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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분을 더럽히지 않다

글/ 기혜(起慧)

[명혜망] 현대 관료사회에서 많은 사람은 권세를 두려워하거나 출세와 돈을 위해 상관의 뜻에 맞추어 움직이며, 심지어 상관의 위법 행위에 동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인생이 하나의 큰 연극이라면, 그들은 후세에 관료가 갖추어야 할 품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다

왕돈(王敦)과 온교(溫嶠)는 동진(東晉) 시대 사람이다. 왕돈은 진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의 동진 건립에 공을 세워 대장군, 형주목(荊州牧)으로 임명되어 왕도(王導)와 함께 군정을 분담했다. 온교 역시 사마예를 추대해 즉위시킨 공로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되고 태자중서자를 겸임해 동궁태자 사마소(진 명제)를 보좌했다. 후에 사마씨가 의도적으로 왕돈의 세력을 억제하자 왕돈은 영창(永昌) 원년에 병사를 이끌고 수도 건강(建康)을 공격해 사마씨의 정권을 빼앗으려 했다. ‘세설신어’에는 왕돈과 온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왕돈은 병사를 이끌고 건강에 접근해 군대를 석두성에 잠시 주둔시켰다. 왕돈은 태자 사마소를 경계하며 그를 어떻게 명분 있게 폐위시킬지 궁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왕돈이 연회를 열어 손님들로 자리가 가득했을 때, 왕돈은 태자가 총명하다는 좋은 평판을 알고 있었기에 ‘불효’라는 명분으로 그를 폐위시키려 했다. 술자리 이야기 중에 왕돈은 태자의 불효 행위를 거듭 언급하며 “이는 모두 온교가 말한 것이오. 온교는 이전에 동궁태자를 보필했고, 이후에 내 사마(司馬)가 됐으니 그는 이러한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소이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 온교가 도착하자 왕돈은 위엄 있는 태도로 온교에게 물었다. “그대는 태자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온교는 “소인이 어찌 군자를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왕돈은 온교가 협조하지 않자 언색을 달리하며 자신의 권위와 권세로 사마소를 비방하는 자신의 뜻에 따르기를 바랐다. 그래서 다시 온교에게 “그럼 태자에게 칭찬할 만한 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온교는 여전히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태자는 학문이 광범위하고 깊어 저같이 견식이 얕은 사람이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예법에 따라 부모님을 섬겨 상당히 효성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교는 권세에 탐닉하지 않았다. ‘진서’에는 후에 온교가 연이어 공을 세워 조정에서 그에게 국정을 보좌하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온교는 왕도야말로 선제가 선택한 적임자라며 승진을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교가 세상을 떠난 후, 진 성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시중, 대장군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忠武)라고 했다.

예의를 지키고 직분을 더럽히지 않다

사마경(司馬冏)과 혜소(嵇紹)는 모두 서진 시대 사람이다. ‘진서’에 따르면, 제왕(齊王) 사마경은 진 혜제 사마충(司馬衷)의 복위를 도와 공을 세우고 중병을 거느려 진 혜제에 의해 대사마로 임명됐다. 사마경은 대사마가 된 후 보정대신이 되어 교만하고 전횡을 일삼으며 주색에 빠졌다. 혜소는 서진의 명신이자 문학가로 강직하고 권세에 굴하지 않았다. ‘세설신어’에는 사마경과 혜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사마경이 대사마를 맡고 있을 때 혜소는 시중이었다. 어느 날 혜소가 사마경에게 정무를 청하러 갔는데, 사마경이 연회를 베풀고 갈수, 동애 등을 불러 모아 함께 정사를 논의했다. 갈수 등이 사마경에게 “혜시중(혜소)은 음악 연주에 능합니다. 그에게 연주를 시켜보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말했고, 악기를 가져오게 했으나 혜소는 연주를 사양했다. 사마경이 “오늘 모두가 함께 즐기는데 그대는 왜 연주하려 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혜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공께서는 황실을 보좌하시니 처신이 뭇사람들의 모범이 되셔야 합니다. 제 비록 관직이 미천하나 상백(常伯)의 자리에 있습니다. 음악 연주는 악관의 일이오니, 선왕이 제정하신 관복을 입고서 영인[伶人, 악공(樂工)과 광대]의 일을 하여 제 관직을 더럽힐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명하셨으니 함부로 사양할 순 없고, 이 관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연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 마음에 있는 생각입니다.” 갈수 등은 자신들이 적절치 못함을 깨닫고 모두 물러났다.

혜소는 끝까지 예의를 지키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서’에 따르면, 조정이 사마영(司馬穎) 토벌전에서 패배하고 진 혜제가 부상을 입자, 백관과 시위들이 모두 도망쳤지만 오직 혜소만이 몸을 던져 천자를 보위하다 사마영의 군사에게 살해됐다. 이후에 진 부제는 혜소에게 익양후(弋陽侯) 작위를 추증하고 1경의 묘전을 하사하며 10호의 가족을 보살피고, 소뢰(少牢) 예법으로 제사 지냈다. 진 원제 사마예는 혜소가 고풍양절(高風亮節, 인격이 높고 절개가 굳음)하다고 여겨 다시 태위로 추증하고 태뢰(太牢) 예법으로 제사 지내며 혜소에게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맺음말

어떤 시대이든 도덕적 기준은 같다. 온교가 권세에 굴하지 않고 고위직을 사양한 것, 혜소가 관직을 더럽히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많은 사람이 칭찬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와 비교해보면, 많은 공직자가 상관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상관의 행정명령이나 심지어 구두 지시에 따라 법령을 어기고 국민을 괴롭히는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도덕이 타락하고 사회 풍기가 무너지면 민심이 안정되지 않을 것이다.

 

원문발표: 2024년 3월 24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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