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논-픽션: 질풍경초 (疾風勁草) (1)

글/중팡충(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16일】

머리말

내 이름은 중팡충(鐘芳琼, 중밍팡,(鐘銘方)이라고도 불렀다.), 올해 39세의 여자로서,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얼환루(二環路) 둥싼돤(東三段) 36호 런허위안(仁和苑) 4동 (원래 27동) 3층 7호에서 거주하고 있다. 〔원적(原籍): 젠양(簡陽)시 윈룽(云龍)진 양밍(楊鳴)촌 7사(社)〕. 원래 가진 자산은 70만 위안 이상이고, 월수입이 1만 위안 이상인 개인사업자(個體戶)였다. 오른쪽 하지에 선천성 혈관종양(血管瘤)이 있었는데 30 여 년간 줄곧 병원치료를 해보았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1995년 육군종합병원에서 수술 할 때, 혈관 일부를 뽑아버리기까지 했으나 치료하지 못했다. 1997년 화시(華西)의과대학의 30여명 전문가들이 진단한 결과, 세계적인 난치병으로서 국제적으로도 아직 치료방법이 없다고 모두 다 인정하였다. 파룬궁을 두 달 연마했는데 혈관종양이 기적같이 사라졌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병이 없는 행복을 느꼈다. 1999년 7월 20일, 장(江)씨 집단이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위반하여 파룬궁을 미친 듯이 탄압하기 시작한 후, 나는 천천만만 대법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고통을 받았는데, 38개의 기관(單位)이 나에 대한 박해에 참여하여 불법감금을 하고 약 29차 743일에 걸친 노동교양을 시킴으로써 온갖 혹형의 시달림을 받았다. 현재는 핍박에 의해 살 곳을 잃었다……

목차

머리말

제 1 부 고난의 인생

제 1 장: 쓰라린 어린 시절
자줏빛 모반(胎記)
의사를 찾고 약을 수소문하다
고난의 진창길

제 2 장: 간난신고의 창업
실패한 첫 사랑
15위안을 가지고 청두(成都)로 가다
생명으로 돈을 바꾸다
실패한 혼인
압력이 있어야 동력이 있다
실패한 수술
수련이 싹트다

제 3 장: 절망의 인생
약을 달고 살다
세계적으로도 고칠 수 없는 혈관종양
악화
약간의 위안
혼비백산

제 2 부 새로운 삶

제 1 장: 연을 맺다
사저(師姐)의 변화
대법이 미혹을 타파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

제 2 장: 대법이 나에게 제2의 생명을 주었다
신기함을 체험하다
천상에 한 무리 선녀가 오가다
온 집안이 이득을 얻다
세계적으로 고치지 못하는 혈관종양이 사라졌다
옥같이 깨끗한 마음

제 3 장: 홍법
대법이 고향에 전해지다
시련이 닥치려고 하다

제 3 부 11차례 구류되다

제 1 장 탄압 초기(初期)
7.20. 대규모 체포
단체 법공부, 연공을 위해 집을 사다
상무조보(商務早報) 사건
경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총이다
핍박으로 직장을 잃다

제 2 장 힘겨운 청원의 길
처음 청원하러 가다
북경주재 청두(成都)사무소
진상을 알게 된 승무원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쥬루(九茹)촌 구치소
동생이 경찰 웨이다핑(魏大平)에게 3,000위안을 뺐기다.

제 3 장 다시 청원하러 가다
층층의 가로막음을 피해가다
하나하나의 방어선을 돌파하다
민원접수처가 공안국으로 변하다
장(江)씨 집단이 봉건왕조의 연좌제(連坐制)를 이용하여 지역경찰을 연루시키다

제 4 장 새빨간 거짓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다
시비가 전도된 쓰촨(四川)텔레비전 방송국 소식
구류소에 노(老) 홍군(红军)을 가두다
장기간 반복적으로 감금되었던 나날들
집단단식과 야만적 음식물 투입
어머니의 조우(遭遇)

제 5 장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밝히다
대법을 모욕하는 사진 전시실 입구에서 진상을 알리다
강제로 집을 수색하다

제 4 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받다

제 1 장 진상은 감출 수 없다
길 잃음(迷失)과 귀정(歸正)
위선적 연기
공산당이 좋다?
살아있는 광고

제 2 장 대법입자
감금되다
정념으로 마굴에서 뛰쳐나오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수련한다

제 3 장 여파가 가라앉지 않다
또 구치소에 들어가다
사악이 수단을 다 써도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다
신분증 풍파

제 5 부 나무가 조용히 있고자 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제 1 장 정념으로 경찰의 악행을 제지하다
족제비가 세배를 하다
꿈에서 금방 깨어난 어린 이씨(小李) 간사(幹事)
떳떳치 못한 경찰
수련은 만에 하나가 없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제 2 장 인권박해
행동을 감시하다
인신자유를 제한하다
30만 위안이 11,500 위안으로 변하다
연루
온갖 생트집을 잡아 방해하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협하다
불법으로 집을 수색하고 감금하다

제 6 부 대법 중에서의 바른 믿음

제 1 장 도깨비 세계
경찰과 강도
개가 여동빈을 물다
모두 장쩌민이 해친 것이다
사형상(死刑床)
살 곳을 잃다

제 2 장 혹형 및 학살
특무와 조우하다
정념의 위력
반죽음이 되다
백가지 고생이 한 번에 들이닥치다

제 3 장 신이 창조한 기적

후기: 나는 당신에게 말하련다

부록:

제 1 부 고난의 인생

머리말: 수련하기 전, 나의 염원은 한사코 돈을 벌어 병을 치료하고 곧 마비되어 침대생활을 해야 하는 나를 위해 일체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제 1 장 쓰라린 어린시절

*자줏빛 모반(胎記)

1965년 8월 21일, 쓰촨(四川)성 젠양(簡陽)시 윈룽(云龍)진 양밍(楊鳴)촌 7사(社) 묘즈산 (廟子山)기슭의 한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고난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인간 세상에 오자마자 나의 오른쪽 아랫도리는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온통 자줏빛 모반(胎記)[주1]이 가득했다. 자매 넷 중에서 나는 둘째이다. 아버지는 탈장수술로 중노동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친정이 가난하여 어릴 적에 병이 있어도 돈이 없어 치료를 하지 못해 왼쪽 발이 걸을 때 쩔뚝거리는 불구로 되었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언니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오른쪽 발과 다리가 불구로 되어 마을에 이름난 절름발이가 되었다.

원래 오른쪽 다리의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자줏빛 모반이 가득 나 있었던 나는 여섯 살 되는 그 해 여름, 무심결에 오른쪽 다리의 발등에서부터 허벅지, 엉덩이까지 검은 선 같은 혈관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렇게 되자 크게 놀라신 아버지는 얼른 돈을 빌려 나를 대대 (大隊) 의료기관과 윈룽향(雲龍鄕) 위생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했다. 돈도 많이 쓰고 약도 많이 먹었지만 반년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다. 겨울이 돌아와 날씨도 추워졌다. 하지만 불행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만은 춥게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픔은 돌보지 않고 나를 70리 밖 젠양시 한의원으로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결과 피가 안에서 죽어버려 혈맥이 통하지 않아 조성된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나에게 혈액순환이 잘되게 하는 대추만큼 큰 환약을 대량으로 조제해주면서 장기적으로 복용하라고 타일렀다. 약을 산 후, 아버지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버스를 타려면 비록 나는 키가 작아서 표를 살 필요가 없지만 아버지는 90전짜리 차표를 사야 했다. 그때의 90전은 한 농민으로 말하면, 절대로 작은 액수의 돈이 아니어서 아버지는 10여 일을 일해야 벌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여섯 살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갔는데 우리는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장장 8시간을 걸어서야 기나긴 70리 노정을 다 걸었다.

*의사를 찾고 약을 수소문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부터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거름을 줍고, 풀을 뜯으며 어른을 도와 돈을 벌었다. 중학교 다닐 때, 학교는 집과 8리 떨어진 시골에 있었는데 나는 아침에 광주리를 메고 학교를 가야 했다. 점심 때, 다른 학우들이 점심 잠을 잘 때, 나는 학교 부근의 야산에 가서 풀을 뜯었으며 오후수업이 끝난 후에는 길가의 풀을 뜯으며 집으로 갔는데 집에 도착하면 날은 이미 어두웠다. 저녁식사 후, 어른들이 잠들면 나는 그제야 콩알만 한 석유등잔 밑에서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숙제를 다 하고 나면 늘 한밤중이었다. 집 옆은 묘지였다. 여덟 살 때, 집 옆 채소밭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는데, 귀신의 음영이 늘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저녁이 되기만 하면 몹시도 겁이 나 라디오를 켜놓고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하면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모님은 사방으로 의사를 찾아 다녔는데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겨우겨우 치료를 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친정에서 러즈(樂至)현 다포취(大佛區)가에 한 침구의사가 있는데 의술이 아주 고명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부모님께서는 상의한 후, 한 점의 희망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시어 한시도 지체할세라, 나더러 가서 한번 시험해보라고 하였다. 열두 살이었던 나는 토요일마다 하교 후 혼자 3, 40리 길의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며 치료하러 다녔다. 의사는 말하기를 혈맥이 통하지 않아 침구로 치료해야 하며 강제로 혈액을 순환시켜 혈관 안의 혈액이 더는 응고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수많은 침을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모든 혈에 꽂았는데 나의 마음은 마치 천만 마리 모기가 무는 것 같으면서 붓고, 아프고, 저렸으며 온갖 감회가 나를 향해 엄습해 왔다. 이것도 모자라 의사는 조금 있다가 또 온갖 은침을 몇 번 씩 번갈아 놓아 고통과 괴로운 느낌이 좀 줄었다가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매번 침을 놓으면 반나절이나 걸렸지만, ‘아파도 참자, 병이 나으면 행복해질 거야.’ 하면서 나는 늘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고난의 진창길

돈을 벌어 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매번 학교에서 방학을 하면 나는 나보다 5, 6세 많은 언니들과 함께 10여리 밖에 가서 풀을 뜯었다.

어머니는 내가 나가면 저녁에야 돌아오며 점심밥이 없는 것을 생각하여 마음 아파하면서 나에게 생 땅콩이나 오리 알 하나를 주거나 어름사탕을 좀 주었다. 나는 내가 장기적으로 언니들을 따라 같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을 나서자 이런 먹을 것들을 그들에게 나눠주어 먹게 하였다.

한번은 하루 종일 3, 40근을 뜯었는데 열두 살 난 나는 허리가 다 눌리어 구부러졌지만 어두운 밤에 언니들을 바싹 따르면서 힘겹게 집으로 향해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서 진창길이 몹시 미끄러워 헝겊신을 신고 걷기가 불편하여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발에 가시가 박히는데 아파 울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땀과 빗물, 눈물이 한데 뒤엉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씩 가야 했다. 양밍(樣鳴)5대 룽중퉈산(龍重陀山)까지 왔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졸졸 흐르는 작은 강의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우리가 산에서 발을 내디딜 때의 첫 받침돌은 매우 멀리 있었는데 받침돌 위에 또 작은 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작은 돌은 임시로 올려놓은 것이어서 이가 맞지 않아 발을 위에 밟으면 돌이 움직이므로 정말 아주 겁이 났다. 산간마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받침돌에는 두터운 한 층의 누런 흙이 쌓였는데 누런 흙은 이미 빗물로 진흙이 되어 마치 기름을 칠한 것처럼 미끄러워서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낭떠러지로 떨어져 강에 빠질 수 있었다. 가고 또 가고 하여 끝내 어렴풋이 집의 등불이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나는 정말 더는 메고 갈 수가 없어 언니들더러 집에 가서 소식을 알려 부모님에게 나를 마중 나오게 하였다. 아버지께서 나를 마중 나왔을 때, 내 마음속의 고통은 마치 어느 사이인가 터져버린 터진 홍수마냥 삽시간에 쏟아져 내려 나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마음속으로는 깊이깊이 원망하였다. 이 몹쓸 다리병만 아니라면 내가 어찌 이런 고생을 하겠는가!

[주1 : 모반 (母斑) [명사] 선천적인 원인으로 살갗에 나타난 갈색 또는 검은 점이나 사마귀·주근깨 따위]

제 2 장 고생스레 창업하다

*실패한 첫사랑

18세 되던 그 해, 다른 사람의 소개로 나는 본 대대의 초등학교 동창과 연애를 했다. 그의 부친은 집짓는 일을 맡아 하였고 그 역시 철근 일을 하는 사람이며 견습생 하나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본 지방에서는 이름이 좀 있었다. 그때는 그의 집도 먹고 살만하여 우선 흑백텔레비전을 샀는데 연속드라마 훠위안자(霍元甲)를 방영할 때,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우리는 반년 동안 연애하였다. 열렬히 사랑하는 중에 그가 갑자기 나와 헤어지자고 하여 나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알지 못할 눈물만 쉴 새 없이 흘렸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는 동창한테서 나의 오른쪽 다리가 병이 있어 출산(生育)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또 이 몹쓸 다리 때문에 내 일생의 대사를 망쳤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시 나의 중학교 한반 동창과 연애를 하면서 늘 짝을 지어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갔다…… 나는 정말로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고향을 떠나 청두(成都)에서 사업을 개척하여 그와 누가 더 강하고 잘 되는지를 겨뤄 보기로 결심하였다.

*15위안을 가지고 청두(成都)로 가다

아버지는 내가 떠나는 것이 달갑지 않아 나에게 청두로 가는 왕복 차비 5위안만 주었다. 어머니는 나의 결심이 이미 결정되자 슬그머니 10위안을 빌려서 내게 주었다. 나는 15위안의 돈을 가지고 1985년 음력 2월 2일에 청두 와이시차뗀즈(外西茶店子) 훙써이뚜이(紅色一隊)의 친척집에 머물렀다.

내가 청두에 간지 얼마 안 되어 마침 영먼커우샹(營門口鄕)옷 공장(현재 西門역전)에서 근로자를 모집하였다. 몇 백 명이 지원했는데 60명을 모집했다. 언니가 재봉사였기 때문에 나는 어릴 적에 언니한테서 옷 만드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제일 첫 번째로 뽑혔을 뿐만 아니라 재봉 일을 몇 년 해야 갈 수 있는 생산라인에 직접 들어갔다. 나는 아침 5시면 걸어서 출근하여 연장근무를 하였다. 점심 때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면 나는 수빙(역자주: 밀가루에 기름, 설탕을 넣고 구운 파이)을 두 개 사서 먹고는 또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저녁에 남들은 모두 텔레비전을 보러 갔지만 나는 또 연장 근무하며 단추를 달았는데 밤중까지 하였다. 여름이면 더워서 신발을 신을 수 없어 종이판을 놓고 맨발로 밟을 수밖에 없었으며, 하루 종일 하고 나면, 두 발과 다리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붓는다. 매달 모두 두 몫의 월급을 받았으니 대략 60위안(元)이다. 다리를 고치기 위해, 나는 매 달 반드시 40위안을 저축해야 한다. 나는 평소의 생활에서 매우 절약했하였으며 그때 가장 싼 아동용 칫솔과 치약을 썼다. 나는 성이 장씨인 고향의 여동생과 둘이서 아침에는 1전 어치의 김치를 먹고, 점심은 5전 어치의 채소를 먹었다. 저녁이면 1층에서 수박장사가 ‘수박 하나에 10전이요.’ 라고 소리 높이 고함치지만 우리는 맛을 본적이 없다. 한두 달간 고기를 먹지 못해 속이 출출하여 기름이 많은 머리고기를 사서 먹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와 장씨 동생은 사무실의 사무용 책상 위에서 잤다. 밤이면 나는 책상 위의 것들을 정리해서는 책상을 밖으로 잡아당겨 안에서 자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책상은 우리 키보다 짧아 우리는 발이 있는 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발을 의자 위에 걸쳤다. 아침이면 또 책상과 의자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유리판, 잉크 같은 것들도 제자리에 놓는다. 이 기간에 나는 스후이제(石灰街)에 있는 훙광(紅光)병원에 가서 다리의 병을 보였는데 검사결과는 정맥이 굽어(曲張)져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이를 알게 된 후, 계란 50개를 메고 나를 보살피러 왔다. 병원에 침대까지 마련되었는데 다른 한 의사가 또 말하기를 이것은 신체에 영향이 없고 보기가 싫을 뿐이니 여름에 긴 치마를 입으면 되니까 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침대를 물리고 수술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또 청두 와이둥(外東) 공군병원에서 청소부 일을 하였고, 주옌차오(九眼橋), 로차오(老橋), 차오터우(橋頭)에서 물건을 판매하였으며, 류리창(琉璃場)거리에서 자동차 부품을 팔면서 아울러 담배장사도 하였다. 돈을 번 후, 나는 1987년 9월, 청두 와이난 (外南) 타이핑웬성(太平園省) 운전학원에서 화물차 운전을 배웠다. 1988년 3월, 운전학원을 졸업한 후, 매달 200위안의 월세를 내고 쓰촨 음악학원의 노해방(老解放) 화물차를 빌려 화물운반을 하였다. 1988년 연말, 노해방 중고차를 하나 사서 사장이 되었다. 처음에 원쟝(溫江) 진마허(金馬河)에서 모래를 운반하고, 룽징(榮 經), 펑(彭)현의 스원(思文), 워이웬(威遠)에서 석탄운반을 위주로 하다가, 나중에는 폐철, 시멘트를 운반하였다……

*생명으로 돈을 바꾸다

내가 노해방 자동차로 워이웬에서 석탄을 운반하던 나날들을 회상하면 마음이 몹시 괴롭지만, 고통스런 기억 중에서 나는 그래도 쓰라린 눈물을 머금고 이 한 단락의 일들을 써내련다.

돈을 많이 벌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개인이 경영하는 작은 탄갱에 가서 석탄운반을 하였다. 저울이 없어 무게를 달지 못하기 때문에 중량은 모두 추측하였다. 보통 추측한 5톤 석탄을 저울로 달면 7톤 정도가 된다. 이렇게 하여 화물 주인은 아주 많은 돈을 벌게 되며, 비교해서 운송비도 좀 더 주어야 한다. 워이웬현은 산이 많고 보통 간이 도로이며 길도 매우 좁아 차를 비킬 수 없었다. 자전거와 행인마저도 길옆에 서거나 혹은 적당한 곳을 찾아 길을 비킨다. 운전을 여러 해 한 남자 운전자마저도 한번 갔다가는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도로 한쪽에는 산이고 한쪽은 강인데 길바닥이 무게를 받아내지 못할 까 바, 가급적 차를 산 쪽으로 붙이면서 운전하였다. 울퉁불퉁한 크고 작은 돌 위로 한 단락 노정을 운전하면, 자동차 기름상자 고정 끈마저 흔들거려 끊어졌으며, 차의 짐받이는 바위 돌에 걸려 헤어졌다. 나는 놀라서 안색이 창백해졌으며 마음이 조마조마하여며 운전하였다. 나중에도 이때의 경력을 생각하면 울렁거림(動悸)이 가라않앉지 않는다. 그때 나는 겨우 23세였으며 면허증을 금방 손에 쥐어 운전경험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돈을 벌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죽음을 무릅쓰면서라도 가서 일을 해야 했다.

한번은 비가 내린 후 날씨가 개여 7톤 가량의 석탄을 싣고 산에서 내려올 때였는데, 사이드 브레이크와 풋 브레이크만 가지고는 차의 속도를 조절할 수 없어서 나는 또 변속기의 위치를 한 단계 더 조절하여 완전히 엔진의 반동력으로 차의 속도를 통제하였다. 길이 미끄러우면서 굴곡이 심하고 좁아 나는 온 신경을 기울여 운전하였으며 가장 좋은 기능을 발휘하였지만 그래도 앞바퀴가 길에서 벗어나 완두콩밭에 굴러 떨어져 낭떠러지 곁에 걸리게 되었다. 속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화물주도 비록 차를 따라다닌 시간이 길고 경험이 좀 있지만 그는 필경 운전을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차를 후진하는 것인데 이야말로 목숨으로 도박하는 것이다! 무게가 있는 차인데다가 또 산을 내려가는 중이고 게다가 차가 미끄러워 조금이라도 손발이 맞지 않으면 바로 차는 망가지고 사람이 죽는다. 설사 이러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큰 돌을 안아다가 차의 네 개 바퀴에 고인 다음 운전실에 앉아서 가속페달을 밟고 조심스레 클러치를 놓으면서 손, 발을 배합을 잘하여 엔진의 동력이 커지면서 차가 막 떠는 때를 기다려서 천천히 사이드 브레이크를 놓았다. 나의 마음은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으며, 진짜로 생사존망의 선에서 발악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보호로 마침내 한번에 차를 후진시켰다.

또 한 번은 물이 불은 후, 내 차가 탄갱에 거의 왔을 무렵, 길바닥이 물의 충격에 의해 일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길이 너무나 좁고 위험하며, 뒤로 얼마나 가야 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 하에서 나와 화물주인은 거기에 서서 한참 생각하였는데 마지막에는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기로 결정하였다. 화물주인이 말하기를 “쇼중(小鐘), 나는 괜찮소, 이미 40이 넘었고 아들도 컸으며 무엇이든 다 겪었으니깐, 그런데 자네는 젊고 가정도 아직 안 이루었소.”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죽으면 그만이죠, 모든 것을 다 끝내버리니 살아서 고생할 것도 없고 뼈 빠지게 돈을 벌어 병을 고칠 필요도 없지요.” 제대로 말하면 노반(路盤)이 근본 든든하지 못한데 조금이라도 잘 장악하지 못하면 차와 사람이 모두 홍수에 말려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담을 키워서 가속페달을 끝에까지 밟았다. 차는 관성으로 돌진하여 비로소 이 목숨 하나를 건졌다.

또 한번은 워이웬에 석탄을 실으러 갔다가 나는 시난(西南)민족학원에서 집을 허물고 남은 낡은 재료를 한 차 실었다. 험한 길을 하도 많이 다녔으므로 나는 우선 화물주인에게 정식 도로인가, 큰 차가 통과할 수 있는가를 물었는데 그는 모두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은 그렇지 않았다. 차가 금방 즈양(資陽)의 우황(武黃)지역까지 갔을 때, 밤중에 나는 도로가 갈수록 좁아지고 앞의 길은 산의 형태에 따라 닦은 간이도로임을 발견하였다. 나중에는 날씨가 갑자기 변하더니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차창에 쏟아 붓는 듯하고 와이퍼(wiper)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나의 차는 높이제한을 초과하여 짐을 실어 캐비지처럼 위가 무겁고 아래가 가벼웠다. 힘겹게 달리던 중, 갑자기 차가 기울어져 거의 뒤집어지려고 하였다. 이때, 나는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밖에는 큰비가 내리고 비가 새는 운전실에는 작은 비가 내렸다. 벌써 잠이 푹 들어버린 화물주인과 그의 손자를 바라보며 나는 혼자 눈물을 흘리면서 이 몹쓸 병이 있는 다리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장을 보러 가는 군중들이 당장 뒤집어질 듯 하는 차를 보고서는 제각기 떠들며 말했다. “어떻게 큰 차가 여기까지 다 왔나? 만약 차가 뒤집어지면 부품을 주울 수밖에 없지. 누가 감히 크레인을 몰고 여기까지 오겠는가!” 마지막에 나는 할 수 없이 길옆의 옥수수 대를 안아다 깔고는 다시 조심스레 차의 원심력에 따라 차를 바로 잡아놓아 비로소 재난을 모면하였다. 돈을 많이 벌어 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목숨으로 돈을 바꾸어야 한다. 매번 아침 3시쯤이면 나는 청두에서부터 차를 운전하여 워이웬의 개인 탄갱에 가서 순번대로 기다려 석탄을 싣고 나면 이미 밤중이며 밤사이 청두에 돌아와서 석탄을 부리고 또 그날 밤으로 가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되풀이하는데 늘 일주일 내내 침대구경을 해보지 못했으며 곤하면 차를 길옆 논이나 중흥구역에 세워놓고 핸들에 엎드려 자곤 하였다. 금방 꿈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또 뒤에서 오는 자동차 경적소리에 놀라 깨어 계속 앞으로 운전하였다. 과로로 인해 나는 수시로 쓸어 질 위험이 있었다. 심지어 줄을 설 때, 어떤 차는 자리를 차지하느라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어떤 운전기사는 가지고 다니는 뱀을 풀어놓는다. 뱀은 내 차가 있는 쪽으로 기어오는데 나는 놀라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어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더러 먼저 싣고 가게 한다. 고통 증에서 혼자 쓴 물을 마셔야 했으며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마음속의 쓴 물을 일기책장에 적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이렇게 썼다. “나는 마치 차바퀴처럼 돌면서 닳는데 어느 때에 가서야 끝인지. 차바퀴가 못에 찔릴 때가 바로 내가 병이 걸릴 때이며, 차바퀴가 터질 때가 바로 내가 인간세상을 떠날 때이다.” 아늑한 인간 세상에서 나는 늘 알고 싶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왜 인간 세상에 왔으며, 인간 세상에서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어떤 때는 점쟁이를 찾아간갔다. 점쟁이는 “당신은 명(命) 중에 귀인이 도울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나는 귀인이 나타나 나를 도와주기를 고대하였다.

실패한 혼인

첫 사랑의 실패로 말미암아 나로서는 더 이상 무엇을 고를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내 다리가 보기 싫고 병이 있는 것을 꺼리지만 않으면 되며, 결혼 후 아이를 하나 낳아서 다리가 출산(生育)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되었다. 결국 경솔하게 한 노동자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겨우 3살 난 아들이 아직 아무 기억이 없을 때 우리는 헤어졌다. 그래서 아들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존재란 없었다……

압력이 있어야 동력이 있다

아들을 잉태한지 얼마 안 되어 충칭(崇慶)현 시멘트공장 샤오융차이(肖永才) 사장의 시멘트를 운반하였다. 그의 것을 한동안 운반한 후, 그는 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내게 그의 친척 후스푸(胡師傅)와 장기적으로 그의 일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여 후스푸보다 한 차 더 운반하였다. 그래서 샤오사장은 후스푸에게 “후란왕(胡懶王, 게으름뱅이)”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사내 대장부가 임신한 여자보다 못하다고 말하면 후스푸는 질투하여 말하기를 “압력(壓力)이 있어야 동력(動力)이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렇다! 나의 마음에는 확실히 아주 큰 압력이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늘 돈을 반드시 많이 벌어 그때 가서 오른쪽 다리의 병을 고치겠다고 생각하였다. 오랜 병에는 효자가 없다고 하는데 내가 침대에 들어 눕게 될 때, 보살펴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아들을 낳고 3개월이 안 되어 다시 차운전을 시작했는데 밤을 새우며 물건을 운송하였다. 낮에는 시멘트를 운송하고 밤에는 구이(桂溪)시 위즈창(預制場) 리화청(李華成)의 벽돌을 운송하였다. 젖먹이기 편하도록 운전실 긴 의자에 눕혀둔 아들도 나와 함께 밤을 지새워야 했다. 쇼사장의 집에서 일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성실하고 선량하고 신용이 있다고 생각하여 1991년 말 청두 간다오(干道) 지휘부 재료처에 나를 소개시켜주어 장기적으로 시멘트운송을 하게 했다. 제 2 순환도로를 수리할 때, 지휘부에서는 나에게 제 2 순환도로 긴급 운송차량 “전용증(專用證)”을 발급하여 나는 이 “전용증”을 가지고 무제한으로 시멘트를 꺼내 과적한 채 1차선도로를 막힘없이 달릴 수 있었다. 공사현장에서 시멘트가 급히 필요한데, 내 차로 미처 운송이 따라가지 못할 때, 나는 현금으로 시(市) 자동차 운송 5대(隊)의 차량을 불러와 돌격하였다. 매 달 지휘부와 시멘트공장이 결제를 했는데 약간의 착오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줄곧 청두시 간다오 지휘부의 운송업무를 도맡아하였다……

실패한 수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사도 갈수록 잘 되었다. 그러나 오른쪽 다리의 병은 갈수록 심해져서 혈관이 엄지손가락 굵기만큼 밖으로 튀어 나왔다. 어떤 곳은 혹으로 되었는데 운전시간이 길면 혈관이 붓고 아프며 마작을 하고 텔레비전을 볼 때에도 혈액이 과다하게 아래로 흘러가 혈관이 파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리를 평평하게 놓아야 했다.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 1995년 설을 며칠 앞두고 청두 육군종합병원에 가서 검진하였는데 결과는 소인의 정맥곡장(小引靜脈曲張)이라서 급히 수술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설 연휴시간을 이용하여 담당의사 천충뎬(陳崇典)의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하였는데 수술을 하는 전 과정에서 하반신만 마취시켰기 때문에 나는 수술 칼, 집게를 쟁반에 놓을 때의 소리를 또렷이 들었으며 전반 상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의사는 나의 발목 외측(外側) 혈관과 허벅지 내측(內側)뿌리 부분 혈관을 잘라내고 묶은 다음 허벅지 혈관 바깥면의 살을 떼어 낸 후, 혈관을 뽑아내었는데 아픔을 참기가 힘들었으며 마음은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러나 내내 감히 움직이지는 못했다. 간신히 혈관을 뽑아낸 의사는 나에게 “이것이 바로 당신의 혈관입니다.” 라고 말했다. 닭의 목 줄기 같은 기다란 혈관을 유리컵에 넣으니 즉시 짧아지는 것이 보였다. 의사는 말하기를 “다시 대인(大引)을 갈라 보자.” 고 하였다. 천충덴 의사는 또 나의 발목 내측을 자르고는 “대인(大引)에는 곡장(曲張)이 없다.” 고 말했다. 이때 한 의사가 “혈관종양이야.” 라고 말하자 더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는 듣고 나서 오진으로 하지 말아야 할 수술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무슨 방법이 있는가? 나는 아예 감히 많이 생각할 수가 없었고 결과는 정말 너무나도 무서웠다. 이렇게 모든 수술을 12시까지 하였다. 일주일 뒤, 실을 뽑은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상처를 치료하였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상처는 전부 회복되었으나 혈관을 뽑았던 자리는 여전히 부풀어 오르며 호전되지 않았다. 나는 또 불안한 심정으로 육군종합병원 천충텐 의사를 찾아갔다. 천 의사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연구를 거쳐 미국에서 들여온 견인수술을 당신에게 무료로 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재삼 생각해보았다. 만에 하나 어려운(深度) 수술을 하다가 불구라도 되면 어떻게 하지? 지금 비록 팽창하고 아프지만 혈관은 아직 파열되지 않았으며 또한 아직 사람이 젊고 혈관은 탄성이 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고 더는 수술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수련이 싹트다

1996년 8월, 나는 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칭청(靑城) 뒷산에 유람을 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우리는 옆의 나뭇가지나 암석을 잡으면서 힘겹게 기어올랐다. 내가 신은 굽 높은 신발은 뒷굽이 다 떨어졌으며 다리 또한 붓고 아팠다. 그러나 일로일소(一老一小)와 동행하려고 나는 억지로 지탱하였다. 조금 가다가 또 조금 쉬었다가 하면서 산 중턱까지 갔을 때, 20명쯤 되고 나이가 60세가량 되어 보이는 한 무리 보살 아주머니들이 몸에 붉은 보자기를 메고 빠른 속도로 우리 뒤를 따라잡더니 또 재빨리 우리를 앞서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보아하니 그들은 마치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는 듯 하며, 종종 함께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한 무리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산을 잘 오를까. 진짜로 신이 있어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걷는 것이 이다지 가볍고 이처럼 빠르다. 우리는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백운사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그녀들과 함께 공덕을 행하는데 기꺼이 참가하였으며 신께서 우리를 가호하여 내 병을 낮게 해주시고, 장사가 번창하게 해주시고,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십사 라고 빌었다.

다음 날 백운사를 떠날 때, 대문 입구에서 30세가량 되어 보이는 삭발한 비구니가 사람들이 제비뽑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올라가서 위에 것을 하나 뽑았다. 나는 호기심으로 물었다. “당신은 이렇게 젊은데 왜 절에 왔는지요? 그녀는 나에게 속세에서 그녀의 불행한 혼인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속세를 버리고 절에 들어와서 수련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수련 두 글자를 듣고 아주 신성하게 느껴져 수련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나의 마음속을 보아내고는 나보고 ”당신도 수련하세요.” 라고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 나는 일로일소(一老一小)가 있고 또 인간세상의 돈과 재물 등등을 내려놓을 수 없는데 수련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집에서 수련하며 경서를 읽으면 됩니다.” 나는 두꺼운 책을 만져보면서 계속 물었다. “내가 수련하면 백운사에 또 와야 합니까?” 그녀는 “또 와야 한다.” 고 했다. 나는 높이 솟은 산 정상을 바라보며 그만두자, 이 산은 너무 높고, 길 또한 걷기가 안 좋으니 여기서 수련하지 말고 나중에 집과 가까운 곳에서 수련하자 라고 생각했다.

제 3 장 절망의 인생

약을 달고 살다

수술이 실패한 후, 정신적 압박은 더욱 커졌으며 내가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고 수시로 마비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증세가 엄중해도 친인과 친구들이 들으면 걱정할까보아 말을 하지 못하고 밤에 혼자서 울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격동하거나 화를 내면 대뇌의 혈관이 마치 악기의 현(弦)마냥 팽팽하게 죄어 지며 온몸은 마비되어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나의 손가방에는 화장품이 아니면 뇌혈관을 치료하는 약이었다. 비시린(比西林), 인싱예팬(銀杏葉片), 쉬안윈팅(眩暈停) 등등…… 심지어 어떤 때는 길을 걸을 때 안절부절 못하면서 아울러 순간적인 실명이 따랐다. 한번은 내가 작은 차를 운전하며 선샌쑤(神仙樹) 자동차 운수회사 5대(隊) 입구까지 갔을 때,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나는 얼른 차를 한쪽 옆에 갖다대고 세운 후, 약을 먹고 핸들에 엎드렸는데 대략 한 시간 쯤 지나서 회복되었다.

또 한번은 우리가 왕쟝(望江)공원에서 낚시질 할 때, 보험을 하는 사람이 나더러 보험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내가 보험이 증식(增値)되는 가를 물으니 그는 “ 증식(增値)되지 않는다.” 고 했다. 나중에 나는 나의 모든 예금으로 2급 시장의 주식을 샀다. 주식이 오른 후, 그 돈으로 노후를 보내고 병을 치료하려고 하였다.

세계적으로 고칠 수 없는 혈관종양

미루고 또 미루고 1997년까지 미루다가 나는 다시 화시(華西)의과대학에 다리를 치료하러 갔다. 교수가 보고나서 병증세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감히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나에게 말하기를 “매주 수요일 오후는 전문의가 진찰하는 날인데 전문적으로 난치병을 진단하니 당신은 가서 번호를 등록하여 시간을 약속하고 다시 오세요.” 라고 했다. 후에 30여명의 전문의들이 진단한 결과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이었는데 세계적으로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당신의 지난번 수술은 잘 못되었다, 예를 들면 본래 두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것을 현재는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니 더욱 엄중한 것이다. 수술시 주의하지 않으면, 혈관 벽을 묶을 때, 소뇌신경을 손상하여 후유증을 남기기 쉽다.’고 말했다. 허! 나의 뇌혈관 병은 수술을 잘못해서 야기된 것인가? 전문의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이름, 주소, 전화 등을 남겨놓으세요. 치료할 수 있을 때, 다시 통지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지금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다……

1998년 상하이에서 온 전문의가 위생간부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또 가서 검진하였다. 의사는 혈관종양이라고 하면서 나더러 10만 위안을 들여 상하이에 가서 수술을 해보라고 하였다. 내가 “만약 치료만 할 수 있다면 20만 위안이라도 가겠는데 보증을 하지 못하면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보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나는 내내 가지 않았다.

악화

1997년 가을, 아들의 아버지가 나에게 호출문자를 보내 그의 상점에 한번 왔다가라고 했다. 내가 갔더니 그는 나보고 돈을 달라고 했다. 나는 방금 차를 샀는데 동생의 돈 3,000위안까지 빌려 지금 돈이 없다고 했다.(내 돈은 나중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부 2급 시장의 주식을 샀기 때문이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식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직원 노동자와 친구들이 얼른 그를 끌어안았는데 나는 놀라서 의자에 주저앉았으며 삽시에 전신이 떨리고 마비되고 차가워지고 혀가 굳어지고 입술이 자색으로 변하고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멍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또 감히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가방에 있던 약도 다 먹었으므로 나는 겨우 떨리는 손으로 삐뚤삐뚤하게 몇 글자를 썼다. 비시린(比西林), 인싱예팬(銀杏葉片), 쉬안윈팅(眩暈停)……

그 후부터 나의 뇌혈관 병은 더욱 엄중해졌고 늘 재발하였으며 얼굴의 황갈색 얼룩이 더욱 뚜렷해졌고 오른 쪽 다리는 늘 부어 아팠다. 발작할 때면 나는 침대에 누워 발을 높이 들어 벽을 밟아 혈액이 거꾸로 흐르게 하였다……

약간의 위안

하늘은 그래도 공평하다, 비록 내가 결혼에 실패하고 신체적으로는 고통이 심하지만 사업에서는 늘 순조로웠으며 생각하는 대로 일이 잘 풀렸다. 이것은 아마 하늘이 불쌍한 나에게 자그마한 위안과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저번 사건이 있은 후, 우리는 이혼할 것을 협의하였지만 돈과 재산문제 때문에 이혼은 지금까지 진척되지 않았다. 비록 이혼이 성사되지 않았지만 나의 사업은 갈수록 좋아졌다. 내가 운전하는 화물차는 늘 적재량을 초과하였는데 낮에는 벌금도 많아 밤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병마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 내가 아무리 의지력이 있다고 해도 이 현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며, 벌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혼자서 야간 운전을 할 수 없어 1997년 봄에 큰 화물차는 팔고 작은 차를 사서 운송 업무를 맡아했다. 예전에 내가 맡은 업무는 펑저우(彭州)시의 한 개인업자인 둥펑(東風) 큰 화물차가 나를 도와 운송하고 있다. 1998년, 산환로(三環路) 건설이 시작되자 일이 아주 많아져 청화구 운송회사를 도급 맡은 업자가 적재함을 덧댄 둥펑(東風) 자동차 4대로 밤낮 쉴 새 없이 나를 도와 운송하였는데, 운전기사, 짐꾼이 모두 30여명이나 되었다. 나의 일은 아주 수월하였는바, 매일 오전 11시쯤에 차를 운전하여 지휘부에 가서 화물 인도서를 받아오는 것인데 일하는 시간이 매일 한 시간쯤이지만 나의 월수입은 만 위안 이상이며, 심지어 어떤 때는 거의 2만 위안에 가까웠다. 나는 아파트가 있는가 하면 자동차도 있고 핸드폰도 있으며 아들도 유명한 학교에서 공부한다. 내가 정한 목표인 거의 40만 위안을 주고 산 2급 시장의 100수(手) 주식도 손안에 들어왔으니 나도 이제는 편안히 향수를 해야 하리라.

혼비백산

하지만 사람마다 다 알다시피 돈이 있어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으며, 약물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다.

오른 쪽 다리의 혈관종양은 지워버릴 수 없는 한 덩이 마음의 병(心病)이며, 시종 나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하나의 큰 산이다. 후반생에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서만 살아야 하는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나는 미래를 계획해보았는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젊었을 때, 돈을 많이 벌어 주식을 사서 이후에 반신불수인 나를 돌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100수(手)의 2급 시장 주식을 사놓고 시세를 봐서 내다 팔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래도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겠는가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1997년 주가가 폭락하였을 때, 하루 밤 사이에 20만 위안을 손실 보았다. 나는 밥맛이 다 떨어지고 잠이 오지 않고 차를 운전할 때 가속페달을 밟는 것마저 힘이 없었으며, 온 종일 혼비백산 하였는데 주식도 나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시련 속에서 생활하고 공허 중에서 생활하며 병마 중에서 생활하고 공포 속에서 생활하고 있던 나는 매일 한 시간 전후 출근시간을 제외하고는 미용을 하고 머리를 메만지며 마작을 하는 등등으로 자극을 찾았다. 어떤 때는 또 생각했다. 죽어버리고 말자, 지금 반신불수가 되기 전에 어머니, 아들에게 돈을 남겨주고 말자. 그러나 또 그들은 내가 없으면 얼마나 고독하겠는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포기하였다. 종일 눈물로 지냈으며 혼자서 쓴 물을 삼켰다.

(다음에 계속 이음)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6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8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6/79558.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