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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근신하고 도가 두터워 모욕을 당해도 따지지 않고 도의를 중시하다

【명혜망 2006년 9월 9일】
당나라 덕종(德宗) 시기에 전휘(錢徽)라는 대신이 있었다. 자는 울장(蔚章)으로 절강성 오흥(吳興 지금의 湖州市)사람이다. 정원(貞元) 초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원화(元和) 초년에 조정에에 들어왔으며 나중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했다. 그는 평생 근면하고 신중하며 도가 두터웠는데, 도의(道義)를 중시하며 아주 청렴했다.

헌종(憲宗)이 일찍이 전휘를 단독으로 불러 접견하자 전휘는 침착하게 말씀드리길 “다른 한림학사들도 모두 정선되어 선발된 유식한 선비들이니 마땅히 모두 기밀(機密)업무에 참여하여 광범위하게 토론하고 결단하셔야 하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그가 정말 근신하며 도가 두텁다고 칭찬하며 겸손하고 공경하며 예로써 사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경(長慶) 원년, 전휘는 예부시랑이 되었다. 당시 재상이던 단문창(段文昌)이 직접 찾아와 청탁하고 또 편지를 써서 천거하면서 양혼(楊渾)이 진사에 급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또한 한림학사 이신(李紳) 역시 전휘를 찾아와 주한빈(周漢賓)이 진사에 급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탁했다. 그러나 전휘는 정직하고 공평하여 사사로운 정을 따르지 않았고 두 사람의 청탁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합격자를 발표한 후 양혼과 주한빈은 모두 선발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재상 단문창은 극도로 화가 나서 황제께 전휘가 선발한 진사들이 모두 학식이 천박한 관료의 자제들이라고 상소를 올렸고 이 때문에 전휘는 강주(江州)자사로 강등되었다.

당시 전휘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단문창과 이신이 보내온 편지를 황상께 보여드리면 황상께서 보신 후 자연히 사실을 아실 터이니 이렇게 하여 억울한 누명을 벗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단지 마음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뿐 득(得)과 실(失)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란 수신양성하고 근면하고 신중하게 일을 해야 하거늘 어찌 사사로운 편지를 가져다 자신을 위한 증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곧 자식들더러 명령하여 편지를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사람들은 그가 덕이 높고 성망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전휘는 일찍이 설정윤(薛正倫), 위홍간(魏弘簡)과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두 사람이 사망한 후에 그들의 고아들을 데려다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 까지 돌봐주었다.

문장발표 : 2006년 9월 9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9/9/137438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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