求)가 좌군(左軍) 총수가 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제나라 군대와 맞섰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전차(戰車)를 이용한 전투가 치러졌는데 쌍방이 진을 펼치고 각기 좌(左), 중(中), 우(右) 3군으로 대형을 갖췄다. 전투가 시작되면 서로 전차를 몰아 부딪히며 충격을 가했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는 활을 쏘았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창을 이용해 서로 싸웠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차간의 충돌이었다. 때문에 만약 한쪽의 진영이 무너지면 기본적으로 전투의 패배를 의미했다.
노나라 진영에서는 계손씨의 독단에 반발해 장수들 간에 마음이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국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우군을 이끌던 중손설이 곧장 달아나버렸다. 승세를 탄 제나라 군사들이 사수(泗水)를 건너 노나라 병사들을 추격하자 우군 장수 맹지측이 맨 뒤에 남아 병사들을 보호하면서 천천히 말을 달렸다. 그러면서 맹지측은 화살을 채찍으로 삼아 “이놈의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한편 염구가 이끄는 노나라 좌군이 반격에 나서며 제나라 군사들을 무찌르자 제나라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결국 제나라 군대가 큰 수확없이 물러났다.
본시 군대가 진격할 때는 맨 앞에 서는 것이 공이 되고 후퇴할 때는 맨 후미(後尾)에 서는 것이 공이 된다. 따라서 적군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한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후미를 지킨 맹지측의 행동은 장수로서 떳떳하고 용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공을 세우고서도 오히려 자신이 탄 말이 빨리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미에 섰노라고 겸손해 하는 맹지측의 말에는 깊은 수양이 담겨 있다.
때문에 공자는 『논어』에서 특별히 맹지측의 일화를 인용해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은 용감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 참고자료
『논어(論語)』에 인용된 맹지측의 이야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맹지반은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패주하면서 군대 후미에 처져 있다가 장차 도성문을 들어서려 할 때 말을 채찍질하며 ‘내가 감히 용감하여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아가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子曰:孟之反不伐,奔而殿,将入门,策其马,曰:非敢后也,马不进也.]
문장발표 : 2006년 12월 15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2/15/14399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