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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轉輪聖王)은 누구시며 왜 다시 법륜을 돌리시는가?

글 / 삼인행(三人行)

【명혜망 3월 29일】(앞 글에 이어집니다)

3. 우담바라 꽃 피는 날이 법륜성왕이 법을 바로잡는 시기

전문적으로 나서서 ‘은하계 대주기’를 실증한다는 말이 허망한 일만은 아닌데, 마야인의 또 한 가지 오래된 전설이 기적처럼 맞아 떨어졌다. 그 시간은 1998년으로 사라졌던 13조각의 수정 두개골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대사제(大司祭) 아라젠더러는 “지금이 바로 神이 돌아올 시기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사실상 지구촌의 거의 모든 민족들은 전부 ‘신(神)이 돌아올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왔으며, 이런 전설 속에는 인간에 대한 하늘의 깊은 기대가 스며들어 있다.

석가모니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셨다.

2500년 후(즉 바로 오늘날)에 전륜법왕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법을 바로 잡으시(正法)는데 아울러 세속의 인연을 끊지 않는 수련법문을 널리 전하실 것이다.

서양의 『성경』에서도 ‘예수재림’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근본적으로 말할 때, 인류의 역사는 바로 기다림이며, 신(神)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역사이다.

그렇다면 신(神)은 정말로 돌아올 것인가? 그는 돌아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우리가 오직 우담바라 꽃이 오늘에 피어난 사실만을 주의해 본다면, 우리에게는 그저 얇디 얇은 한 층의 면사포를 벗기는 일만 남았다. 사실상 세인들이 생생세세(生生世世) 기다려 왔던 그 분은 이미 출현하셨다.

2005년 2월 중순 한국 순천시 해룡면 수미산 선원에 있는 관세음보살 불상에 10여 송이의 우담바라가 피어났다. 당연히 불가의 승려와 신도들은 이 일을 불문의 성대한 일로 여겼지만 속세 인간들의 반응은, 첫 번째로 향을 피우는 것 만큼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원인은 이 꽃은 단지 천상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불경에는 확실하게 이 꽃이 피는 의의가 비범하다고 기재되어 있다.

1) 우담바라 꽃은 비할 바 없이 귀중한 것으로 3천년에 비로소 한번 씩 핀다.

2) 이 꽃이 피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피어났다면 한 가지 대단히 큰 일과 연관되어 있다. 즉, 전륜성왕께서 인간 세상에서 법을 바로 잡을 때이다.

3) 전륜성왕은 정의(正義)로 인간 세상에서 정법(正法)의 바퀴를 돌리시는데 그분은 전륜(轉輪 역주: 직역을 하면 돌아가는 바퀴)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이상적인 왕이시다.

지금 수미산 선원의 고승은 드디어 감정을 끝내고 아울러 정중하게 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인간 세상에 이런 꽃이 확실히 존재하며 아울러 바로 지금 세대에 정말로 피었음을! 이에 근거하여 수미산 고승은 전륜성왕이 바로 지금 세상에서 법을 바로 잡고 있음을 흔연히 긍정하였다. 지금 진행 중이라는 긍정은 앞서 언급한 마야인 대사제의 단언(斷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2005년 2월 중순부터는 더 이상 일반적인 대명사를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수미산 고승은 “돌아온 신(神)은 결국 누구인가, 예수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아니며, 바로 전륜성왕이시다!” 라고 하였다.

마야와 한국의 두 가지 실물 예언이 이미 체현되었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1)‘神이 돌아올 것이다’라는 오래된 전설은 단지 아름다운 신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또한 바다 가운데 “홀연히 들으니 바다 위에 선산(仙山)이 있으나 산은 허무하고 아득한 사이에 있도다.(忽聞海上有仙山,山在虛無縹緲間)”라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2)지금 신화와 진실 사이에는 여전히 한 걸음 차이가 있으나 단지 창호지 한 장의 간격만이 남았다. 이 창호지는 바로 전륜성왕을 확정하는 일인데 오직 전륜법왕의 인간세상에서 대응이나 혹은 호칭을 알게 되면 이 천고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다!

물론 이 천고의 수수께끼의 해답을 드러내는 것을, 매 하나의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비할 바 없이 수승(殊勝)한 일이며 이로부터 한 생명이 만고에 얻기 힘든 기연(機緣)을 맺게 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금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삼생(三生)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바, 봄 빛이 사방을 골고루 비추는 것처럼, 기연은 사람마다 모두 있는 것이다. 오직 심령이 갈망으로 충만되거나 심지어 무신론이라는 그릇된 이론을 집요하게 고집하지 않으며 두 눈을 감고 있지 않다면, 이 만고의 기연은 바로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지만, 그러나 팔을 굽히는 순간 잃을 수 있다. 모두 것은 일념(一念)의 차이에 달렸다.

결론적으로, 우담바라 꽃이 이렇듯 민감한 역사적 시기에 핀 것은, 필자가 보기에 이는 절대로 하나의 고립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 때문에 불문(佛門)의 이 성대한 사건은 세기가 교차되는 놀라운 역사적 배경 하에 놓아야 하는데 심지어 반드시 그래야 한다.

1)1992년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널리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1992년 6월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은 『논어(論語)』에서 처음으로 ‘불법(佛法)’과 ‘진선인(眞善忍)’을 언급하셨다.

“‘불법(佛法)’은 더욱 작은 데로부터 더욱 큰 데에 이르기까지, 일체 오묘한 신비[奧秘]를 꿰뚫어 보는 견해[洞見]로서,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고 누락된 것이 없다. 그는 우주의 특성 ‘眞(쩐)·善(싼)·忍(런)’이 부동한 층차에서의 부동한 논술로서, 다시 말해서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道)’이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법(法)’이다.”

마땅히 강조해야 할 것은, 매 하나의 생명이 모두 우주가 창조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주 특성에서 빗나간 생명은 우주 특성인 진(眞)․선(善)․인(忍)에 자기를 동화시키는 외에 다른 어떠한 선택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이것이 바로 법륜성왕이 인간 세상에서 ‘법을 바로잡는(正法)’ 근본적인 내포라는 것을 믿어야 하며 불법(佛法) 진선인(眞善忍)으로 변이된 인류를 바로잡고 동화시켜야 한다.

2)1994년 12월 『전법륜(轉法輪)』책이 세상에 출판되었다.
필자는 1995년에 행운으로 이 귀중한 책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전법륜(轉法輪)』이란 세 개의 큰 글자가 눈에 확연히 들어왔으나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으며 이 속에 담긴 깊은 함의에 대해서는 더더군다나 몰랐다.

하지만 오늘 우담바라 꽃이 피게 되어 『전법륜(轉法輪)』이라는 서명(書名)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이름을 보고 그 뜻을 생각한다면 불경에서 예언한 것처럼 『전법륜(轉法輪)』의 의미는 인간세상에서 정법의 바퀴를 돌린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전에 널리 전해진 ‘法輪大法’과 이전에 발간된『전법륜(轉法輪)』은 이후에 ‘전륜법왕(轉輪法王)’이 바로 인간 세상에서 정법을 하게 된 것을 인증(印證)한다. 이것은 단지 명사들의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① 『전법륜』책은 정말로 ‘정법(正法)’의 중임을 맡을 수 있는가?

② 『전법륜』책은 정말로 인류를 바로 잡는 ‘불법’인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또 질문할 것이다.

③ 전륜성왕이 정말로 인간세상에 왔단 말인가?

④ 그 분이 정말로 지금 인간 세상에서 정법의 바퀴를 돌리고 계시는가?

13년 동안 法輪大法 수련생들의 공동 실천은 여기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주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이미 『법이 널리 전해지니 해와 달이 휘황하다(法典洪傳日月煌)』과 『운반창해편(雲帆滄海篇)』등에서 상세히 서술하였다.

『법이 널리 전해지니 해와 달이 휘황하다(法典洪傳日月煌)』이란 문장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만약 2천년 전에 예수가 침(타액)과 진흙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했으며 손을 이마에 얹자 문동병 환자의 병이 나았다. 그렇다면 파룬궁 창시인은 어떠한 공력과 공능을 가지고 있는가. 단지 『전법륜』책에마 의거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억만 제자들의 심신(心身)을 정화시켜 주는 동시에 산처럼 거대한 병기(病氣)와 업력(業力)을 소리없이 무형 중에 없애 버린다. 만약 그가 독립적으로 이 모든 것을 제거했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또 얼마나 위대한 위덕(威德)이며 얼마나 홍대(洪大)한 자비인가!”

“『전법륜』책은 비록 장쩌민 무리들에 의해 수색당하고, 금지당하고 , 태워졌으나 도리어 봄바람에 성스런 불꽃(春風聖火)처럼 억만 수련자들의 마음을 밝혀 주었으며, 그들의 실천은 웅변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지구촌 어느 곳에 있든지, 파룬따파 창시인을 한 번이라도 만난 인연이 있었던지를 막론하고, 그가 단지 ‘진심으로 믿고 착실히 실천한다면’ 그의 신체는 반드시 정화될 것이며 그의 정신은 필연코 승화될 것이며 생명의 기적이 발생할 것이다. 이 생명의 운명은 사실상 이미 개변되었으며 그는 이미 생명의 영원한 대문을 열어놓았다.”

만약 매 대법제자의 신체를 하나의 소우주로 보고 미시적인 데서 부터 매 하나의 소우주의 질적변화를 관찰하여 본다면, 그것의 거대한 움직임은 천지가 요동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결코 천체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없이 가장 큰 설득력이 있는 것은 바로 사실(事實)이다. 『전법륜』은 불법(佛法) 진선인(眞善忍)을 사용하여 파룬따파 제자들을 동화시켰다. 역으로 파룬따파 제자들의 위대한 실천은 또한 ‘불법(佛法)’에 대한 찬송이자 『전법륜』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긍정인바 바로 위에서 제기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원만한 답변이기도 하다.

4. 난세의 원연(冤缘)이 모두 선해(善解)되고 생사의 선택은 일념에 달렸다

지금 시대에 발생한 중대한 역사 사건을 다시 새롭게 살펴보면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엄숙하게 위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안을 생각해보면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듯하다. 특히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를 새기고, 조물주의 넓은 마음에 감사하며 전륜(轉輪)의 경문을 읽을 때면, 심령에 더없는 행복을 느끼며 활연히 밝아진다. 필자는 용렬함을 무릅쓰고 독자들과 심득 체험을 교류해 보고자 한다.

(1) 불법의 자비와 위엄(威嚴)은 공존함

『세간을 향해 法輪을 돌리노라』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사실 사부는 정법 중에서 일체 중생을 구도하는 것으로, 단지 선(善)한 것만이 아니며 당연히 악한 것도 포함한다. 나는 늘 이야기하였다. 정법 중에서 나는 일체 중생의 지난 과오를 탓하지 않으며 오직 정법 중에서 중생들의 대법에 대한 태도만 볼 뿐이라고. 다시 말해서 어떤 생명이든지, 역사상 얼마나 큰 잘못과 죄가 있든지 간에, 오직 정법에 대하여 반면(負面)적인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는 모두 그(그것)들을 선해(善解)시켜 줄 수 있으며, 동시에 그(그것)들의 죄업을 없애버릴 수 있다. 이것은 최대의 자비이며, 진정한 구도이다.”

이 구절은 『세간을 향해 法輪을 돌리노라』에서 가장 절묘한 부분이다.

만약 사악한 생명을 말하자면 천상인간 중에서 마땅히 중공이 가장 사악(惡)하다.

① 중공은 전체적인 규모에서 조물주의 도덕 정신 자양(滋養)을 단절시켰고, 사람의 심령을 야수로 변화시켰으며, 사람의 정신을 요귀화 시켰다. 가히 중국의 자손들에게, 심한 사람은 적룡(赤龍)의 부체를 몸에 지니게 하였고 덜한 사람은 정신적인 질병을 옮겼다고 한탄할 만하다!

② 50년 간 폭정을 실시한 중공은 6천만 내지 8천만 명의 비정상적인 사망자를 냈으며 이는 매년 평균 1백20만~1백50만 명을 도탄에 빠지게 한 셈이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매년 5~6 차례의 당산 대지진을 만들어낸 것과 같으며 또한 4~5번의 인도양 대해일을 일으킨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재앙이 50년 동안 거듭되고 있다.

③ 국민들을 협박하여 마귀의 주문을 듣고 춤을 추게 하며, 범죄의 공범으로 전락되게 하였다. 거의 매 사람마다 악당들과 한패가 되는 동시에 박해받는 자로 되었는가 하면, 수난(受難)을 당하면서도 공산당의 ‘은혜’에 대한 찬송가를 부르게 하였고, 교활하고 사악하게 인간적인 윤리가 비참하게 일그러졌는가 하면,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미친 듯이 추구하게 만들었다. 당신은, 이사의(李思懿)의 슬픈 노래를 듣지 못했는가? 당신은, 마가작(馬加爵)의 비극 공연을 보지 못했는가? 도대체 또 누가 있어 이 100여년 간 끈질긴, 베어도 끊어지지 않고, 풀어도 여전히 헝클어진 난세의 억울한 인연을 만들었는가?

비록 이렇다고 할지언정 불법(佛法)은 자비로와, 창해(蒼海)의 교룡과 악용(潛蛟惡龍)을 교화시킬 수 있으며, 광야의 독사와 맹수도 복종시킬 수 있었다. 설사 그것이 중공과 같이 사악하다 할지라도 선해(善解)할 수 있었다. 사실상 파룬따파는 바로 제일 사악한 호랑이와 이리 공화체제 내에서 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선으로 향하게 만들었으며 사회도 안정되게 하였다. 1992년부터 1999년 동안 7년 사이에 수련자 수는 7천만에서 1억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중공 체제내의 사람들도 많아서 이들은 모두 난세의 원연(冤緣) 속에서 선해(善解) 받고, 죄업이 제거된 동시에 천국의 계단에 끌어올려져 신(神)의 길을 걷는 사람이 되게끔 하였다. 이것은 최대의 자비이며, 진정한 구도이고 동시에 공산당과 그 나라가 선해(善解) 받을 수 있었다는 증명이다. 만약 이와 같이 했다면 중공에게는 다른 미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공은 도(道)에 반하여 행동하면서 1억 인의 바른 믿음을 박해하였고, 십악불사(十惡不赦)하게 만고의 대죄를 저질렀다. 불법(佛法)의 자비는 무도(無度)할 수 없다. 만약 그런 항거를 받아들이고, 인간 세상의 정법을 취소한다면, 이것은 곧 근본적으로는 불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불법의 위엄이 없다면 불법의 자비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그러므로 ‘난세의 원연이 모두 선해받는다’는 것은 중생 구도를 의미하고,‘대법에 대해 악행을 저지른 자는 소생할 수 없는 문(無生之門)에 떨어진다’(『법정인간 예언』중에서)는 구도를 보증하는 것으로,양자는 상보상성하는 것이므로 어느 하나도 없어선 안 된다. 이것이 바로“그 당이 꼭 파룬궁(法輪功)과 이기겠다고 고함지른 그 순간부터 시작하여, 중공 사악한 영(邪靈)과 세간에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중공 사악한 깡패집단은 전 우주의 뭇 신들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2) 불법무적(佛法無敵)이라 대법제자는 적(敵)이 없다

『세간을 향해 法輪을 돌리노라』중에서
“대법과 적(敵)이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은 바로 중공이다. 물론 수련인은 적이 없으며 누구도 대법의 적이 될 자격이 없다. ”

이것이 바로 절묘한 뜻이 담겨있는 두 번 째 구절이다.

우선 불법(佛法)은 생명을 육성했으며, 또한 생명이 생존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모든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단지 선택만이 존재하며 적이 될 자격은 없다. 혹은 동화(同化)를 선택하고 혹은 자멸(自滅)을 선택하는데 제 삼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에는 적(敵)이 없다. 그리 적절치 않는 비유을 하자면, 한 사람이 편안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동시에 공기와 물을 거절하는 선택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사람도 물과 공기의 적이 될 자격은 없다.

가령 사마귀가 마음속으로 적으로 삼고 싶다고 해도 그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숲 속에서 자유로이 먹이를 찾고, 천명(天命)에 감사하고 살아야 할 뿐, 큰 길에 나가 팔을 뻗쳐 차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대법제자들은 진(眞), 선(善), 인(忍)에 따라 행동한다. 진은 거짓이 없는 것이고 선은 악을 제지하며, 인은 폭력을 멈추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진실한 마음으로 선을 권하고, 증오도 원한도 없으며,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적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이 진, 선, 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선 안 된다. 중공과 그 사악의 우두머리는 바로 상대를 만만히 보다가 큰 코 다친 셈이다. 중공의 횡포는 안하무인으로, 누구를 타도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국가 주석조차도 개미 한 마리 죽이 듯이 한다. 중공과 그 사악의 우두머리가 볼 때 진선인을 없애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귀의 나팔을 크게 불어대며 “3개월 내에 파룬궁을 싸워 이기겠다.”고 망언을 퍼뜨렸다. 결과는 어찌되었는가? 바로 뭇 신들의 사형 판결을 받은 처지로 몰락하여 판결이 집행될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옛 성인은 또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고 했으니 더욱 지극히 진실하고 지극히 선하며 지극히 인내함이다. 중공과 그 사악의 우두머리는 진, 선, 인에 대해 죄를 범했으니 단지 스스로 멸망을 취한 것과 다름이 없다. 6년 동안 싸웠으나, 공격 목표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느 곳에 힘을 써야 할 지도 모른다. 공격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도리어 자신이 받는 상처가 더욱 심하다. 만약 그것이 조금만 더 총명했더라면 파룬따파와 적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검법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가장 고명(高明)한 전략전술은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중공의 파룬궁 탄압은 무상(無上)한 도덕을 부정하는 한 바탕 전쟁이다. 만약 무상한 도덕을 부정해 버릴 수 있다면 이 호한한 우주와 먼지 같은 인간을 포함한 무수한 불도신(佛道神)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로써 보더라도 중공의 멸망은 첫 시작부터 정해진 것이다. 진(眞)은 진리의 빛과 같으며, 선(善)은 봄바람의 아침 햇살과 같고, 인(忍)은 손가락을 감는 부드러운 강철(繞指柔鋼)과도 같다. 그러므로 진선인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히 말해서 그것은 단지 거짓말, 사악, 추문을 만들고, 몸을 망치며 더러운 이름을 천추에 남길 수 있을 따름이다.

(3) 정법시기 생명이 직면한 것은 생사의 선택

『세간을 향해 法輪을 돌리다』에서

“인류의 이 한 막이 시작될 때, 더 이상 사람에게 줄 기회가 없을 것이다.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이미 사람에게 충분하게 기회를 주었다. 역사의 오늘날, 사람은 반드시 생명의 미래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듣고 안 듣고는 역시 사람이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또한 절묘한 뜻이 담겨 있는 3번째 부분이다.

우선 사람 마음의 선악에 대한 선택이 바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는 ‘명은 마음에서 유래한다(命由心生).’는 지극한 이치를 지닌 명언과 상응한다.

다음으로, 정법시기 생명이 직면한 것은 생사의 선택이다. 왜냐하면 우주 특성에 동화되지 못한 생명은 버려질 것을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이므로 신기원(新紀元)으로 진입할 수 없다.

세 번 째로, 사교인 중공은 대법과 적이 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개체생명이 미래를 선택하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① 중공과 그 사악의 우두머리는 전력으로 마력(魔力)을 동원하여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불법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고 순장(殉葬)할 사람을 만들어냈다. 독해(毒害)가 심한 사람은 심지어 진상마저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② 중공은 대법에 대해 악행을 저질렀기에 뭇 신들에게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그것의 신체도 자연히 뭇 신들이 공격하는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신체 세포인 당원 중에는 확실히 파룬궁 탄압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단호히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짐승의 표기를 지우지 않는다면 이들은 모두 소멸 대상이 된다. 옥석(玉石)이 똑같이 불에 타게 될 것이다.

이런 정세에 대해 또 하나의 비유를 하자면, 50여년 이래 화룡(火龍) 열차는 인류의 4분의 1을 납치하였다.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생활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뭇 신들에게 사형판결을 받는 화룡열차는 전속력으로 벼랑끝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그야말로 훼멸될 시각에 직면한 셈이다.

『세간을 향해 法輪을 돌리노라』는 사망 열차 속에 탄 모든 승객들에게 경고를 내린 것이다. 만약 사람이 차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바로 심연(深淵)을 향해 돌진하는 열차의 한 분자, 한 입자로 그것의 구성부분이다. 일단 벼랑끝에서 미끄러져 차와 사람이 훼멸되는 시기가 올 때면 사람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바로 사망열차의 승객들이 경고를 듣는가 듣지 않는가를 보는 때이다. 듣는다면 곧 사악한 당의 손아귀에서 생명을 선택하는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며, 듣지 않는다면 사실 이 역시 일종 듣고 선택한 것이다. 즉 중공의 말을 듣고 그것과 함께 사망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생사의 선택은 바로 듣는가 듣지 않는가 하는 일념의 차이에 달렸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듣고 안 듣고는 또한 선악에 대한 사람 마음의 선택이다. 지금 『9평』이 이미 발표되었고 도의(道義)가 사라진 중공의 진면목이 이미 세상에 드러났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직도 중공의 말만을 듣고자 한다면 묻고 싶다. 이 얼마나 선악이 뒤바뀌고 정념이 없으며 자신에 대해 책임 지지 못하는 생명의 선택인가!

확실한 것은,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홍대(洪大)한 자비도, 그 어떤 불은호탕(佛恩浩蕩)도 다가갈 수 없다는 점이다.

문장완성 : 2005년 3월 24일
문장발표 : 2005년 3월 29일
문장갱신 : 2005년 3월 31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3/29/983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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