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셀과 양련(楊漣)에 관하여
글/ 명월(明月)
[명혜망] 세월은 흘러가고 또 화살처럼 빠르다. 시공이 교차하는 가운데 역사는 수많은 우연과 필연으로 이뤄진다. 당신은 누구이며, 그는 누구이고, 나는 또 누구인가? 지구 반대쪽에서 살았지만 모두 1572년에 태어나 1625년에 죽었다고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자.
1. 신화 동물과 ‘시대의 비가(悲歌)’를 저술한 톱셀
에드워드 톱셀(Edward Topsell, 1572-1625)은 영국의 성직자이자 작가로, 동물 우화로 유명하다.
톱셀은 1572년 켄트주의 세븐오크스시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1587년, 그는 사이저(Sizar)로서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 사이저는 학업 기간 중 식사나 낮은 학비, 숙박 등의 형태로 도움을 받는 학생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지정된 일을 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도움에 보답했다. 톱셀은 1591년이나 1592년에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톱셀의 ‘네발짐승의 역사’(1607년)와 ‘뱀의 역사’(1608년)는 1658년에 ‘네발짐승과 뱀의 역사’로 함께 재출간됐다. 톱셀의 저작은 1,100페이지에 달하며, 실제 동물에 관한 오래되고 환상적인 전설과 신화 동물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톱셀의 작품은 주로 ‘뒤러의 코뿔소’로 알려진 유명한 이미지를 포함한 상세하고 생생한 삽화로 기억된다. 삽화 속의 사자는 인간의 표정과 정성스레 손질된 갈기를 지녔으며, 톱셀이 믿었던 바와 같이 동물이 인간의 내재적 가치와 도덕적 품성, 그리고 인간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자는 서양 문화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 중 하나로, 용기와 힘, 왕자다운 풍모를 연상시킨다. 나는 사자가 인간에 대한 특별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사자는 선할 수도 있고 사나울 수도 있지만, 좋든 나쁘든 권위와 힘을 상징한다.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를 졸업한 후, 톱셀은 아마도 석사 학위도 받았을 것이며, 이후 영국 교회에서 직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서식스 주 이스트 호슬리의 초대 교구장을 역임했고, 이후 올더스게이트 성 보톨프 교회의 영구 목사(1604년)가 됐다. 그는 ‘종교의 보상’(The Reward of Religion)과 ‘시대의 비가’(Time’s Lamentation) 등 종교와 도덕을 주제로 한 책을 저술했다. “우리가 부름받은 직업의 희망이 무엇이며, 우리가 처한 상황의 존엄성, 그리고 우리의 종교가 우리의 영혼을 위해 준비한 보상이 무엇인지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그 책의 소명이라고 한다. ‘시대의 비가’는 여러 설교와 명상의 자리에서 선지자 요엘(Joel)을 둘러싼 논의다.
요엘은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신이시다’라는 뜻이다. ‘요엘서’는 구약의 한 권으로, 선지자 요엘이 재앙의 도래를 경고하고, 여호와의 강림을 묘사하며, 좋은 결말을 예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주로 시체(詩體)로 쓰여 있어서 운율과 대구를 갖추고 있으며, 신의 계시(예언)도 풍부한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어 있다. ‘성경’은 책 속의 예언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 집필자 자체에는 중점을 두지 않아서 이 책은 처음부터 “여호와의 말씀이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하니라”라고만 되어 있다. 성경은 요엘의 생애에 대해 이처럼 간단한 설명만 하고 있다. 학자들은 ‘요엘서’의 저작 시기를 기원전 800년보다 이른 시기부터 기원전 400년경까지로 추정한다.
에드워드 톱셀이 살았던 시대는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있는데, 이는 유럽의 르네상스가 태동에서 절정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 문화운동은 고대 로마의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문화 변혁이었다. 이는 고전 문화의 재학습과 계승을 펼쳤으며,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를 타파했다. 또한 회화, 교육 혁신, 인체 구조, 화학, 천문 기술과 과학 지식 등의 방면에서 근대 과학 발전을 추진했으며, 신권(神權)시대도 타파했다. 르네상스 운동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전념에서 현세 생활의 질에 대한 전념으로 전환하게 했다. 르네상스는 단순히 부활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 연구와 창의성 탐구라는 짙은 태도를 띠게 됐다. 미켈란젤로는 인체 해부학 연구와 원근법의 활용으로 혜택을 받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다방면에 걸친 자연과 과학 연구는 모두 그 시대의 최고 대표작이다.
2. 명나라의 유명한 충신 양련
같은 시기, 유럽에서 인문적 기운이 짙고 예술이 왕성하게 발전하던 그 시대에, 동방의 중국은 명나라 말기에 있었다. 명말에 양련(楊漣)이라는 군자가 있었는데, 그는 영국의 에드워드 톱셀과 마찬가지로 1572년에 태어나 1625년에 죽었다. 양련은 당시 저명한 충신으로 ‘동림 육군자(東林 六君子)’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5세에 이미 서당에 다녔고, 성품이 민첩하고 지혜로워 책을 한번 보면 바로 외울 수 있어서 서당 선생이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만력 35년(1607년), 양련은 진사에 급제했다. 처음에는 상숙(常熟) 현령으로 임명되어 전국에서 청렴한 관리 제1위로 뽑혔고, 조정에 들어가 호과급사중, 병과급사중을 역임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하여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당시 명 신종 주익균(朱翊鈞, 만력제)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조신들을 만나지 않았고, 정(鄭)귀비는 외척들과 결탁하여 신종과 태자 주상낙(명 광종) 부자의 관계를 이간질시켰다. 신종이 병으로 위독했을 때, 양련은 정귀비의 권세를 무릅쓰고 태자 주상락(명 광종)이 입궁하여 신종을 모실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광종은 즉위한 후 등극한 지 나흘 만에 큰 병을 얻었다. 당시 궁중에서는 광종의 병이 정귀비가 바친 여덟 명의 미녀로 인해 광종의 몸이 상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또한 중관 최문승(崔文升)을 사주하여 설사약을 먹여 병세를 악화시켰다고 했다. 양련은 이러한 소문을 듣고 광종을 깊이 걱정하여 정귀비가 광종에게 미치는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조신들과 연락하여 함께 정귀비의 거처를 다른 궁으로 이전할 것을 청하여 그녀를 광종 곁에서 쫓아냈다. 그는 또한 정귀비가 황태후에 봉해져 궁중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광종이 중병 상태일 때 양련은 상소를 올려 그 과실을 힘써 진언하여 광종의 소견을 얻어 유언을 받들었다.
천계 5년(1625년), 환관 세력을 반대하며 간신 위충현(魏忠賢)을 저지하려다가 양련은 모함을 당해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참혹하게 죽었다. 쇠바늘로 문지르고, 청동 철퇴로 가슴을 치고, 흙주머니로 누르고, 쇠못으로 귀를 뚫는 등 인성이 전혀 없는 고문을 당한 후, 이미 죽음 직전 상태에 이른 양련은 손가락을 깨물어 한 편의 절명혈서를 썼는데, 현대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양련이 이제 옥중에서 죽게 됐습니다! 한 조각 순진한 마음으로 폐하께 보답하려 했으나, 곧은 성품 때문에 간신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목숨은 이미 오래전에 던졌으니 더 이상 미련은 없습니다. 환관 세력이 전횡하는 앞에서 나는 장검(張儉, 환관들의 압박을 피해 도망 다녔던 한나라의 관리)처럼 도처를 도망 다니고 싶지 않았고, 양진(楊震, 환관들의 모함을 받고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한나라의 관리)처럼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형벌과 은혜는 모두 하늘의 뜻이니, 인의를 행한 일생이 간신이 득세한 세상에서 마침내 옥중에서 죽게 된 것은, 죽을 만한 곳에서 죽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하늘에 유감이 없고 사람에게 원망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어사의 직책을 맡았고, 일찍이 선제의 유언을 받들었는데, 공자께서는 ‘어린 임금과 나라의 정사를 위임받은 자는 생사의 기로에서도 흔들리거나 굴복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지켰으니, 사후에는 선제의 영령을 뵈어도 이조십종(二祖十宗, 명나라의 선대 황제들)과 천지, 천추만세에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니, 크게 웃고 또 웃을 뿐이니, 도끼가 교차한들 나를 어찌하겠습니까?”
“나 양련은 비록 분골쇄신하여 시신이 구더기와 개미의 먹이가 되어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나라가 견고하고 성덕이 강명하여 해내가 오래도록 태평의 복을 누리기를 바라옵니다.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어도 이 충정은 죽어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양련은 1628년 무죄 복권되었다. 그는 강직하고 진리를 고수하며 정의를 주장하고 충언을 서슴지 않아 사가(史家)들로부터 “위인이 강직하며 특출한 절개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기 다른 삶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 시대의 인생 무대에서 양련은 동방의 충의지사(忠義之士)로서 군주를 위해 고심하는 한 편의 큰 연극을 연출했고, 톱셀은 서방의 신앙인으로서서 책을 저술하며 살아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삶을 연출했다. 양련과 톱셀의 다음 생은 각자 어디로 갔을까? 후세의 그들은 국왕, 장군, 상인, 시인을 연기했을까? 혹시 승려, 도사, 라마, 또는 예술가가 되었을까? 만약 다시 같은 시대에 등장했다면, 그들이 연출한 인생은 여전히 궤도가 교차하지 않았을까? 망망한 인해(人海)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와서 희로애락을 맛보고 문화를 써내려가는 것일까?
인생이라는 큰 무대에서 사람마다 전생에서 정해진 역할이 있다. 각자의 연기 분량이 역사의 한 순간을 이루고, 역사의 순간은 항하의 모래 숫자와 같다. 긴 세월의 윤회전신(輪廻轉身)을 거치며 귀천과 시비선악의 온갖 역할을 연기하다가 우리는 오늘에 이르렀다. 나이와 피부색, 직업에 상관없이 우리는 사실 모두 오래된 영혼(old soul)이다. 우리의 우주 진상에 대한 이해력은 후천적 관념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구속을 훨씬 뛰어넘는다. 다만 우리 스스로 감히 신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된다.
만약 진실된 일념(一念)으로 창세주와의 소중한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다면, 만약 마음으로 창세주를 바라보며 인도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원문발표: 2025년 1월 13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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