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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을 경외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글/ 명월(明月)

[명혜망] “왜 신을 경외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서양에서는 욥의 이야기가 많이 읽혀지는데, 대부분 이 질문 때문이다.

〈욥기〉는 〈구약성경·시가지혜서〉의 첫 번째 권으로, 유대교와 기독교 각 종파가 모두 이 책을 정경으로 받아들인다. 이 시편(詩篇) 형태의 저작은 ‘지혜로 가는 길’이라는 속성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중시를 받고 있다.

욥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증오받는 대상’이다. 욥의 일생에서 겪은 고통과 인내의 경험은 이 이름에 훌륭한 해석을 남겼다.

욥이 살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마 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었지만, 욥은 신에 대한 순수한 숭배를 신중하게 지켰다. 〈욥기〉 제1장 제8절에 따르면, 그 당시 “땅 위에 욥과 같이 완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없었다.”

〈욥기〉에 따르면, 욥은 “완전하고 정직하며, 신을 경외하고, 악한 일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행복한 삶을 살았고,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가정은 풍요롭고, 가축은 무리를 이루고, 하인들도 많았다. 욥은 영적으로도 부유했으며, 베풀기를 좋아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이 모든 좋은 것들이 결국 욥이 도전받게 된 원인이 됐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에서 조회할 때 그의 충실한 종 욥에 대해 언급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탄이 나서서 욥이 물질적 이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발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욥의 좋은 삶을 빼앗는다면, 욥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여호와는 사탄의 도전을 받아들여 사탄이 욥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도록 허락했지만, 욥의 몸을 다치게 하는 것만은 금지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욥은 일련의 불행과 타격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의 많은 재물이 약탈당했고 그의 열 자녀가 모두 폭풍 속에서 죽었다.

이러한 격렬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욥은 여전히 굳게 믿었다. “여호와의 이름은 찬양받을 만하도다.” 그러자 사탄은 자신이 욥의 몸을 다치게 할 수 있다면, 욥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몸을 다치게 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금지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이 매우 끔찍한 병에 걸리게 했다. 욥의 살과 입에서 악취가 났기 때문에 그의 아내와 친구들은 그를 싫어하고 멀리했다. 게다가 욥의 아내는 그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을 보고 재촉하며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순결함을 지키고 있나요? 하나님을 버리고 죽으세요!” 이에 욥은 아내를 꾸짖었다.

사탄은 한 가지 계책이 성공하지 못하자 또 다른 계책을 만들었다. 사탄은 욥의 세 친구를 이용해 소위 욥을 ‘위로’하게 했다. 이 세 친구의 이름은 각각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욥이 이미 외모가 알아볼 수도 없게 변한 모습을 보고 크게 울었다. 그들은 먼지를 자신의 머리 위에 뿌린 다음, 욥과 함께 땅에 앉아 말을 하지 않았다. 7일밤의 이러한 무언의 ‘위로’ 후에, 욥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이러한 소위 동정하고 위로하는 사람들과 길고 긴 논쟁을 벌였다.

첫 번째 논쟁에서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왜 하나님이 자신을 살려두셨는지 모르겠다며 울부짖었다. 이에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께 충분히 충성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엘리바스는 정직한 사람은 절대로 멸망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이 밤중에 본 환상을 회상했다. 그 환상에서 한 목소리가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 특히 땅의 먼지처럼 미천한 세상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즉, 욥이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훈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욥은 엘리바스에게 대답했다. “나의 비통한 탄식은, 극심한 고통에 처한 어떤 생명체라도 내뱉을 수밖에 없는 것이네. 나에게 유일한 위로는 죽음뿐이네.” 또한, 그는 친구들이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꾸짖었다.

이어서 빌닷이 논쟁에 합류했다. 그는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수 있으며, 욥 자신도 반드시 그렇게 의롭지는 않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를 돌보셨을 것이라고 했다.

욥은 하나님이 공정하다고 굳게 믿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는 것처럼) 인간에게 책임을 지실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분은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행하시며, 셀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네.” 그는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청할 뿐이었다. 또한, 자신의 처지를 보니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는지 모르겠고, 땅에는 정의로운 심판이 없다며 “왜 제가 온갖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이 단지 ‘흙으로 만들어진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기억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하나님이 과거에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셨음을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스스로를 변론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노하게 만들 뿐이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욥과 엘리바스, 빌닷의 대화에서 우리는 욥처럼 신께 충실한 사람이라도 몸과 마음이 일정 정도로 고통스럽다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신께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이해하고 완전히 자신의 편에 서 주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알 수 있다.

이때 소발도 논쟁에 합류해 말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닌데, 어찌 너의 허튼소리를 믿겠느냐? 네가 자신이 깨끗하고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이 발언하신다면 반드시 너의 죄를 드러내실 것이다.” 소발은 욥에게 물었다. “네가 하나님을 측량할 수 있느냐?” 그는 욥에게 악행을 버리라고 권고했으며, 그래야만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권했다.

욥은 자신의 과거 정직한 언행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겪은 고통과 타격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말들을 듣고 세 친구를 조롱했다. “너희야말로 진정한 백성이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멸망하겠구나.” 욥은 이 세 명의 ‘위로자’가 침묵하는 것이 더 지혜로울 거라며, 자신이 정직하다고 확신하고 하나님이 그의 간청을 들어주시기를 간구했다. 욥은 하나님이 그를 어딘가에 숨겨 하나님의 분노가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두 번째 논쟁에서 엘리바스는 욥의 식견이 얕다고 조롱하며 욥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폄하했다. 엘리바스는 범인(凡人)이든 하늘의 성자든 하나님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간접적으로 욥이 자만하고, 위선적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도움은 단지 뇌물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허무한 말로 남을 위로하면 오히려 남을 근심하게 할 뿐이네”라며 엘리바스의 말을 거부했다. 그는 이 몇 명의 친구의 ‘위로’가 캄캄한 밤을 대낮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욥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그에게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열망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분명히 알고 계실 것이라고 깊이 믿었다!

논쟁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빌닷은 매우 화가 나서 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분노 때문에 대지가 황폐해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는 욥이 스스로의 덫에 걸려 다른 사람들의 거울이 될 것이며, 결국에는 후손도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욥은 대답했다. “너희는 언제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밟으려 하느냐?” 그는 반드시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고 깊이 믿었다.

빌닷과 마찬가지로, 소발도 욥이 논쟁에서 한 말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책망하며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그는 또한 욥이 고난을 겪는 것은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며,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논쟁이 여기까지 왔을 때, 욥은 이미 동정과 연민을 받는 사람에서 ‘분명히 죄가 있는’ 악인으로 변해 있었다.

이에 대해 욥은 강력하게 반박했다. “만약 악인이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피할 수 없다면, 왜 일부 악인들은 장수와 부귀를 누리느냐? 왜 그들은 호사를 누리며, 재난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느냐?”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죽고, 때로는 악인이 죽을 때 ‘완전한 평온과 안락함’을 얻는 반면, 의인은 오히려 ‘죽을 때까지 마음속에 고통이 있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을 때, 우리 수련자들은 욥이 악인은 아니지만, 갈등과 근거 없는 비난 앞에서 자신의 옳음만을 강조하고, 반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신이 정확히 어디서 잘못했는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논쟁에서 엘리바스는 다시 욥을 맹렬하게 공격하며 조롱했다. “네가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느냐?” 그는 욥의 과거 선행에 악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엘리바스는 욥이 간악하여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으며, 욥의 사생활도 그가 말한 것처럼 단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욥이 지금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설명한다고 했다.

욥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엘리바스가 지적한 악행이 실제 모습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욥은 이때 자신이 ‘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엘리바스가 지적한 구체적인 문제가 욥의 실제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은 자신을 변호하며, 사실로 엘리바스의 불합리한 비난을 반박했다. 그는 자신있게 선언했다. “나는 내 사건을 하나님 앞에 직접 아뢰기를 원하네.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의롭다는 것을 아실 것이네.” 그러자 빌닷은 즉시 반박하며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라고 단언했다.

빌닷의 이 주장은 사실 매우 지혜로운 말이었지만 욥이 이를 들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때 욥은 사탄이 강요한 온몸이 고통스럽고 악취가 나며,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느낀 것은 빌닷이 그를 비방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불순한 부분이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볼 수 없었다.

이 세 번째 논쟁에 소발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반박에서 욥은 여전히 하나님의 지혜를 묘사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거룩한 존재인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이 관찰할 수 있는 외계 공간, 지구, 구름, 바다, 바람 등에서 드러나지만, 이 모든 것은 전능자께서 하시는 일 중에서 미미한 부분일 뿐이며, 전능자의 위대함을 약간만 반영할 뿐이네. 사람들은 지상의 각종 보물의 출처를 알지만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사람들은 생물 중에서 지혜를 찾았고, 또한 망망대해에서도 찾았지만, 금은으로도 지혜는 살 수 없네. 오직 하나님만이 천지 끝까지 살피시고,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측량하고, 비와 폭풍을 다스리시네.”

욥은 지적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멀리함이 명철이라네.”

그는 자신이 깨끗하고 죄가 없다고 깊이 믿으며, “내가 죽을지라도 충성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선언했다.

고통받는 욥은 이어서 자신의 일생을 회상했다. 그는 예전에 누렸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를 갈망했다! 그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했으며, 맹인에게는 그가 마치 그들의 눈과 같았다. 모든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우러러보며 기다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존귀함은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 젊은이들도 그를 조롱했다. 그는 말했다. “그들의 아버지조차 내 양떼를 지키는 개들 중에 둘 가치도 없었거늘, 이제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고 나를 공격하는구나.”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여호와께 자신을 심판해 주시기를 요청했다.

욥은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평생 사적에서 그의 죄상을 찾아보라고 요청했다. 욥의 이 논변은 현장의 세 친구를 완전히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때 엘리후가 입을 열었다. 엘리후는 아브라함의 먼 친척이었고, 욥은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이었다. 엘리후는 계속 현장에서 이들의 논쟁을 듣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전까지는 계속 듣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을 진정으로 깨닫게 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신성(神性)이다. 욥과 그의 세 친구가 여기까지 논쟁을 벌였을 때, 엘리후는 욥에게 화를 냈다. 그는 욥의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의롭게 여기는 것’을 초과했다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더 화를 냈다. 그들이 어리석고 무지하여 하나님에 대해 망령되이 단언했기 때문이다.

엘리후의 말은 간절하고 정중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이 그를 만드신 주님임을 인정한 다음, 욥이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일일이 답변할 필요가 없지만, 욥은 감히 하나님과 논쟁하려 했다.

엘리후는 지혜로운 자라면 그의 말을 들으라고 촉구했다. 욥은 사람이 충성을 지키는 것이 헛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엘리후는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네. 그분은 반드시 사람이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게 하시며,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게 하시네.” 하나님은 공정무사하게 행하시는데, 욥은 자신의 바름을 과도하게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욥은 ‘지식이 없어’ 자신도 모르게 경솔하게 말했더라도, 하나님은 오히려 욥에게 오랜 인내를 보이신 것으로 보았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에 대해 논하고, 그분이 자연의 여러 힘을 통제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의 기적에 주의를 기울이고 생각해보라고 상기시켰다.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과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위엄은 모두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라고 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모든 사람을 돌보지만, “자신이 마음속에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그러나 겸손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때, 욥은 다시 하나님께 그에게 대답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의 참된 형상은 사람이 볼 자격이 없으므로, 여호와는 회오리바람의 형태로 와서 위엄 있게 욥에게 대답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일련의 질문을 던져 사람이 얼마나 미미한지 느끼게 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넌 어디에 있었느냐? 땅의 주춧돌은 누가 놓았느냐? 그때, 새벽별이 함께 노래했고, 하나님의 아들들도 모두 환호하였느니라.” 이 모든 것은 욥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여호와는 잇달아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며 지상의 바다, 구름의 옷, 새벽, 죽음의 문, 빛과 어둠에 대해 언급했다. “너는 그때 태어났느냐? 네가 산 날이 많다고 이런 일들을 다 알고 있으냐?” “또한, 폭풍우, 서리와 우박, 하늘의 별들, 번개, 구름 그리고 여러 날짐승과 들짐승은 어떠하느냐?”

욥은 겸손하게 인정했다. “저는 천한 자입니다! 무엇으로 주께 대답하겠습니까?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여호와는 욥에게 논쟁을 직시하라고 명령하셨다. 욥은 공손하게 자신의 관점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자신이 무지한 말을 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이제 깨달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으므로 ‘(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재와 티끌 속에서’ 회개하고, 이전의 무지한 말들을 취소했다.

이때, 여호와는 엘리바스와 다른 두 친구가 허망한 말로 그를 논했다고 책망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치고,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다음, 여호와는 욥을 고난에서 구원하고 그에게 두 배의 축복을 내렸다. 욥의 형제와 자매, 그리고 이전의 친구들이 모두 선물을 가지고 돌아와 그와 화해했다. 하나님은 두 배의 소와 양, 낙타와 암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욥이 다시 열 자녀를 얻게 하셨다. 그 후, 욥은 140년을 더 살며 4대까지 자손을 보고 마침내 ‘나이가 많고 날이 차서 죽었다.’

욥이 죽으려 할 때,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천사를 보내 말씀하셨다. “그를 구원하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그의 생명을 위한 대속물을 얻었노라.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보다 더 연하게 하고, 그를 청춘의 날로 돌아가게 하라.”

욥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사람의 감정과 관념에 얽매여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진 않는다. 사람이 신을 경외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합당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실수하고 업을 짓게 되며, 이 업은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줄일 수 있다. 또한 욥 이야기처럼 사탄의 도전, 신의 허락과 같이 인류가 예상치 못한 이유로 선한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신에 대한 경외와 충성을 지키기만 한다면, 과정이 어떠하든 결국에는 자신의 품덕에 맞는 축복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복을 믿는가? 소원 빌기를 믿는가? ‘하늘’의 존재를 믿는가? 사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믿지 않아 생기는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우주의 법칙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눈앞의 편안함과 행복만 신경쓰다가 죽을 때가 되면 후회한다. 사실 사람이 ‘사람이 죽으면 등불이 꺼진다(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 오류임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꿈속에서 본 것 때문에 깨어난 후의 현실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황량일몽(黃粱一夢)’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것은 그것이 인생의 한 가지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역주: ‘황량일몽’은 한 가난한 선비가 도사가 준 베개로 인해 꿈속에서 50년간의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깨어나보니 단지 한 솥의 기장(황량) 밥이 익는 짧은 시간이었다는 이야기로, 세속적 성공과 영화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원문발표: 2025년 3월 3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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