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1. 갑골문이 가져온 변화
한자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주역》과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포희(庖犧)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위로는 하늘의 상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의 법칙을 살폈다.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적합성을 보고, 가까이는 자신에게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여, 이에 팔괘를 만들어 신명(神明)의 덕에 통하게 했다. 황제(黃帝)의 사관인 창힐(倉頡)이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는데, 유형에 따라 상형을 하여 이를 문(文)이라 했다. 그 후 형(形)과 성(聲)이 서로 보완하여 이를 자(字)라고 했다.” 포희씨는 바로 복희(伏羲)씨로,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보고 땅의 이치를 굽어보며, 또 새와 짐승, 물고기, 벌레의 발자취를 관찰하여 팔괘를 발명했으며, 이로써 신명과 통할 수 있었다. 황제의 사관 창힐은 천지의 법칙을 본받아 사물의 서로 다른 유형에 따라 묘사하고 그려내어 문자를 발명했다.
시간이 오래되어 상고 시대의 정확한 역사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고, 대대로 구전되어 오면서 ‘삼황오제’는 신화 속의 전설과 인물이 되었다. 특히 청말민초(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서풍동점(西風東漸, 서양의 문화와 사상이 동양으로 점차 흘러들어옴)하면서 ‘의고(疑古, 옛것을 의심하다)’의 풍조로 인해 《이십사사(二十四史)》에서 서주(西周) 공화(共和) 원년 이전의 역사는 ‘위사(僞史)’, 즉 증명할 수 없는 역사로 불리게 됐다.
《이십사사》는 공인된 신사(信史)인데, 신사는 ‘문자로 기록된 신뢰할 수 있는 역사’로 정의할 수 있다. 기원전 841년의 서주 공화 원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이후의 역사는 완전한 문자 기록이 있지만, 이전의 오제본기, 하본기, 은본기는 체계적인 문자 기록이 부족해 20세기 초에 ‘위사’라는 딱지가 붙었다.
1928년이 되어서야 중화민국 고고학원이 허난성에서 소둔(小屯) 은허(殷墟, 은나라의 수도)를 발굴했는데, 건축과 묘장 유적뿐만 아니라 대량의 상대(商代) 갑골 복사(卜辭) 문헌 자료도 있었다. 갑골문 기록을 더 깊이 연구한 결과, 역대 상왕(商王)의 연대, 월, 일과 점을 친 큰 사건이 《사기·은본기》의 서술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은허 갑골문의 발견은 《사기》가 채용한 역사 자료에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은본기》가 신뢰할 만하다면, 《은본기》 이전의 《하본기》를 의심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문자는 한 왕조의 실제 존재를 증명하는 핵심 정보다. 비록 아직 삼황오제와 하나라의 문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상고 문물의 고고학적 발견이 늘어나면서, ‘의고’설이 주장하는 하나라와 삼황오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에 대해, 연구자들은 이미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볼테르가 《백과전서·역사》에서 말했듯이, “중국인들이 지구상의 모든 민족을 능가하게 만든 요소는, 그들의 법률이든, 풍속 습관이든, 또는 문인들이 그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언어든, 4천 년 동안 한 번도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갑골문은 현재 보이는 가장 오래된 한자 서체로, 그중 한자가 4,500개 정도 있으며 2,000개가 해석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갑골은 10만 개가 넘으며, 갑골에 새겨진 한자의 총수는 약 100만 자에 달한다. 이는 성숙하고 완전한 문자 체계로 《설문해자》의 ‘육서(六書)’가 갑골문에 이미 모두 갖추어져 있어, 이로써 한자의 기원이 갑골문 이전에 있으며, 더 이른 시기의 서사(書寫) 사용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문해자》는 한자의 기원과 흐름을 기록한 저작으로, 9천여 한자를 수록했으며, 한자가 생겨난 본원을 추적했는데, 천상에서 지리까지, 기물(器物)에서 문화까지,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하여 《설문해자》가 모두 수록하고 해석했다.
《설문해자》는 소전(小篆)을 위주로 하며, 만약 고문(古文)과 주문(籀文)이 다르면 뒤에 열거했다. 하지만 동한 시대에는 상고 청동기 출토 수량이 적어서 종정명문(鐘鼎銘文)의 수량이 한정되어 있었다. 종정명문과 가까운 갑골문은 대략 3,300년 전 은상 시기에 사용되었는데, 허신(許愼)이 있었던 동한보다 1,500년 정도 이르며, 상형자를 위주로 하는 갑골문은 《설문해자》의 문자 기원 추적의 정확성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설문해자》에 존재하는 일부 편차도 보완했다. 《설문해자》와 갑골문을 결합하고 서로 검증하는 것은 이미 현재 세계에서 한자 석의(釋義)를 연구하는 통상적인 방법이 되었다.
2천여 년 전,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하나라의 예(禮)는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기(杞)나라로는 증명하기에 부족하고, 은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宋)나라로는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문헌이 부족해서이니, 충분하다면 내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기나라는 하나라의 후예이고, 송나라는 은나라의 후예이다. 공자는 하·은 두 시대의 예는 비록 약간 말할 수 있지만, 문헌이 부족하여 검증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만약 충분한 문헌이 있다면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래로 백년 동안, 갑골문이 때에 맞춰 나타났고, 100여만 자의 갑골문 자료는 후세 사람들이 하·상·주 삼대와 더 오래된 상고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가 되었다. 갑골문 연구는 이미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주목을 받는 학문이 되었다.
2. 한자 속의 ‘삼황오제’
문자로 기록된 역사가 ‘신사(信史)’라면, ‘신사’ 이전은 어떠할까? 문자 기록이 없는 시대는 일반적으로 ‘선사문명'(史前文明, prehistory)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삼황오제, 하나라, 상나라 반경이 은으로 천도하기 이전, 즉 갑골문이 출현하기 이전의 역사는 모두 선사문화 시기에 속한다.
《설문》(설문해자를 이하 설문이라 함)에서 ‘황(皇)’에 대한 해석은 “크다는 뜻이다. 자(自)를 따른다. 자는 시작이다. 시황(始皇)은 삼황(三皇)을 말하니, 위대한 군주[大君]다”라고 되어 있다. 황제의 황 자는 특정한 의미가 있는데, 바로 ‘삼황’을 가리킨다. “시작이다”, “위대한 군주다”라는 것은, 삼황이 중화문명의 최초의 창시자임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삼황은 ‘복희씨, 여와씨, 신농씨’로 보지만, 다른 설도 있어 정론은 없으나, 복희씨는 각종 설에서 모두 인정하고 있다.
《예기·곡례》에는 복희가 혼례, 매파 등 일련의 혼인 제도를 제정하여 남녀 간의 관계가 더 이상 임의적이지 않게 되었고, 인륜도덕을 규범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림1: 망(網), 갑골문
가정이 있게 되자 사람들의 생활도 안배해야 했다. 복희는 사람들에게 그물 짜기와 고기잡이와 사냥을 가르쳤다. 《설문》에는 “망(網)은 포희가 새끼를 꼬아[結繩] 고기를 잡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결승(結繩)이란 바로 그물을 짜는 것이다. 갈홍이 지은 《포박자》에서는 “태호(太昊)가 거미를 스승으로 삼아 그물을 짰다”라고 했다. 태호는 복희를 가리키는데, 거미가 그물을 치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새끼줄을 엮어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았다.
삼황 중 각각의 성인은 서로 다른 사명이 있었다. 《설문》에는 “와(娲)는 상고의 신성한 여인으로 만물을 화육한 자이다”라고 되어 있다. 여와(女媧)는 상고 시대에 신력을 지닌 성인으로, 만물을 화육하고 천하의 어머니 됨의 법도를 보였다.
“황(簧)은 생(笙) 속의 황이다. 옛날에 여와가 황을 만들었다.” 《설문》에는 여와가 황이라는 악기를 발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악과 춤으로 천하 만물이 모두 교화되고 바르게 되어, 민덕을 도야하여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다.
신농이 백초를 맛보고, 밭을 갈고 땅을 파는 도구인 쟁기[耒耜]를 발명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다. 《설문》에는 신농 씨의 성(姓)인 강(姜)에 대해 “강은 신농이 강수(姜水)에 거주하여 강을 성씨로 삼은 것이다”고 되어 있다.
《설문》은 신농이 거문고를 발명한 역사를 기록했다. “거문고는 신농이 만든 것으로, 붉은 실 다섯 줄을 써서 연습했고, 주나라 때 두 줄을 더했다.” 다섯 줄은 궁, 상, 각, 치, 우이며, 고금(古琴)은 “천지의 덕을 말하고, 신농의 화평함을 표현했으며”, 사람들의 정조(情操)를 도야했다.
이렇게 삼황은 인간의 윤리를 규범화하고 사람들에게 생활 기능을 전수하여 중화문명에 필요한 기초 조건을 다졌다.
신농씨의 후손은 이후 17대까지 이어졌는데, 모두를 염제(炎帝)라고 불렀으며, 마지막 대의 염제는 유망(榆罔)이라 했다. 유망 시기에 이르러 신농씨는 이미 쇠퇴했다. 이때 화하(華夏) 대지에는 중화문명의 큰 막을 여는 인문 시조가 탄생했는데, 바로 황제(黃帝)였다. 황제는 오제의 첫 번째이며, 황제 시기는 중국 5천년 역사의 시작이다. 중국인들이 흔히 ‘염황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염제와 황제가 우리 화하민족의 공동 시조라는 뜻이다.
그림2: 제(帝), 갑골문, 나무로 만든 제단으로 천제를 모심
《설문》에서 ‘제(帝)’에 대한 해석은 “제(諦)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호칭[王天下之號]이다”라고 되어 있다. 제는 심시(審視), 심찰(審察)의 뜻이며, ‘천하를 다스리는 호칭’이란 제가 천명으로 천하에 호령한다는 의미이다. 오제는 《역전(易傳)》, 《대대예기(大戴禮記)》 등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이다.
《설문》에서 황제와 관련된 글자:
“희(姬)는 황제가 희수에 거주하여 성씨로 삼은 것이다.” 황제는 거주지 희수의 희를 성씨로 삼았다.
“면(冕)은 대부(大夫) 이상의 관(冠)이다. 수연(邃延), 수류(垂瑬), 담광(紞纊). 모(冃)를 따르고 면(免)의 소리를 따른다. 옛날에 황제가 처음으로 면을 만들었다.” 황제는 관위(官位)를 설립하고, 관원이 쓰는 관면(冠冕)을 제작했다.
“치(畤)는 천지오제가 기초를 둔 곳으로, 지(地)에 제사지내는 곳이다. 전(田)을 따르고 사(寺)의 소리를 따른다. 우부풍(右扶風)에 오치(五畤)가 있다. 호치(好畤), 부치(鄜畤)는 모두 황제 시기의 제사다.” 오제 시기부터 천지에 제사지내는 전용 장소가 있었는데, 그중 부풍의 호치, 부치는 황제 시대의 제사 장소였다.
기록에 따르면 창힐이 한자를 발명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남아있지 않을까? 《설문》에는 “전(典)은 오제의 책이다. 서(書)가 기(丌) 위에 있는 것을 따르니, 존중하여 각(閣)에 두었다는 뜻이다. 장도(莊都)가 말하기를, 전은 큰 책이라고 했다”라고 되어 있다. 전의 본뜻은 바로 오제 시대의 책이다. 고고학자들은 황제 시기에 주로 황하 유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전책 문물이 황하의 흙과 모래에 밀려 묻혔을 수도 있어 발굴이 불가능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림3: 전(典), 갑골문,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전책(典冊)을 받들어 중요한 전례(典禮)를 기록함
일반적인 인상으로는 삼황오제가 신화 속에서 가공된 형상이지만, ‘활화석’이라 불리는 한자 속에는 삼황오제의 여러 측면의 정보가 진실하게 보존되어 있다.
(계속)
원문발표: 2024년 11월 11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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