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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질풍경초(疾風勁草)> (3)

글/중팡충(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18일】(전번 글을 이음)

제 3 부 11차례 구류되다

머리말: 박해 중에서 나는 한 차례 또 한 차례 감금과 혹형의 시달림 중에서 걸어 나왔다.

제 1 장 탄압 초기

7.20 대규모 체포

어느덧 1999년 7월 20일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을 금지하기 시작했으며 또 일부 보도소장을 붙잡았다. 사부님의 한 수 시 [진성이 보이다>> 가 생각났다. “대법을 굳게 수련하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지라, 층차를 제고함이 근본이로다, 고험 앞에서 진성이 보이나니, 공성원만하여 불도신이 되노라.” 나는 대법을 굳게 수련하려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내가 대법 중에서 이득을 얻은 것이 적지 않은데 틀림없이 정부에서 잠시 파룬궁 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초래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나는 차를 타고 온 집 식구와 동수들과 함께 법에 따라 성(省) 정부에 청원하러 가서 불법적으로 체포된 모든 대법제자들을 무조건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아울러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백 가지 이익만 있고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는 진실한 정황을 성 정부에 반영하였다. 우리는 쓰촨성 정부청사 밖의 거리로 갔는데 동수들도 아주 많이 와 있었다. 우리는 성 정부 문밖의 인도에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목격했다. 전신을 무장한 경찰들이 줄을 서서 사면팔방으로부터 뛰어왔으며 경찰차들도 경적을 길게 울리면서 달려 왔는데 여러 가지 경적소리가 한데 뒤엉켜 공포가 극에 달했고 공기는 마치 응고된 듯 하였다. 여러분들은 숨을 죽인 채 비장하고 공손하게 서서 그들이 나와 우리들에게 하나의 합리적인 대답을 주기를 기다렸다. 비디오카메라는 이런 장면을 부지런히 촬영하였고 전신 무장한 경찰들은 굳은 표정으로 오고 갔다. 오후 2시경, 한 경찰이 큰 스피커를 들고 “당신들은 모두 차에 오르시오.” 라고 외쳤다. 결국 우리더러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게 하면서 모두 싣고 먼저 청두 올림픽 경기장으로 갔다가 후에 랑중(閬중) 호텔로 옮겼다. 경찰은 또 불법적으로 우리 몸을 수색하였고 대법책을 수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신훙루(新鴻路) 파출소로 옮겨 한 밤중까지 불법적인 심문을 한 후에야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많은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파룬궁이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를 보도하지 않았는가? 바로 5월 말, ‘요언을 믿지 말고 요언을 퍼뜨리지 말자.’라는 문장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는가? “당원, 군인이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요언인가?” 라는 문장에서 똑똑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나라에서는 여태껏 파룬궁을 금지시킨 적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하루 밤 사이에 변하였는가? 이 정부는 도대체 어찌된 판국인가?

곧이어 전국 각지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에서 천지를 뒤덮을 듯이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였다. 전 중화(中華)의 대지는 요언에 휩싸였다. 한 뙈기의 오염된 공기는 그야말로 “검은 구름이 성을 뒤덮어 성이 무너질 것 같은” 기세였다. 나의 온 마음은 울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대법이 까닭 없이 탄압을 받고 있음을 울었다. 나의 온 마음은 슬픔에 잠겼다. 슬픈 것은 다재다난(多災大難)한 중국인민들이 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정치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함이었다. 나의 온 마음은 외치고 있었다. 우리 민중들은 무엇 때문에 마음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이 하나의 자유, 이 하나의 권리마저도 박탈당해야 한단 말인가!

단체 법공부와 연공을 위해 집을 사다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개창(開倉)해주신 밖에서 단체연공하는 환경을 잃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한 끝에 괴로운 나머지 사저(師姐, 동문의 여자 선배)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큰 객실이 달린 집을 매입하여 단체로 법공부와 연공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전과 같이 그렇게 조용하고 상화한 연공환경이 있고 우리가 전과 같이 자유스럽게 쩐, 싼, 런(眞, 善, 忍)을 신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리하여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수많은 집을 둘러본 끝에 그 해 8월 8일, 나는 런허웬(仁和苑) 안에 있는 객실 면적 33평의 집을 샀다.

집을 사서 꾸미고 수리하는데 20여 만 위안을 썼다. 비록 집을 사는데 내가 여러 해 부지런히 모은 수중의 적금 전부를 썼지만 그래도 매우 기뻤다. 오직 단체 법공부와 연공하는 환경만 있다면 뒷일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돈은 나중에 또 벌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10월 10일, 아직 집을 꾸미고 수리하면서 온 가족이 다음 달 새집에 이사하는 일을 상의하고 있을 때, 단지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둥퉁쑨(東通順) 파출소에 의해 압송되어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지옥, 청두시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상무조보 (商務早報) 사건

1999년 10월 1일, 50주년 경축일에 청두 『상무조보 (商務早報)』는 파룬궁을 10대 주요사건의 하나로 뽑았을 뿐만 아니라 또 “x교”라고 말했다. 보도는 완전히 옳고 그름을 뒤바꾸고 흑백을 헛갈리게 했는데 그야말로 틀림없는 정치 폭력단의 허튼소리다. 나는 보고 난 후, 신문을 가지고 차를 운전하여 5명의 동수와 함께 『상무조보 (商務早報)』편집장실에 도리를 따지러 갔다. 편집장이 자리에 없어 신문사 직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하자 그들은 기자를 불러 우리들의 말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비디오 촬영을 하게 하였다. 그때 우리는 모두 기뻐하며 순진하게 그들이 파룬궁에 대해 정면보도를 하는 줄 알고 그들에게 우리가 대법을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 이득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다. 결국 신문사에서 둥퉁쑨(東通順) 파출소에 알려 우리를 불법적으로 파출소에 붙잡아가 아침 5시까지 심문하였으며 또 밤중에 불법적으로 우리를 쥬루(九茹)촌 구치소로 보내어 각기 15일을 구류시켰다. (『상무조보』는 후에 악의 보응을 받아 사악끼리 서로 악을 행하던 중, 2001년 전 쓰촨성위(四川省委) 서기이며, 파룬따파(法輪大法)와 대법제자를 박해한 사악자인 저우융캉(周永康)에 의해 폐쇄 되었는데, 그 원인은 『상무조보』의 두 명 기자가 난충(南充)시 모(某)현, 부현장이 차를 운전하던 중 사람을 치어 죽인 후 뺑소니 친 사건을 보도해서였다. 저우융캉은 『상무조보』가 공산당원의 추행을 폭로한 것에 대하여 불만이 대단하여 고함쳤다. “우리의 신문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 이리하여 쓰촨(四川)에서는 신문을 크게 통폐합하였는데 『상무조보』는 이때 사라졌다.)

그날 밤 내내 가랑비가 내려 춥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고단하기도 했던 나는 캄캄한 방에 들어서자 널판자 세 쪽을 이어 붙여 벽에 기대어 놓은 간이침대에 쓰러졌다. 베개도 없고 이불도 없어 움츠리고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하였는데 경찰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한참 뒤치락거리다가 얼떨결에 죽밥을 한 사발 받아왔다. 너무 뜨거워 내려놓고 식혀서 먹으려고 하는데 경범(輕犯) 죄수가 내게 말했다. “빨리 먹어요. 몇 분 있으면 사발을 거두러 옵니다. 만약 채 먹지 못하면 욕을 먹지요. 여기 경찰들은 아주 사납습니다.” 나는 듣고 나서 억울하여 눈물이 나왔다. 왜 참말을 했는데 여기에 갇혀야 하는가? 나는 늘 아들에게 가르치기를, 어릴 때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해도 갇혀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정부는 우리더러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인가?

*경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총이다

구치소에서 경찰은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 강제로 우리에게 『모택동선집』을 읽으라고 했다…… 우리는 경찰에게 말하였다. “모주석은 말씀하시기를
1)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2) 인민들이 말한 것이 훌륭하다면 우리는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파룬궁 문제에서 우리는 모두 직접 실천을 거쳤으며 파룬궁은 몸과 마음의 건강에 백 가지 이익만 있지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민원 청원실은 공안국으로 변하였습니까? 무엇 때문에 청원의 길은 감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습니까?”

슝(熊) 부소장은 말했다. “우리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총을 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장쩌민을 가리킴)의 돈을 받았으니 그가 우리에게 뭘 하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지요……”

우리는 종일 캄캄한 방에 갇혀 있었는데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전화도 하지 못하게 하고 일반 구속자의 권리마저도 없었으며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었다. 점심은 흙이 묻은 썩은 감자를 조금 먹고 저녁은 아침과 점심에 먹다 남은 반찬과 밥을 먹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개수통에 버린 밥을 한데 모아 끓여 “팔보죽(八寶粥)”이라고 하면서 주는데 이것이 바로 장(江)씨 집단이 말하는 “중국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의 진상이다. 반 달간을 시달림 받아 나는 이미 여위어 몰골이 바뀌었다. 집식구들이 보고는 상심하여 나를 위해 남 몰래 눈물을 흘렸다.

*핍박으로 직장을 잃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더 이상 주식을 하지 말 것이며 나머지 30만 위안의 주식을 내다 팔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친구의 외삼촌이 말하기를 “지금은 주가가 너무 낮기 때문에 매주(買主)를 찾기가 쉽지 않다, 네가 집 내부 장식을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면 먼저 조금 꺼내 쓰면 될 것이고 주식은 먼저 나에게 맡겨두었다가 천천히 매주를 찾아 팔면 된다.” 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주식을 몽땅 그에게 주었다.

몇 달을 이어오면서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여전히 계속 쉴 사이 없이 파룬궁을 모함하였다.

1999년 11월, 나는 깐또(干道) 지휘부에 영수증을 끊으러 갔는데, 이씨 언니가 사무실에서 내게 직접 말했다. “우리 직장에서 만약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을 조사해내면 직장은 10만 위안을 벌금 당하게 되오. 쇼중(小鍾), 자넨 비록 직장 직원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여기에서 업무를 보고 있지 않소. 우리는 위로 노인이 있고 아래로는 자식들이 있는데 직장을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자네는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수련을 하지 말아요. 만약 자네가 계속 수련하겠으면 우리도 더는 자네에게 업무를 맡길 수 없으니 자네가 우리들의 입장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당신이 봐요. 매일 석간신문들은 근본 볼만한 것이 없어요. 모두 두 이씨가 차지했습니다. 하나는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임)이고, 하나는 당신 사부인 리훙쯔(李洪志)이지요.” 마지막에 그녀는 또 말하기를 “당신은 수련하지 않겠다는 입장표시를 해요.” 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이(李) 언니, 내가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서 이득을 얻은 일을 당신들은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텔레비전에 한 말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것을 당신들도 응당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쩐, 싼, 런(眞,善,忍)을 수련하므로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돈을 벌기 위해 양심을 어기고 대법에 미안하고 사부님에게 미안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내가 왜 거짓말하기를 싫어하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 1 강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가(道家)는 眞(쩐)、善(싼)、忍(런)을 수련함에 진(眞)을 중점으로 수련한다. 그러므로 도가는 수진양성(修眞養性)을 하여 참말을 하고, 참된 일을 하며, 참된 사람이 됨으로써 반본귀진(返本歸眞)하여 최후에 진인(眞人)으로 수련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忍)도 있고 선(善)도 있는데, 중점을 진(眞)에 두고 수련한다. 불가는 眞(쩐)、善(싼)、忍(런)의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선(善)을 수련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수련해 낼 수 있다. 자비심이 나오면 중생을 모두 고생스럽게 보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려는 소원을 품게 된다. 그러나 진(眞)도 있고 인(忍)도 있는데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 이 한 법문은 우주의 최고 표준-眞(쩐)、善(싼)、忍(런)에 따라 함께 수련하므로 우리가 연마하는 공(功)은 대단히 크다.”)

이러한 정황과 압력, 이러한 정책 하에서, 나는 9년간 지속해온 거래처를 부득불 떠나야 했다. 이전의 매달 만 여 위안 수입이 갑자기 없어지게 되었다. 세 식구인 우리 가정은 어떻게 생활하겠는가? 아이가 학교를 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장(江)씨 집단이 파룬궁 수련생들을 핍박하여 신념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경제적인 압박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절대로 수련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주 진리의 큰 길에서 영원히 영원히 걸어 나갈 것을 결심하였다.

제 2 장 힘겨운 청원의 길

*처음 청원하러 가다

불공평한 대우 하에서 1999년 12월 3일, 나는 여덟 살 되는 아들을 데리고, 청두 안캉(安康) 병원(정신병원)에서 박해를 받다가 나온 동수와 함께,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고 내가 연공을 한 후, 몸과 마음에 이득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정부에 반영하기 위해 북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대법제자들의 북경 청원 길을 가로 막는 사복 경찰들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버스를 타고 맨양(綿陽)에 갔고, 맨양에서 기차를 타고 쩡저우(鄭州)까지 갔으며, 쩡저우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스쟈쫭(石家庄)에 간 다음, 또 800위안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간신히 북경 라이광영(來廣營)의 임시로 거주할 연공장에 와서는 전국 각지 대법제자들과 교류한 후, 마침내 청원하러 가려고 했다. 12월 6일 아침 북경에 도착하였다. 아들은 돌아가서 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그는 다른 한 동수와 함께 천안문에 가서 세인들에게 파룬따파(法輪大法)의 공법을 시범 보였다. 나는 북경 교외 라이광영에서 이틀간 묵었다가 다시 청원사무실에 찾아가려고 생각했다. 나는 아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한 모르는 사람이 우리에게 (나를 제외하고 또 외지에서 온 3명의 수련생이 있었다)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가 그렇다고 하자 그 사람은 핸드폰으로 사람을 오라고 통지하고는 우리를 붙들어 라이광영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는 10시간 후, 북경주재 쓰촨(四川) 사무소로 옮겼다.

*북경주재 청두(成都) 사무소

북경주재 사무소 뒤는 사합원(四合院 – ‘정방(正房)’ 과 동서(東西)의 집채 및 뒤에 앉은 네 채로 된 집)인데 3면은 작은 집이며 한 면은 문이다. 동수들은 여기 온 후, 모두 작은 방에 갇혀 몸을 수색 당했다. 그들은 몸을 수색할 때, 나를 작은 칸에 데리고 가서 나에게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옷을 몽땅 벗으라고 하였다. 불법 몸수색을 책임진 여자가 입은 옷은 종업원복이었다 추측으로 북경주재 사무소 영빈관의 종업원 같았다. 나와 한 여 수련생이 같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의 대법책과 조금밖에 없는 몇 백 위안의 돈을 수색해 갔으며, 다른 한 동수의 몸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찾아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나는 그들이 이 번호로 동수들에게 박해를 하지 못하도록, 한입에 종이쪽지를 삼켜버렸다. 악인 청두 1처장, 펑쥬위이(발음대로 썼음)는 즉시 성이 왕씨인 보안요원에게 명하여 나를 수갑 채워 밖으로 끌고 나가 북경주재 사무소 문밖 돌사자에다 채워놓았다. 그때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이렇게 채운 채로 나를 불법 심문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죄가 없다. 나의 청원은 국민의 합법적인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지금 여기에다 묶어 놓았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핍박하여 누가 청원하러 가는 것을 조직했는가 말하라고 하였으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어떠한 조직도 없으며 모두 자발적인 행위다.” 그들은 나에 대해 방법이 없자 나를 6호실에 가두었다. 경찰이 불법으로 나를 심문할 때, 중차이이(鐘才一)가 나의 아들인지를 물었다. 아들도 여기에 갇혀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와 아들을 갈라서 5일 동안 가둔 후, 우리를 청두로 보내려고 할 때에야 나는 비로소 아들과 만났다. 떠나는 날 오후 3시 경에 펑쥬워이 처장이 또 나에게 “30분 내에 당신이 그날 삼켜버린 전화번호를 말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청두에 전화 한 통만 해도 최소한 당신은 3년 판결을 받을 수 있소.” 라고 겁을 주었다. 그가 무엇을 말해도 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지난 후, 아들이 내게 물었다. “엄마,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그 경찰 아저씨가 왜 안 오지요!” 그가 한 말은 나를 겁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아들은 나에게 나와 헤어질 때의 마음과 헤어진 후에 겪은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날 엄마가 우리를 차 타는데 까지 바래다 줄 때, 나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워 말을 하지 않았어요. 역전에 거의 다 왔을 때, 나는 발걸음을 점점 느리게 하여 시간이 조금이라도 천천히 지나가기를 바랐으며,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나에게 “아들아, 돌아가서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또 확고하게 수련해야 한다.”라고 했을 때 나는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여 흐느껴 울면서 “예” 하고 대답했지요. 그때 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워 말로서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도 엄마에게 물었지요. “엄마, 언제면 돌아와요?” 엄마는 “나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울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여덟 살인 나는 이렇게 생이별 하듯이 엄마와 헤어졌는데 나는 이후 엄마와 또 만날 수 있을지를 잘 몰랐습니다. 나의 눈앞은 이미 흐릿하였습니다. 나는 차에 올라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고 점점 멀어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고, 멀어져 갔습니다……

나와 네(聶) 아저씨는 차를 타고 천안문에 도착하여 긴장한 심정으로 천안문 광장 중앙으로 걸어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제 2 장 공법(포륜)을 연마하였습니다. 연공을 시작한지 1분도 안 되어 나는 경적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보니 주변의 행인들이 나와 네(聶) 아저씨가 연공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경찰차 한 대가 나는 듯이 달려와서 우리 앞에 멈춰 섰습니다. 차에서 몇몇 경찰이 내려오더니 우리를 경찰차에 끌어올렸습니다. 내가 보니 차 안에는 붙잡힌 대법제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 경찰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너 이 어린 녀석이 여긴 뭘 하러 왔어?” 내가 “호법(護法)하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경찰은 말했습니다. “호법하러 왔다고? 머리카락을 보호하러 왔단 말인가?” 나머지 경찰들도 나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나에게 묻던 경찰이 나의 뺨을 때려 나는 즉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 젊은 여 수련생이 나를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울면 안 돼요, 대법 어린 제자는 울지 않지요, 사부님께서는 어린 제자를 가장 예뻐하신데요.” 경찰은 아주 빨리 우리를 한 커다란 집으로 싣고 갔습니다. 큰 집의 정면 벽은 모두 쇠 난간으로 만들었으며 안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었고 집 정도의 길이이며 벽에 붙인 침대가 있었습니다. 위에는 매우 많은 동수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대략 반시간 머물러 있었는데 경찰은 다시 나와 네(聶)아저씨를 북경주재 사무소의 한 호실로 보냈습니다. 방에는 10여 개의 의자와 책상이 있었습니다. 잠 잘 때는 의자를 한데 모아 침대로 썼는데 네(聶) 아저씨는 그의 옷을 벗어 나의 몸에 덮어주었습니다. 한번은 꿈속에서 떠드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습니다. 원래는 한 경찰이 네(聶) 아저씨를 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찰은 네(聶) 아저씨보고 나에게 옷을 덮어주지 말라고 말하면서 네(聶) 아저씨의 뺨을 때렸습니다. 경찰이 간 후, 나는 네(聶) 아저씨에게 방금 뺨 맞은 것이 아프지 않은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방금 얼굴이 얼어서 맞아도 감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좋은 마음,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 영하 몇 도 되는 날씨에 어린아이에게 옷을 덮어주었다고 하여 경찰에게 뺨을 맞다니 세상에 어디 이런 도리가 있습니까!

그 방에는 종일 전등을 켜고 있었으며, 커튼으로 가리워져 창문 밖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느 때가 낮이고 어느 때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며 내가 여기에서 며칠 있었는지는 더욱 몰랐습니다. 하루는 네(聶) 아저씨께서 “너희 어머니가 오셨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디에 계신지 다급히 물었습니다. “밖에 계신다.” 나는 얼른 커튼 모서리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또 다시 내려앉았습니다. “너희 어머니는 이미 호실로 들어가셨다.”고 네(聶)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다시 또 이틀쯤이 지나 내가 석방되어 나와 엄마를 보았을 때, 얼른 엄마 곁으로 뛰어갔지요.“

아들의 말을 듣고 난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했으며 아들의 쇠약한 몸을 바라보니 마음속에서 애처로운 마음이 우러나왔다. “아들아, 네가 참 잘 했구나!”

한 경찰이 청두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가는 김에 우리 네 명의 대법제자를 압송해 갔다. 경찰은 강제로 우리 네 명의 대법제자에게서 매 사람마다 50위안씩 받아냈는데 말로는 북경주재 사무소에서 북경 기차역까지의 차비라고 했다. 경찰은 우리를 북경 기차역까지 압송해온 후, 강제로 우리 돈에서 두 장의 침대표 값을 제했다

*진상을 알게 된 승무원

기차 칸에서 경찰은 휴식의 편의를 위해, 침대차 한 칸을 맡았다. 양쪽 상, 중, 하에 모두 6개 좌석이 있는데 우리 4명 대법제자는 자신들이 돈을 내어 2개의 자리를 썼다. 밤에 경찰이 잠 잘 때, 한 경찰이 우리를 지키고 아울러 우리를 수갑으로 쇠 침대에 채워놓았다.

어느 날 아침, 몇몇 승무원들이 우리가 파룬궁이라는 말을 듣고 문의 커튼을 열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경찰은 말하기를 “조심들 하세요, 파룬궁은 모두 공(功)이 있어 당신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지요.” 라고 했다. 한 승무원이 말했다. “사실 우리 열차 팀(車務段)에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누나가 있는데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주 좋아 우리는 모두 그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부에서 파룬궁을 반대하자 그녀 역시 영문도 모르게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이틀 후 아침 7시경, 기차가 청두에 도착하자마자 벌써부터 와서 우리를 기다린 경찰차에 실려 바로 청두시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에 압송되었다. 그곳의 고음 스피커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귀청을 찢을 듯한 큰 소리로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는 요언을 방송하였다. 보안요원들은 우리를 엄밀하게 감시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점심 때 경찰은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저녁식사 후, 그들은 우리를 큰 방에 가두어 놓고 “세뇌” 시켰다. 나는 그들이 지껄이는 거짓말이 듣기 싫어 일어서서 연공을 하였다. 보안요원이 발견한 후, 나를 발로 차서 밖으로 끌어내 강제로 우리더러 가죽 옷과 외투를 벗으라고 하고는 찬바람에 얼게 하였다. 보안요원들은 비바람을 막는 비닐 천을 걷어치우고 우리를 지켰는데 비록 그들이 한편 우리를 지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선로 요리를 끓여 먹었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그들도 추워서 할 수 없이 비닐 천을 닫고는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오래 동안 땅바닥에 쪼그려 앉게 하였다. 시간이 길어지자 다리와 발이 마비되기 시작했으며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려고 하였다. 나는 얼른 손으로 옆의 쇠틀에 지탱하며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또 쪼그리고 앉았다……

*쥬루(九茹)촌 구치소

이틀간 강제적으로 “세뇌” 시킨 후,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송치하여 불법적으로 15일간 감금하였다. 불법 감금된 대법제자들이 너무 많아 여자 감방이 모자라서 남자감방을 비워 여자 대법제자를 감금하였다. 구치소 안에 고음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귀청을 찢을 듯한 큰 소리로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는 거짓말을 방송하였다. 이 더러운 환경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 미신을 다시 논함 』중에서 말씀하신 법이 생각났다.

“대법을 수련하는 수련생의 우주 진리에 대한 인식은 이성(理性)과 실천(實踐)의 승화로서 인류가 어떠한 입장에 입각하여 인류사회의 일체 이론보다 높은 우주 법리를 부정하든지 막론하고 모두 헛수고이다. 특히 인류사회의 도덕이 전면적으로 붕괴될 때 위대한 우주는 다시 한번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사람에게 이 최후의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인류가 반드시 극히 소중히 여겨야 할 희망이었건만 사람은 도리어 사욕을 위하여 우주가 인류에게 부여한 이 최후의 희망마저도 파괴하였는바 천지(天地)로 하여금 크게 노하게 하고 있다. 무지한 사람은 여전히 각종 재앙을 자연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주는 인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단지 가장 낮은 한 층의 생명존재의 표현형식일 뿐이다. 만약 인류가 우주 이 한 층에서의 생존표준을 잃어버린다면 그러면 우주의 역사에 의하여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인류여! 깨어나라! 역사상 신(神)의 서약(誓約)은 실현 중에 있는 것으로 대법은 일체 생명을 가늠하고 있다. 인생의 길은 자신이 걷는 것이다. 사람 자신의 일념도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소중히 여기라, 우주의 법리는 바로 당신들 앞에 있다.”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포기하고 그들의 거짓말을 접수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또 우리를 핍박하여 그들이 뜯어 고친 “세뇌”된 대법제자의 문장과 그들이 뜯어 고친 “세뇌”된 대법제자의 비디오를 보게 하였다. 장기적으로 캄캄한 방에 갇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우리들에게 법공부도 하지 못하게 하고 연공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경찰은 늘 대법제자들을 불러가서 전기 충격기 “맛”을 보여주었으며 끈으로 몸을 묶어 비를 맞게 했다. 장쩌민의 후원으로 말미암아 경찰들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아주 사나웠다. 쥬루(九茹)촌 구치소에서 왕씨 수련생이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에게 전기충격을 가한 후, 밥도 먹지 못하게 하고 비가 오는데 끈으로 묶어 내몰아 까무러치게 하였다. 그러나 사악의 일체 표현은 우주의 진리를 알고 있는 대법제자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헛수고이다. 반달 후면, 이미 2000년 원단이다. 청두시 룽탄쓰 파출소의 탕씨 경찰이 나를 데리러 왔는데 나는 나를 집에 돌려보내 설을 쉬라고 하는 줄로 알았다. 결국 나를 다시 룽탄쓰 파출소로 데려갔다. 탕씨 경찰이 나보고 계속 수련하지를 물어 나는 “수련하겠다.(煉)” 고 말했다. “煉” 이 한 글자 때문에 점심 식사 후, 그가 형사구류 통지서를 작성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청두시 제 2 간수소(롄화촌)에 보내 한 달간 형사구류를 시켰다. 내가 들어가서 보니 한 감방에 20여 명 대법제자가 갇혀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당번을 서야 했으며, 매일 반드시 침대에 앉아 형법 (刑法)을 학습하여야 했다. 만약 연공하는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중형(重型) 족쇄와 수갑을 채웠다. 나는 싱천(邢琛, 여자, 20여세, 대학생)의 두 발과 두 손이 이미 수갑과 족쇄에 시달려 붓고 검붉은 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는데 아예 밥을 먹고 잠을 잘 수가 없었으며 화장실에 가서 생리대를 바꾸는 일마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단식으로 박해를 제지하는 것을 보면 콧구멍을 통하여 야만적으로 음식물을 강제 투입시키는데 이렇게 할 때마다 대법제자는 죽을 지경이다. 일주일이 되어서야 감방 두목들을 불러서는 통일적으로 물건을 한번 사온다. 게다가 가격도 밖의 슈퍼마켓보다 2-3배나 비싸다. 불법 형사구류 한 달 만기가 되면 바로 구정이다, 나는 마음 놓고 집에 가서 설을 쇨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룽탄쓰 파출소 탕씨 경찰이 또 와서 나를 보고 아직도 수련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수련할 겁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다시 또 나를 완낸창(萬年場) 파출소에 맡겼다. 그는 내가 룽탄쓰의 소도시 호구(戶口)를 샀고, 집을 사고, 살고 있는 집은 모두 완낸창에 있으므로 사람과 호구가 갈라져 있음에 속해 나는 마땅히 완낸창 파출소에 속한다고 했다. 완낸창 파출소에 온 후, 나는 계속해서 “수련한다.” 고 말했다. 그들은 또 나를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보냈다…..나는 이렇게 축구공을 차듯이 구치소에서 파출소로 가고 또 파출소에서 구치소로 갔으며 마지막에는 또 간수소로 갔는데 여태껏 집으로 가지 못하게 했으며 여태껏 목욕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나는 북경에 합법적으로 청원을 갔다가 문마저도 찾지 못하고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감금 당했다. 1999년 12월 7일에 내가 북경에서 체포되어서부터 2000년 3월 2일까지 반복해서 6차례 감금하였다(북경주재 사무소,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구류소, 간수소를 포함) 모두 96일 감금 당했는데 중간에 한 번도 감금장소를 떠나지 못했다.

바로 법에 따라 북경에 청원하러 간 것 때문이다. 하지만 민원접수 사무실의 문마저도 찾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불법적으로 형사구류 1차례, 치안구류 3차례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은 아직도 계속 감금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장(江)xx가 부르짖고 있는 “중국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에 발생한 엄중하게 국민이 마땅히 향유해야 할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고 인신의 자유를 침해한 추잡한 행위이다.

*동생이 경찰 웨이다핑(魏大平)에게 3,000위안을 뺐기다.

간신히 2000년 3월 2일까지 견뎌왔다. 또 한번 불법구류 만기석방일이 돌아왔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어떻게 하든지 더는 경찰에게 무기한으로 감금되어서는 안 되며, 어떻게 하든지 북경에 가서 청원을 해야 하고, 상급 정부로 하여금 하급 경찰들이 우리가 이런 연공을 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인신의 자유와 권리를 어떻게 침범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오후 3시 경, 경찰 웨이다핑이 다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예전처럼 이불을 안고 나갔는데 웨이다핑을 만나자 그가 나에게, “중팡충, 이불을 여기에다 놓아. 어차피 조금 있다가 또 돌아 올 것이니.”라고 했다. 내가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듣고 나서 기뻐 말했다. “설득되었나. 수련을 그만 두기로 했는가?” “내가 여기에서 한 번 갇히면 거의 석 달씩인데 매일 도둑질하고 빼앗고 몸 파는 사람들과 한데 갇혀있다 보니 그런 악담들을 듣기만 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져요. 집에 돌아가 조용히 생각해 보겠어요.” 그는 나의 말투가 어쩌다 변하고 “전화(轉化)”할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내가 이불을 파출소로 가지고 가는 것에 동의 하였으며 내 동생더러 3,000위안의 보증금을 가지고 와서 나를 데려가라고 전화로 통지하였다.

동생이 쏜살같이 2,000위안을 마련해 가지고 왔다. 웨이다핑은 말하기를 “3,000위안에서 한 푼이 모자라도 안 된다, 이 돈은 당신 둘째 누나가 다시는 북경에 가지 않겠다는 보증금이니 당신 둘째 누나가 만약 또 북경에 간다면, 우리는 이 3000위안을 당신 누나 데리러 가는 비용으로 쓰겠다.” 웨이다핑은 영수증을 떼어주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내 동생에게 그가 쓴 메모지에 사인을 하라고 하였다. 어찌할 방법이 없어 동생은 또 1000위안을 빌려와 밤 9시경에 나를 데리고 나갔다. 떠나기 전 웨이다핑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반드시 매일 아침 파출소에 와서 신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북경에 다시 청원하러 가기 위해, 나는 마음을 어기고 아침 9시에 신고하러 가겠다는 쪽지를 썼다. 나중에 나는 이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엄정성명을 써서 내가 쓴 쪽지를 폐지한다고 그에게 직접 알려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내게 말했다. “둘째 누나, 나는 모든 방법을 다 썼는데도 누나를 구해내지 못했는데 오늘 끝내 나왔으니 우리 온 식구가 함께 가서 신선로 요리나 먹어요.” 집에 오니 밤 12시 넘었다. 동생은 소파 위에서 자면서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또 북경에 갈까봐, 내가 또 경찰에게 붙들려 나오지 못 할까봐 두려워서였다. 내가 ”동생, 이젠 그만 집으로 가보렴, 올케가 집에서 기다리겠는데.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올케가 걱정할 것이네.”라고 하며 안심시키자,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동생은 불안한 심정을 지니고 나를 떠났다.

(계속 이어짐)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8일
문장갱신: 2004년 7월 24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8/795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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