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탄진(彈塵)
【명혜망 2008년 1월 6일】
(3)『서유기(西遊記)』——완전한 수련이야기
『서유기』는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세인들은 『서유기』를 즐겨 읽긴 하지만 그것이 함축한 것, 다시 말해 작가가 특별히 표현하고자 하는 실질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서유기』가 세상에 나온 이후 이 책을 단순한 낭만주의 신화소설로 여기며 그 요지를 언급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더구나 작가 오승은(吴承恩)이 일부러 숨기거나 감춘 것도 아니다.『서유기』가 표현하는 주제는 분명하고 똑똑하지만 사람들은 수련의 각도에서 깨닫지 못하고 단지 기괴한 모양의 온갖 요괴와 마귀들이 기기묘묘하게 변하는 세부적인 이야기만 감상하면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작가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의 이야기는 당승(唐僧 삼장법사)이 서천(西天)으로 경서를 구하러 가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사실 이는 애초부터 이 소설이 수련 이야기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동시에 당승이 경서를 구하기 전의 전생과 경력(經歷) 역시 수련에 속하는 동시에 그가 ‘경서를 구하는 과정’을 위해 전면적이고 완전한 길을 깔아주었다. 손오공(孫悟空)이 펼치는 수많은 신통(神通)은 수련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헛소리가 아니다. 천기(天機)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승은은 아주 함축적인 방식을 사용해 표현했다. 손오공이 처음 당승을 따를 때 죽인 여섯 강도의 이름이 안간희(眼看喜), 이청노(耳聽怒), 비후애(鼻嗅愛), 설상사(舌嘗思), 의견욕(意見欲), 신본우(身本憂)이다. 또 이 이야기가 나오는 제목이 “마음 원숭이가 바로 잡히니 여섯 도적이 흔적 없이 사라지네(心猿歸正 六賊無踪)”이다. 보다 명백하게 말하자면 여섯 도적이란 바로 승려들이 실천해야 할 ‘육근(六根) 청정(清净)’이다. 그럼 육근이란 무엇인가? 바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다. 여기까지 도달하자면 오직 마음을 바로잡은 후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수련은 상당히 고생스러운 것으로 금강부동(金剛不動)한 심지(心志)가 없으면 원만할 수 없다. 수많은 승려들이 종일 그곳에 앉아 가부좌하고 경을 외우는데, 다른 사람은 그의 내심 경지의 승화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수련하고 있다. 그가 가부좌하고 경을 외우고 마음을 닦는 과정이 바로 자신을 바로잡고 ‘여섯 도적’을 청리하는 것이다. 표현해내자면 겉으로는 아주 간단한 법리이지만 이 일보까지 도달하려면 끊임없이 수련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고 자신의 ‘안, 이, 비, 설, 신, 의’에서 오는 교란을 제거해야 한다. 오승은이 세인에게 알려준 방식은 바로 손오공이 여섯 강도를 때려죽인 것으로 구체화, 형상화시켰다. 오직 사람만이 우리 이 표면세계의 환상을 너무나도 중하게 본다. 본래 인류사회의 일체는 모두 환상이고 실질적인 것이 아니다. 오승은이 『서유기』를 창작함에 있어 진실로 마음을 다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승이 경을 구하는 과정에서 구구 팔십일 난(難)을 거쳤다. 겉으로 볼 때는 이상야릇하고 천변만화한다. 그러나 사실 난마다 모두 고험이었고 난마다 모두 수련자의 사람 마음을 겨냥해 온 것이다. 여인국을 지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색욕지심(色慾之心)을 버리겠는가? 여섯 개의 귀가 달린 원숭이가 없다면 어떻게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경을 구하는 과정에 부딪친 사람이나 요귀도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가지 일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모두 여래 부처님이 특별히 안배해 놓으신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수련자가 의지가 확고하다면 넘지 못할 화염산(火焰山)은 없으며 반드시 원만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약 사도(師徒) 네 사람을 한 수련인의 몇 가지 방면으로 본다면 작가의 의도를 더욱 쉽게 볼 수 있다. 수련계, 특히 불교에서는 “마음 원숭이를 가두고 의식의 말을 거둔다”는 말이 있다. 소위 마음 원숭이와 의식이란 말을 굴복시킨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의 경솔하고 불안한 마음을 조용히 하여 입정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또 가장 추측하기 힘들고 가장 복잡한 것으로 그것은 거의 한 사람의 일체를 다 포함한다. 앞 문장에서 제기한 마음 원숭이가 바로 잡히니 여섯 도적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바로 한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은 후 육근이 자연히 청정해짐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숭이로 마음을 비유해 마음원숭이라고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주로 ‘공(空)’의 이론을 말하며 ‘오공(悟空)’이란 이름을 ‘마음 원숭이(心猿)’에게 사용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것이다. ‘마음 원숭이’를 가두면 자연히 의식이란 말(意馬) 굴복시킬 수 있다. 의마(意馬)란 바로 곧 당승이 타고 다닌던 ‘백룡마(白龍馬)’를 가리킨다.
다시 저팔계(豬八戒)를 보자. 사람이 수련의 문에 들어서면서 시종 준수해야 할 것이 바로 계율(戒律)이다. 왜 계률을 지켜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남긴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수련자의 행위를 단속해 수련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수련자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속인 사회의 일체는 모두 수련자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 탐욕, 나태, 명리, 질투, 각종각양의 사람마음의 집착은 모두 수련인의 다리를 끌어당긴다. 어떤 때는 아주 정진하지만 어떤 때는 돼지처럼 배불리 먹고 실컷 잠만 자면서, 안일함을 추구다. 저팔계는 바로 수련자의 이런 방면을 형상화한 대표이다.
한 수련자로서 말한다면 정진하는가 여부는 종종 한 사람의 심성(心性)을 가늠한다. 단, 동시에 한 사람의 일상 행동과 수련태도도 아주 중하게 보아야 하는데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이 늘 깨끗하고 수련인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무거운 책임을 달게 감당하고 부지런히 아무런 원망도 없는 사오정(沙悟净)이 표현한 것은 바로 수련인의 이 방면이다.
당승은 겉으로는 아무 능력도 없지만 오직 하나의 반석 같이 확고한 마음이 있고 견정하고 청성(淸醒)하며, 사악한 마(魔)의 교란에도 미혹되지 않는 진각(眞覺)의식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며 후퇴하지 않는 견정한 신념은 필연적으로 수련자의 원만을 성취시킨다.
물론 책에서 표현한 것은 네 사람의 개성이 뚜렷한 수련자의 형상이다. 네명의 사도(師徒)는 백마를 포함해 각자 자신의 과위를 성취한다.
끝으로 독자들이 쉽게 간과하기 쉬운 대목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당승이 여래(如來)의 둘째제자인 금선자(金蟬子)가 환생했다는 대목이다. 불법(佛法)을 소홀히 대해 동토(東土)로 쫓겨나 환생했으나 간고한 수련을 거쳐 마지막에 정과(正果)를 이룬다. 이는 아주 큰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하는데 바로 사람의 내원은 모두 간단하지 않은 것으로 마땅히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도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람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 ‘하늘의 법(天法)’을 위반했거나 아니면 특수한 사명을 띠고 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온 것은 곧 수련을 통해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만약 수련을 잘하면 또 금선자와 같이 ‘정과를 성취’해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로 될 수 있다. 동시에 수련할 생각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불법(佛法)에 대해 절대로 경솔히 하거나 함부로 모욕하지 말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법을 비방하고 부처님을 비방’하는 큰 죄이기 때문이다!
(4)『홍루몽(紅樓夢)』—- 세상을 각성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는 걸작
이번 기 인류 문명 소설 창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는 바로 『홍루몽(紅樓夢)』이며, 이는 장차 역사에 의해 입증될 것이다.
『홍루몽』의 탁월한 성취는 단지 인물들의 형상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나, 줄거리 구성의 배치, 사회풍모의 전면적이고 진실한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며, 『홍루몽』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바로 그 심후(深厚)하고 현오(玄奧)하며 간결하면서도 풍만한 주제의 표현에 있다. 또한 이 일체는 모두 서로 포용하고 있다.
『홍루몽』의 내용이 너무나도 풍부하고 호번(浩繁)하기 때문에 ‘홍학(紅學)’, 즉 『홍루몽』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까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홍루몽』의 주제 역시 역대로 수많은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왜『홍루몽』의 영향은 이토록 심원하고 오래가는가?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홍루몽』안에서 맴돌다 ‘홍루(紅樓)’를 벗어나지 못하고 ‘몽(夢)’만 보게 된다. 특히 현대인들은 종종 소위 ‘역사적인 제한’이란 말로 『홍루몽』을 제멋대로 평론한다. 심지어 그 이론으로 ‘속편’ 창작을 지도하려 하는데 정말로 부질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의 주지(主旨)의 높이는 작가의 사상 경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높은 사상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곧 작가가 작품 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홍루몽』의 주제는 첫 회에 이미 아주 명백하게 알렸고, 5회 때 진일보로 알렸다. 작가 조설근(曹雪芹)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불도(佛道) 양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조설근은 수련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도 필연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점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이 『홍루몽』을 인식하는 기초이자 전제이다.
작가는 제 1회 머리말에서 “이번 회에 ‘꿈(梦)’과 ‘환상(幻)’ 등의 글자를 쓴 것은 독자들의 눈을 깨우치려는 것인데 곧 이 책을 쓰는 주지이다.” 파족(跛足) 도인의『호료가(好了歌)』와 견사은(甄士隐)의 오묘한 해석은 인생에 대한 수련인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니 문외한이 어찌 두 사람의 어리석은 듯한 대화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도인의 몇 마디 말이 견사은을 제도했지만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명리의 마당 중에서 뒹굴면서 미혹되어 깨여나지 못하는가?
제 5회에서 조설근은 이 책의 인물과 구성에 대해 아주 간결하게 개괄하고 배치했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이미 이 책에 대해 아주 익숙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에게 있어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사전에 이미 이 작품을 전부 완성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십년을 열독하며 다섯 번이나 수정했다.”라고 분명히 했다.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작가의 사상경지에 서서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면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우리 이 물질세계를 가장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며 소위 일체는 모두 환상이요 몽환(夢幻)이라고 한다. 인생은 가장 무상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불가에서 볼 때 사람 중의 행복은 복으로 칠 수 없다. 사람은 인간세상에서 본래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 때문에 수련이 있는 것이다. 수련의 목적은 자신을 해탈하고 승화해 천국에 가려는 것이다. 사람 중에서 원만한 일이 있는가? 인생은 본래 불완전한 것으로 설사 세간의 일체를 얻을지라도 역시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음의 갈망은 끝이 없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어느 한 상태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은 수련자가 말하는 ‘청정’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속인사회로 말하면 ‘완전’한 것은 잠시이고 ‘불완전한 것’은 영원하다. 불완전한 가운데 영원히 완전한 것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원만한 결과를 말하는데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이 작용을 일으킬 뿐이다. “정이 있는 사람은 결국 가족을 이룬다.” 실제상 바로 사람들의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다. 사실 설사 사람의 소원대로 정말 이뤄져, 아름다운 혼인을 한다 해도 수련자의 눈에는 ‘아름다운 원만’이 아니다.
누구인들 『홍루몽』이 완전한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80회까지 쓴 후 갑자기 사라지는가? 때문에 일을 벌이길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책 중 인물의 성격, 전체적인 줄거리 전개에 따라 각기 다른 ‘속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원작자인 조설근의 각도에서 보자면 책속의 일체 배치를 적당하게 펼쳐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만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이 책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그는 왜 이렇게 처리했는가? 그가 의도적으로 상식적인 이치를 벗어나 세상을 놀라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경지가 일반인의 그것을 훨씬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한 의도는 바로 그가 세간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고 심지어 더욱 먼 곳도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전부’를 다 보려는 것은 사람마음이며, 원만히 서술하는 것은 오히려 가장 중요한 내용을 표현한 후 곧 그렇게 나란히 사라지는 것만 못하다. 마치 인류에게 겁난(劫難)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정지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더 유리하다.
『홍루몽』의 위대하고 심오함은 조설근이 책의 후반부를 가볍게 삭제해 그 일부만을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함부로 속편을 창작하려는 것은 개 꼬리에 담비꼬리를 잇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전부 버려야한다.
사실 조설근의 안배에는 또 그의 독창적인 예술 구상이 있다. 우리 천천히 이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계속)
문장발표 : 2008년 1월 6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6/16963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