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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문화(神傳文化)】 자식에게 검소함을 가르친 사마광(司馬光)

【명혜망 2005년 2월 23일】 『자치통감(資治通監)』의 저자로 북송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사학자인 사마광(司馬光)은 진사(進士)출신으로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서(尙書)좌복야 등을 역임했고 나중에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가 저술한 『자치통감』은 전국시대부터 진, 한, 위진남북조, 수, 당, 오대십국의 역사를 정리한 방대한 저작으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서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사마광은 일생동안 많은 감동적인 일화들을 남겼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사마광은 일을 하거나 가정에서 생활할 때 특히 자식들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몸을 삼가하며 근검절약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유몽(劉蒙)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스스로를 일러 “땅을 본 후에야 움직이고 발을 구른 후에야 선다”라고 말했다.

『자치통감』이란 거작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범조우(范祖禹), 유서(劉恕), 유검(劉儉) 등을 조수로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인 사마강(司馬康)도 작업에 참여시켰다.

한번은 아들이 책을 읽을 때 손톱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을 본 사마광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이 책을 애호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알려주었다. 우선 책을 읽기 전에는 책상을 깨끗이 닦고 책상보로 덮는다. 또 책을 읽을 때는 단정하게 앉되 책장을 넘길 때는 우선 오른손 엄지 측면으로 페이지 끝을 들어 올린 후 검지로 가볍게 책장을 넘긴다(역주: 고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 때문에 오른쪽 방향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는 아들에게 “장사하는 사람이 잔돈을 많이 축적해야 하는 것처럼 독서하는 사람은 마땅히 책을 애호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역사서적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는 거울을 만들기 위해 그는 15년 동안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늘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한번은 그의 친한 벗이 찾아와 “일을 좀 줄이라”고 충고하자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선왕(先王)께서 말씀하시기를 살고 죽는 것은 명에 달려 있다 하셨네.” 그는 이렇게 생사에 초연한 자세로 열심히 자신의 일에 몰두했으며 그의 이런 기풍은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상생활 방면에서도 사마광은 근검하고 소박했다. 그는 아들인 사마강에게 근검절약에 대해 훈계한 문장인 『훈검시강(訓儉示康)』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본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대로 청렴하고 결백함을 이어왔다. 나는 천성적으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금은 장식이 달린 화려한 옷을 주면 부끄럽게 여겨 입지 않았다. 20세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축하잔치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서도 홀로 꽃을 꽂지 않았다. 이때 한 친구가 “꽃을 꽂는 것은 임금께서 하사하신 것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여 비로소 한 송이를 꽂았다.

나는 한평생 옷은 추위를 막을 수 있으면 족하고 음식은 배를 채울 수 있으면 족했다. 이는 내가 일부러 더럽고 헤진 옷을 입어 세상 풍속을 바로 잡아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본성에 따라 행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화려하고 사치스런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오직 검소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고집스럽고 고루(固陋)하다고 비웃지만 나는 이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와 더불어 공손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길 ‘근검절약하면서 과실을 범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셨다고 알려준다. 또한 ‘선비가 도에 뜻이 있으면서 나쁜 옷과 음식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자는 더불어 논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 선인들은 검약을 미덕으로 여기셨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검약을 병으로 여기니 이 어찌 괴상하지 않은가!”

그는 이처럼 아들에게 근검절약의 중요성을 깨우치기 위해 가서(家書)의 형식으로 문장을 썼으며 이 문장에서 당시 유행하던 사치스런 풍속을 반대하고 근검하고 소박한 생활을 강조했다.

첫째, 사치스런 세상 풍속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사마광은 선인들은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겼지만 지금 사람들은 오히려 절약을 비웃는데 이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최근 몇 년간 풍속이 더욱 퇴락해 겉치레를 좋아하고 잘사는 티를 내는데 일반 병졸이 사대부의 옷을 입고 농부가 수놓은 신발을 신는다고 했다. 또 벗들을 모아 잔치를 준비하는데 몇 달치 급료를 쓸 정도이다. 사마광은 이런 악습에 대해 매우 가슴아파하면서 “고위 공직자로서 이런 풍속을 금지할 순 없을지라도 내 어찌 방조할 수 있겠는가!” 하고 한탄한다.

둘째, 근검절약의 미덕을 제창했다. 사마광은 송나라 진종(眞宗)과 인종(仁宗) 시기의 인물인 이항(李亢), 노종도(魯宗道), 장문절(張文節) 등 청렴한 관리들의 풍속을 찬양했다. 특히 아들에게 장문절의 말을 인용해 “검소함에서 사치로 들어가기는 쉽지만 사치에서 검소로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일깨워주었다.

이어서 그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 어손(御孫)의 말을 인용해 “검소함은 덕(德)과 함께 하는 것이며 사치는 죄악(惡)이 큰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도덕과 검약의 상관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해석했다. 그는 “덕이 있는 사람은 모두 검소함에서 유래한다. 무릇 검소하면 욕심이 적은 법이다. 군자가 욕심이 적으면 외물(外物)에 부림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도로 행할 수 있다. 반면 소인이 욕심이 적다면 근신(謹身)하고 절약할 수 있어 죄를 짓지 않으며 집을 번창하게 할 수 있다.” “반대로 사치하면 욕심이 많아지는데 군자가 욕심이 많으면 부귀를 탐하여 도에서 어긋나고 재앙을 부르게 되며 소인이 욕심이 많으면 많은 것을 구하여 함부로 사용하기에 패가망신하기 쉽다.”라고 했다.

셋째, 아들에게 사치를 경계해 집안을 잘 다스릴 것을 가르쳤다. 사마광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사치가 가져오는 재앙을 일깨워주었다. 역사적인 사례들을 상세히 열거하면서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그는 일찍이 아들에게 “서진(西晉) 시기의 하증(何曾)은 하루 식사에 만전(萬錢)을 사용할 정도로 부자였으나 그 손자에 이르러 교만함이 넘쳐 집안이 망했다.” 또한 “석숭(石崇)은 사치스러움이 일국의 왕을 초월할 정도였으나 결국 이 때문에 저잣거리에서 죽임을 당했다.”라고 가르쳤다.

사마광은 또 아들에게 끊임없이 경계의 말을 했다. “독서는 진지해야 하며 일은 착실해야 하고 생활은 검소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겉보기에 나라를 경영하는 큰일이 아닐지라도 실질적으로 가문이 흥하고 나라가 번영하는 기초가 된다. 바로 이런 도덕이 있어야만 비로소 수신(修身), 제가(齊家)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할 수 있다.”

“검소함에서 사치로 들어가기는 쉽지만 사치에서 검소로 들어가기는 어렵다.”라는 경구는 지금은 이미 세인들이 익히 아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사마광의 교육을 받은 아들 사마강(司馬康)은 어려서부터 검약(儉約)의 중요성을 알아 이로써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는 부친을 이어 진사에 급제했고 벼슬이 교서랑(校書郞), 저작랑(著作郞) 및 시강(侍講)을 겸했으며 고금의 역사에 두루 통했다. 이리하여 청렴결백하고 근검하며 소박한 명성이 후세에까지 전해졌다.

◇ 참고자료: 사마광(司馬光 ; 1019~1086)은 중국 북송(北宋)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사학자이다. 자(字)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우부(迂夫)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산서성(山西省) 속수향 출신으로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불리는데 사후에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었고, 1067년 신종(神宗) 원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이어서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해 신법(新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해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사퇴하고, 1070년에 지방으로 나갔다. 그는 당시 통치에 귀감이 될 만한 역대의 수많은 서적들을 모아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이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낙양에 거주하며 계속 책을 편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84년 마침내 책을 완성했다. 이듬해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이 되어 다시 사마광을 발탁했다. 이후 중앙 조정에 복귀해 재상을 역임했다.

그는 재상이 된 후 왕안석의 신법을 하나하나 폐지하고 다시 예전 법으로 대체해 구법당(舊法黨)의 지도자로 능력을 발휘했으나 몇 달 후 사망했다.

그가 편찬한 『자치통감』은 공자의 『춘추(春秋)』에 필적하는 편년체 역사서로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역사서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주로 유교적인 도덕론의 관점에서 인물을 평가했다. 이 외에도 『속수기문(涑水紀聞)』,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의 저서가 있다.

문장발표 : 2005년 2월 23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5/2/23/95273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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