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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속 선사시대 문명 (하)

[명혜망](전편에 이어)

4. 문자 속에 남겨진 곤륜산(崑崙山)의 ‘고대 중국’

대우(大禹)가 물을 다스린 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적이다. 요제(堯帝) 재위 시기에 보기 드문 대홍수가 높은 산과 언덕을 덮쳤다. 선사시대의 인류문명을 파괴한 이 대홍수는 많은 민족이 기록하고 있는데, 《상서·요전(尙書·堯典)》에 따르면, 요제 시기에 하늘이 대홍수를 내려 물이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졌다고 한다. 서양의 같은 시기에 《성경·창세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일은 2월 17일에 발생했다. 이날 하늘의 창문이 크게 열리고 40일 낮과 밤 동안 큰비가 내렸다… 세상의 높은 산이 모두 잠겼다.” 이는 지난 인류문명을 파괴한 세계적인 대홍수였다.

图8:州,甲骨文,水中的高地。

그림8: 주(州), 갑골문, 물속의 높은 땅

《설문》의 ‘주(州)’ 자는 이런 정보를 기록했다. “주는 물속에 거주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옛날 요 임금이 홍수를 만났을 때 백성들은 물속의 높은 땅에 살았다.”

图9:丘,甲骨文,象两座山相连。

그림9: 구(丘), 갑골문, 두 산이 이어진 모양.

《설문》에는 또 ‘구(丘)’라는 글자가 있다. “구는 땅이 높은 곳이며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북(北)과 일(一)로 이루어졌다. 일은 땅이며 사람이 구의 남쪽에 거주하므로 북쪽을 따른다. 중방(中邦)의 거처는 곤륜산의 동남쪽에 있다”라고 했다. 구는 지세가 비교적 높은 곳이며, 곤륜산은 곤륜구(崑崙丘)라고도 불렸다. ‘중방’은 중앙의 나라, 천자의 나라를 가리키며 곤륜산 동남쪽에 위치했다.

《산해경(山海經)》은 이렇게 기록했다. “제요대(帝堯臺), 제곡대(帝嚳臺), 제단주대(帝丹朱臺), 제순대(帝舜臺)가 각각 2개씩 있고 사방에 있으며 곤륜산 북쪽에 있다… 여러 제왕의 누대가 곤륜산 북쪽에 있다.” 제대(帝臺)는 제사와 천상을 관찰하는 데 사용되었고 일반적으로 수도 근처에 세워졌으며 나라의 명맥이 있는 곳이었다. 이는 ‘중방의 거처’가 곤륜산 부근에 있었다는 말을 입증한다.

《수경주(水經注)》에서 《우본기(禹本紀)》를 인용하여 말하길, “곤륜산은… 숭고산(嵩高山)에서 5만 리 떨어져 있으며 땅의 중심이다”라고 했다. 대홍수 이전에 ‘땅의 중심’은 곤륜산에 있었는데, 이는 전통 제사에 보존된 정보로도 입증할 수 있다. 《예기정의(禮記正義)》에서 《괄지상(括地象)》을 인용해 “지구 중앙을 곤륜이라 한다”고 했다. 또 “그 동남방 5천 리를 신주(神州)라 한다”고 했다. 곤륜산에서 동남쪽으로 5천 리 되는 곳이 바로 신주가 있는 곳이다. 오래된 제사의식에서는 신주의 신도 제사하고 곤륜의 신도 제사했는데, 땅의 중심이 곤륜에서 신주로 옮겨졌어도 여전히 곤륜산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곤륜산과 중국이 일맥상통하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당시 중화문명의 중심은 곤륜산 부근에 있었는데, 중심이 계속해서 중원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곤륜산의 중심적 위치가 점차 희미해졌다.

곤륜산의 평균 해발고도는 5500~6000미터다. 대홍수 때 곤륜산 일대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은 해발고도가 매우 높은 지세에 있었고 또 적시에 곤륜산으로 피신할 수 있었기에 많은 사람이 살아남아 이 큰 재난을 넘길 수 있었다.

세계 각 민족의 대홍수 전설에서는 대홍수가 지나간 후 극소수의 사람만이 생존했다고 했다. 《성경》에는 노아의 방주에 탔던 노아 일가만이 살아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고 중국의 수많은 인구와 고대문명은 기적적으로 보존됐다. 하도(河圖), 낙서(洛書), 음양, 오행은 대홍수 이전부터 이어져 온 선사문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요(堯), 순(舜), 우(禹) 삼대의 성왕(聖王)은 하늘을 감동시키는 큰 덕으로 위로는 천도(天道)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생활을 일으켜 세워 파괴적인 대재난 속에서 중화문명의 뿌리를 전승했다.

대우는 물을 다스리면서 세 번이나 집 앞을 지나쳤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아득한 우의 발자취[芒芒禹迹]’라는 말과 같이 중국 각지에는 우에 관한 전설과 남아있는 유적이 많다. 우가 어떻게 4천여 년 전에 단지 7, 8년 만에 산을 가르고 강을 열어 구주도(九州島)를 소통시켜 구천(九川)을 열었는지는 현대 과학기술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많은 전적(典籍)에 기록된 신기한 일들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을까?

굴원(屈原)은 《초사·천문(楚辭·天問)》에서 이렇게 썼다. “하해(河海)의 응룡(應龍)은 어떤 역정을 겪었나? 곤(鯀)은 무엇을 하였나? 우는 무엇을 이루었나?” 하해의 응룡은 어떤 경력이 있었나? 우의 부친 곤이 치수할 때 용은 어떤 역할을 했나? 우는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어떻게 성공했나? 동진(東晉)의 갈홍(葛洪)은 《포박자(抱朴子)》에서 이렇게 썼다. “우는 두 마리 용을 타고 곽지(郭支)가 수레를 몰았다.” 대우는 치수할 때 용을 타고 다녔다. 《태평광기(太平廣記)》는 《습유기(拾遺記)》를 인용하여 말했다. “우는 수로를 만드는 데 힘을 다했고 물길을 터서 산을 평평하게 했다. 황룡이 앞에서 꼬리를 끌었고 현구(玄龜)가 뒤에서 청니(靑泥)를 짊어졌다.” 황룡은 응룡을 가리키며 대우가 치수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는 천명을 받들어 구주도를 다스렸고 하늘은 황룡, 현구 등의 신수(神獸)를 배치해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했다. 용은 중국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용의 출현은 상고시대부터 역대로 이어져 《이십사사(二十四史)》에서 용이 각지에 자주 출현했으며 하늘이 보여주는 징조로 여겼다.

图10:龙,甲骨文。

그림10: 용(龍), 갑골문.

《설문》에는 용의 특징을 명확하게 정리했다. “용은 비늘 있는 짐승 중에서 가장 크다. 어둠 속에 숨을 수도 있고 밝은 곳에 나타날 수도 있으며, 작게 변할 수도 있고 크게 변할 수도 있으며, 짧게 변할 수도 있고 길게 변할 수도 있다.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깊은 못으로 잠긴다.”

대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하(夏) 땅에 봉해져 하은주 삼대(三代)의 첫 번째 나라인 하나라를 열었다. 《설문》은 “하는 중국의 사람[中國之人]이다”라고 했다. 하 땅은 현재의 산시(山西)성 윈청(運城)에 있으며 대우는 하에 도읍을 세웠다.

图11:鼎,甲骨文

그림11: 정(鼎), 갑골문

땅이 평평해지고 하늘이 이루어져 구주도가 새로워졌다. 《설문》은 이렇게 말했다. “정(鼎)은 다리가 셋이고 귀가 둘이며 오미(五味)를 담는 보배로운 그릇이다. 옛날 우가 구주의 쇠를 모아 형산(荊山) 아래에서 정을 주조했다. 산림과 천택에 들어갈 때 도깨비와 요괴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으니 이는 천체를 받들어 이룬 것이다.” 정은 청동기로 주조한 예기(禮器)로 다리가 셋이고 귀가 둘이며 천지에 제사 지내는 제품을 담는 데 사용했다. 대우는 구주도의 구리를 모아 형산 아래에서 정을 주조했으며, 정이 산림과 강호를 지날 때 도깨비와 요괴 같은 정령들이 감히 나타나지 못했는데, 이는 정이 후덕(厚德)함을 지니고 있어 천의(天意)를 받든 위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 유래에 대해 《사기·봉선서(史記·封禪書)》에서 한무제(漢武帝)가 신하들에게 정의 일을 물었을 때 많은 대신이 이런 말을 알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상고의 태제[泰帝, 태호(太昊)]가 신정(神鼎) 하나를 만들어 일통(一統)의 의미를 취했으며 천지만물의 시작이 모두 조화의 공(功)이라는 것을 상징했다고 한다. 황제는 보정(寶鼎) 셋을 만들어 천지인(天地人)이 합일됐다는 것을 상징했으니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도 크다는 것이다. 우는 구주의 쇠를 모아 구정(九鼎)을 주조하여 ‘구주도’를 나누었으니 신주(神州)의 수재를 제거하고 화하(華夏)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상징하므로 후세에는 혁고정신(革故鼎新)이라고도 했다.

20세기 1920년대에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정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약 7천 년 전의 양소문화(仰韶文化)에서 이미 도정(陶鼎)인 력(鬲)이 출현했고 후에 점차 동정(銅鼎)으로 발전했다. 《설문해자》는 “력은 정에 속한다. 다리가 셋이다”라고 했다. 고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이런 오래된 도정이 한자처럼 중국에만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중화문명만이 가진 문화 현상으로, 일본의 저명한 고고학자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는 “력은 중국만이 가지고 있으니, 대개 정이 여기서 시작됐다”라고 말했다.

《사기》는 황제가 정을 주조할 때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제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서 형산 아래에서 정을 주조했다. 정이 완성되자 용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내려와 황제를 맞이했다.” 저자는 ‘내려와 맞이했다(下迎)’라는 표현을 썼다. 황제는 본래 하늘의 천제(天帝)로, 하계에 내려와 중화 5천 년 문명의 대막을 열었다. 황제는 정으로 하늘에 고하고 용을 타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바로 ‘정성룡거(鼎成龍去: 정을 만들고 용이 떠나다)’의 유래다.

황제가 형산에서 정을 주조했고 대우도 형산에서 정을 주조했는데, 이는 황제가 덕으로 다스리는 선하(先河)를 열었음을 계승한다는 의미다. 정으로 덕을 상징하고 “천지인이 정족(鼎足)처럼 셋이다”라는 것을 뜻하니, 중화문명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여정이 이로부터 시작됐다.

(끝)

 

원문발표: 2024년 11월 13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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