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5년 11월 8일】
영척(寧戚)은 춘추시대 초기 위(衛)나라 사람이다. 젊어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자신의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는 말을 듣고 환공을 찾아가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영척은 가난하고 곤궁한 처지였기 때문에 정식으로 예물을 바치고 제환공을 만날 형편이 못되었다. 대신 떠돌이 장사치가 되어 소가 끄는 수레를 몰고 제나라에 도착했다.
한밤중에 제나라 수도인 임치의 곽문(郭門 도성 가장 바깥쪽 문) 밖에서 야영을 했다. 제환공을 만나고 싶었으나 돈이 많아 스스로 예물을 전하거나 자신을 추천해줄 인물도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제환공이 곽문에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영척은 이때 마침 수레 아래에서 소를 먹이고 있었다. 제환공을 본 영척은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쇠뿔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내용은 자신에게 큰 재주가 있으나 요순과 같은 임금을 만나지 못해 뜻을 펼 수 없음을 탄식하는 것이었다.
제환공이 그의 노래를 들은 후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는 그를 데려다 관리로 임용하고자 했다. 이때 많은 신하들이 만류하길, “저 자은 위(衛)나라 사람입니다. 위나라는 제나라와 겨우 5백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그리 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보신 후 정말로 재능과 덕이 출중한 인물이라면 그때 다시 등용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제환공이 말했다. “그렇지 않소. 만약 내가 그의 뒷조사를 한다면 아마 그에게 작은 허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오. 만약 그에게 작은 허물이 있다하여 그의 재능과 덕을 말살한다면 이것이 바로 임금된 자가 천하의 인재를 놓치게 되는 까닭이오. 또한 사람이란 본래 완벽하고 전혀 허물이 없을 순 없는 법이오. 그의 장점을 보고 등용하도록 합시다.”
그리고는 곧 관중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제나라의 상경(上卿)에 임명하게 했다. 영척은 과연 제환공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관중마저 그의 그릇을 높이 평가했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영척은 나중에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천고에 명성을 떨쳤다.
제환공은 이처럼 현명한 사람을 우대하고 자신의 몸을 낮출 줄 알았기 때문에 어질고 능력 있는 많은 인재들을 중용할 수 있었고 결국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으뜸이 되었다.
제환공이 신하들에게 한 말에는 사실 깊은 이치가 담겨 있다. 사람이란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볼 때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많이 보아야 하며 단점만 주시하지 말아야 한다. 당나라 때 저명한 재상이자 시인이었던 장구령(張九齡)은 일찍이 “남의 장점은 기억하고 단점은 잊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영척에 관한 참고자료
영척의 생몰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제환공 시대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젊어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품었으나 뜻을 펴지 못했다. 제환공 28년(기원전 685년) 제나라의 대부(大夫)로 등용되었고 나중에 제나라 농사관련 업무를 주관하는 대사전(大司田)이 되어 제환공을 보좌하는 주요한 신하 중 한명이 되었다.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주리왕(周厘王) 2년에는 영척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는데 본문의 내용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
기원전 680년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제환공이 관중에게 일부 병력을 이끌고 먼저 가도록 했다.
출발 당일 관중의 군대가 지금의 산동성 임치 부근인 노산(峱山)에 도달했을 때 소를 치는 한 청년이 쇠뿔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관중은 노래의 내용과 청년의 기개가 범상치 않음을 보고 시종을 파견해 데려오게 했다. 관중이 이름을 묻자 청년은 “위나라 백성으로 성은 영이고 이름은 척이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관중이 그의 학문을 시험해보니 대답이 물처럼 막힘이 없었다.
관중이 감탄하며 “호걸이 진흙 속에 파묻혀 발탁되지 못했으니 어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랴? 우리 국군(國君)의 대군이 뒤에 있으니 며칠 후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내 그대를 위해 편지를 써줄 터이니 국군(國君)을 뵙고 알현하면 반드시 중용하실 것이다.”
수일 후 과연 제환공의 대군이 이곳에 도착했다. 영척은 제환공 때와 마찬가지로 또 노래를 불렀다. 제환공이 그의 노래를 듣고는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파견해 영척을 데려오게 했다.
우선 그의 성명을 물은 후 환공이 말했다. “과인(寡人)이 많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천하를 정벌해 백성들은 편안하고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며 초목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설사 요임금이나 순임금이라 할지라도 이보다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순과 같은 임금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고 또 ‘밤이 길어 새벽이 오지 않았다’고 하니 네가 소를 치는 주제에 감히 조정을 풍자하려는 것이냐?”
영척이 이치를 따지려다 그만 제환공의 기분을 거스르는 말을 했다. 그러자 제환공은 크게 화를 내며 당장 목을 베라고 했다. 하지만 영척은 이 말을 듣고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으며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하나라의 걸(傑)왕이 충신 관용봉을 죽이고 은나라의 주(紂)왕이 비간을 죽였는데 이제 나 영척이 그 세 번째가 되는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제나라 대신 습붕(隰朋)이 나서며 만류했다. “이 사람은 위세에 굴하지 않고 위엄에도 위축되지 않으니 결코 평범한 목동이 아닙니다.”
환공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노기를 가라앉히고 영척에게 말했다.
“이는 과인이 그대를 시험해 본 것이오. 그대는 진실로 훌륭한 선비라 할 수 있소.”
이때 영척이 품속에 있던 관중의 친필 서신을 꺼내 바치자 환공이 읽어본 후 말했다. “기왕에 관중의 서신이 있었다면 왜 진작 바치지 않았는가?”
영척이 “현명한 군주가 사람을 선택해 보좌로 삼으시듯 현명한 신하 역시 군주를 택해 보좌합니다. 만약 군주께서 정직한 것을 싫어하고 아첨을 좋아하시며 노여움으로 신하를 대하신다면 신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스스로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환공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영척에게 예를 갖춰 대부로 임명했다. 아울러 관중과 더불어 국정을 다스리게 했다. 영척은 환공의 두터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나중에는 장기간 농사에 관한 업무를 주관했다. 그가 제나라의 농정(農政)을 책임지면서 제때에 파종하는 것을 중시하고 세금을 줄이자 제나라는 아주 빨리 부강해졌다. 그는 40여 년간 제나라에서 벼슬하면서 환공을 도와 패업을 완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문장발표 : 2005년 11월 8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5/11/8/11321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