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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쌓아 흥하다가 덕을 잃어 패망한 황제 부견

글/ 기혜(起慧)

[밍후이왕] 부견(苻堅)은 자가 영고(永固)이고 저족(氐族) 출신이며 위진남북조 시대 전진(前秦)의 3대 황제다. ‘자치통감’에서는 부견을 ‘효성이 지극하고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있으며 박학다식하다’라고 평가했다. 부견은 불교와 유가를 군주의 덕으로 깊게 믿었고 재위 기간 북방을 통일해 오랫동안 전란의 고통을 겪던 백성들을 20여 년간 편안히 살게 해줬다.

전진(前秦) 개요

전진(前秦, 350~394년)은 16국 가운데 하나다. 서진(西晉) 말기에 약양(略陽)의 저족은 귀족 부홍(苻洪)을 수장으로 내세웠다. 350년, 부홍은 관중(關中)을 점거하고 스스로 대장군·대선우(大單于)·삼진왕(三秦王)이라 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홍은 독살됐고 셋째 아들 부건(苻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백성을 통치했다.

351년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세우고 부건은 스스로 대진천왕(大秦天王), 대선우라 칭했다. 352년, 왕에서 황제로 개칭하고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으며 국호를 ‘진(秦)’이라 했다.

355년, 부건이 죽자 아들 부생(苻生)이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부생은 포학무도해 걸핏하면 간언하는 신하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357년 부건의 동생 부웅(苻雄)의 아들 부견(苻堅)은 “상탕왕(商湯王)과 주무왕(周武王)을 본받고 하늘의 이치를 따라 포학무도한 하걸왕(夏桀王)과 상주왕(商紂王)을 토벌하십시오”라는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여 부생을 폐위시켰다.

부생 폐위 후, 부견은 그의 형 부법(苻法)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했지만 부법은 자신이 서출 출신이라 황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부견이 군신의 권유로 황제에 즉위했다. 370년부터 전진은 전연(前燕), 전량(前凉) 및 대국(代國)을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했다.

‘전진’이라는 명칭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됐다. 왕실의 성씨가 부씨이기 때문에 ‘부진(苻秦)’이라고도 한다.

사회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구휼하다

당시 전란으로 사회는 오랫동안 법으로 다스릴 수 없어 귀족과 부호들이 백성을 억압했고 수많은 탐관오리가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도모해 민생이 어려워졌다. 사회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부견은 한편으로는 경조윤(京兆尹, 장안과 그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특수 지방장관)인 왕맹(王猛)과 중승(中丞)인 등강(鄧羌) 두 사람을 시켜 악행을 하는 귀족과 부호들을 조사, 처벌하게 했다. 부견은 심지어 왕맹을 반대하는 자신의 친척 강호(强豪)를 신하들 앞에서 처벌해 이때부터 권세를 믿고 백성을 억압하던 강호는 더 이상 악행을 하지 못했다.

부견은 다른 한편으로 흠사(欽使, 황제가 보내는 사신)를 파견해 곳곳을 시찰하게 하여 홀아비와 연로자를 구원하고, 형벌이 불공평하고 백성을 고통받게 한 관리를 징벌하며, 덕행이 좋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 농경을 촉진하는 사람 및 재능이 출중하고 효제충의(孝悌忠義)한 사람을 표창했다. 부견은 또 청송관(聽訟觀)을 설립해 백성에게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봉화를 피울 수 있다고 조서를 내렸고, 봉화가 보이면 친히 청송관에 가서 억울한 사건의 발생을 줄였다.

부견은 또 농경을 촉진해 백성을 편안히 쉬며 안락하게 지내게 했다. 어느 해 가뭄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부견은 솔선수범해 자신의 식단을 줄이고 노래와 음악을 없애며 금옥과 비단을 전부 장병들에게 나눠줬다. 또 후궁들에게는 값비싼 옷을 입지 말고 옷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짧게 줄일 것을 명했다. 부견은 또 직접 경작을 하기도 했으며 황후 구(苟) 씨도 근교에서 누에를 길렀다. 이와 함께 조정은 산림과 호수 자원을 백성들에게 개방하고 전쟁을 중지해 많은 백성이 수혜를 입었다.

간언을 받아들이고 잘못을 고쳐 도덕이 밝아지다

부견은 간언을 받아들여 스스로 성찰할 수 있었다. ‘진서(晉書)’의 기재에 따르면, 부견은 일찍이 업성(鄴城)의 서산에 가서 10여 일 동안 사냥을 즐기며 본분을 잊었다. 그러자 신하 왕락(王洛)이 “폐하는 백성의 부모이시고 창생의 기둥이신데 사냥 중에 불상사가 일어나면 이 나라와 태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간언했다. 부견은 잘못을 시인하고 이때부터 다시는 사냥하지 않았다.

또한, 전진이 북방을 통일한 후 국고가 가득 차자 부견은 어느새 사치에 빠져 궁궐, 마차, 기물을 모두 진기한 보물들로 장식했다. 그러자 상서랑 배원락(裴元略)이 부견에게 “요(堯)·순(舜)·주(周)나라 모두 근검절약을 숭상해 세 왕조 모두 장기간 나라가 태평하고 사회 질서와 생활이 안정됐습니다. 폐하께서도 금옥을 가벼이 여기시고 보물을 멀리 하셔야 민풍이 돈후하고 사치스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간언했다. 그러자 부견은 호화로운 물건을 치웠고 배원락을 칭찬하며 승진시켰다.

부견의 인덕(仁德)이 담긴 정치로 백성들은 편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됐고 도덕성도 높아졌다. 백성들은 “장안의 큰길에는 양옆에 버드나무가 가득 심겨 있고 아래에는 귀한 마차가 오가네. 위로는 현명한 사람들이 조정에 있고 뛰어난 재능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 이곳에 모여 백성을 가르치네”라고 노래했다.

덕으로 여러 민족을 융합하다

부견은 중국 역사상 여러 민족을 융합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당시 각 민족은 원한을 품고 서로를 살해했지만 부견은 덕으로 여러 민족을 회유해 민족 융합을 촉진했다. 부견은 부융(苻融)이 전연(前燕)의 황족인 모용위(慕容暐) 일족을 제거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자네의 덕행은 아직 부족해 옳고 그름의 판단이 불분명하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경(詩經)’에서는 ‘덕행은 깃털처럼 가볍지만 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했네. 높은 지위에 있으면 전복을 조심해야 하고, 국가의 정사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백성은 편히 쉬며 안락하게 지내는 것이 필요하고, 민족은 서로 간의 화목이 필요하며, 이래야만 비로소 각 민족이 하나로 융합될 수 있다네. 천도를 따르면 순조롭게 뜻대로 이루어지고 덕행을 수양하면 재앙을 없앨 수 있네. 스스로 잘못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떤 외환이 두렵겠는가?”

부견은 자신이 주장하는 인의의 도를 실행에 옮겼다. 어느 해 그는 여광(呂光)에게 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도록 명했고 건장궁(建章宮)에서 그를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융(西戎)은 예의지국이 아니므로 그들을 굴복시키는 방법은 항복시키면서 사면해 중국의 위엄과 어진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니, 왕법으로 그들을 인도하되 절대 무력을 휘둘러 잔혹하게 살해하거나 약탈해서는 아니 되네.” 그해 익주(益州) 서남이(西南夷, 서남부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 민족), 해남제국(海南諸國)은 모두 자발적으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또한 부견이 선비족(鮮卑族,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이 세운 대국(代國)을 정벌할 때, 대왕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의 아들 익규(翼圭)가 아버지를 결박해 항복을 청했다. 이후 부견은 익규가 이렇게 한 것은 불효라고 여겨 촉(蜀)지방으로 귀양을 보냈고, 아버지 십익건 역시 예의와 인의를 모른다는 이유로 그를 태학에 보내 예의를 배우게 했다.

또 한번은 흉노왕 위진(衛辰)이 사자를 파견해 부견에게 투항하며 내륙에서 경작하고 싶다고 청하자 부견은 동의했다. 그런데 나중에 운중호군(雲中護軍) 가옹(賈雍)이 기병을 보내 흉노족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부견은 화를 내며 말했다. “짐은 마침 위강화융(魏絳和戎: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장군 위강이 주변 민족 융족과 화친을 맺은 일)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는데 작은 이익 때문에 큰 신의를 져버려서야 되겠는가. 원한은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네. 국경을 어지럽히고 군대를 일으키며 대중을 선동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복이 아니니 약탈한 물자를 전부 되돌려 보내게.” 아울러 가옹을 해임해 백의종군하게 했으며 사자를 파견해 흉노와 화해를 도모해 조정의 신의를 분명하게 보였다. 나중에 흉노왕 위진이 부족을 이끌고 국경 안에 거주했는데 공물을 끊임없이 보냈다.

하늘의 뜻을 거슬러 비수에서 패망하다

부견은 북방을 통일한 후 줄곧 천하를 통일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정벌하려던 동진(東晉)에는 환충(桓衝), 사안(謝安) 등 훌륭한 인재가 많았고, 군신이 화목하고 백성도 동진 황실을 기꺼이 따랐지만, 부견은 정당한 이유 없이 군을 보내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벌였다.

부견이 가장 믿었던 승상 왕맹은 죽기 직전 부견에게 말했다. “동진은 비록 외진 오월(吳越) 지역에 세워졌지만 정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덕이 있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이웃 나라와 친해지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신이 죽은 후, 폐하께서 동진을 정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부견의 가장 재능 있는 동생인 부융(符融)도 나라가 많은 전란을 겪었고 병사들도 지쳤기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383년, 부견은 기병 27만과 보병 60만을 이끌고 남하해 동진을 총공격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부견은 동진의 5천 병마의 기습 공격을 받고 대패했다. 동진의 군대는 승세를 타고 서쪽으로 나아갔고 양군은 비수(淝水)에서 격돌했으나 결국 전진이 크게 패했다.

비수 전투가 끝난 후, 원래 전진에 귀속됐던 다른 민족들은 잇달아 기회를 틈타 독립했다. 결국 부견의 부하장수였던 고강인(古羌人) 요장(姚萇)이 전진을 멸하고 후진(後秦)을 세웠다. 385년, 부견은 반란을 일으킨 요장에게 포로로 잡혔다. 부견은 선위(禪位: 왕위를 물려주는 일)를 해달라는 요장의 요청을 거절하고 충의를 저버린 요장을 엄하게 질책했다. 부견은 수감된 사찰에서 옷을 단정히 입고 예불한 다음 태연하게 요장의 교살(絞殺)을 받아들였다.

맺음말

부견은 하늘의 뜻을 따라 덕을 쌓고 포학무도한 부생을 무너뜨리며 덕정을 베풀어 흥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덕을 끝까지 베풀지 않고 정당한 이유 없이 군을 일으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했고, 결국 하늘의 뜻을 거슬러 죽음을 맞이했다.

 

원문발표: 2023년 4월 17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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