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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작] 과학의 자백​

글/ 이밍(一鳴)

[밍후이왕] 나는 과학이다. 현대인들은 나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매우 많다. 서양에서 나의 실체는 ‘실증과학’의 모든 내포를 대신하고, 중국에서는 나를 ‘올바름’ 또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의 대명사로 여긴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언제부터 생겨났는가? 어떻게 생겼는가? 내게는 어떤 한계가 있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과학정신이란 무엇인가? 대중들은 이를 모두 홀시하거나 무시하는 것 같다. 이 기회에 간단하게 나 자신의 명칭을 바로잡아 보고자 한다.

1. 과학의 정의

먼저 과학의 정의를 말하면, ‘과학’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정의 내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기본적인 상황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정의 방식이 사물의 속성을 논하는 정확한 방식인지는 차치하고, 먼저 독일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가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니체는 비역사적 존재에 대해서만 적절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변화무쌍한 사물에 대해서는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단언하기가 어렵다.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줄곧 정확한 정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 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발전해 왔다. 과학기술계는 나(과학)에게 수많은 정의를 내렸지만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특히 중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기존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유래한 ‘과학’ 개념의 내포를 대부분 상실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현재 중국학계가 경악하는 사실은, 중국의 학술용어 중 60% 이상이 일본어 번역에서 온 한자라는 점이다. 무슨 뜻인가? 바로 철학, 경제, 사회, 법률, 과학 등등 많은 학술적인 전문용어는 일본어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일본어 한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문제는 일본어 한자가 고대중국 한자의 뜻과 다르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哲學)’의 ‘철’은 일본어에서는 ‘총명하다’는 뜻으로 철학은 ‘총명지학(聰明之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필로소피(philosophy)’로 ‘지혜를 사랑함’을 뜻한다. 고대 중국어로 쓰여진 ‘설문(說文)‘에서도 ‘철’을 ‘지혜(智也)’라고 해석하고 있다. 지혜는 총명이 아니지 않는가?! 또 ‘사회(社會)’라는 말도 고대 중국어에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가리키는 것이지 단순한 재무경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科學)’이란 용어 역시 잘못된 번역이다. ‘과학’은 일본어에서는 ‘분과(分科)의 학문’을 뜻하는데, 이게 무슨 내(과학)가 처음 생겼을 때의 그 본래 의미인가? 그에 비해 고대 그리스의 ‘과학’이라는 말의 의미에 좀 더 가까운 해석은 ‘과학은 일종의 지식’이라는 말이다. 즉 과학은 자연과 사회, 사유에 대한 지식 체계이다.

‘과학’에 대해 아직까지는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통일된 정의가 없다. ‘과학’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나라마다, 학자마다 다르다. 서양어에서 ‘과학(Science)’은 세상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지식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다양한 도구와 제품을 만들어 생활에 활용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과 우주를 탐구하기도 한다.

2. 과학의 발전 과정

과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했다.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필요성과 인체, 생명, 우주탐사에 대한 호기심 충족이 최초의 발전 동력이었다.

학계에서는 5천 년 전 중국 황제시대에 최초로 수학 지식과 수학 도구를 발명한 것으로 본다. 2천5백 년 전 거의 동시에 등장했던 불교와 도교는 생명과 우주를 인식하는 새로운 과학 체계를 가져다주었다.

‘서양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인 탈레스(Thales of Miletus, 기원전 약 624~약 546)는 자연법칙을 해석하는 수학언어를 창조했다. (그는 수학의 중요한 다섯 가지 정리를 발견하고 증명해냈다; 역주) 아랍인들은 전통적인 서양과학을 새로운 번영의 시대로 이끌어 연금술, 대수, 천문학 등에서 독특한 공헌을 했지만, 12세기까지만 이어졌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과학기술의 발전이 17세기까지 이어졌다. 7세기 당나라에서 17세기 명조말까지 1천여 년 동안 발전하면서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한 신앙과 과학이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체계 속에서 농(農)· 의(醫)· 천(天)· 산(算) 4대 학과는 물론 도자기, 견직, 건축 등 3대 기술은 옛 중국인들의 지혜의 결정체가 되었다.

11세기 이후 유럽의 십자군은 아랍인들로부터 중국의 4대 발명품과 그리스 학문을 도입했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그리스의 자연철학적 인식을 전반적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이후 코페르니쿠스, 뉴턴 등 저명한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17세기부터 18세기를 거쳐 과학의 세기로 불리는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전기, 자기, 광학 등을 알게 됐고 천문학 등의 발전으로 끝없는 우주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이는 인류 역사 발전 속에서의 짧은 과학 발전 과정이다. 실증과학이 시작한 이후로 지금의 과학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몇 백 년에 불과하다

3. 과학의 한계

다윈의 진화론은 항상 서양 실증과학의 근간으로 여겨져 왔다. 중국에서는 집권자가 폭력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진화론을 인정했다. 하지만 서양 과학계에서는 초기부터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학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영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헉슬리(​Huxley, Thomas Henry)는 적극적인 진화론의 옹호자로, 옥스퍼드 대주교 윌버포스로부터 모욕적인 조롱을 받았다. 대주교는 “헉슬리 씨,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할아버지를 통해 물려받은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할머니를 통해 물려받은 것인가?”라고 조롱했다. 진화론의 결함의 관점에서 과학이 당면한 발전 측면에서 본다면 윌버포스 주교의 조롱은 상당히 중요한 과학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인데, 이는 학계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과학발전의 맥락에서 볼 때 과학은 20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분자생물학이 출현했고, 인체와 생명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전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다. 동시에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과 함께 인간은 물질적인 향유와 소유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었다. 물질적으로 삶이 풍요로워지고 시간과 공간이 점점 가까워지는 반면에 사람들의 정신적인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시간과 공간이 단축됐지만 오히려 이것이 사람들 서로간의 마음을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과학의 무절제한 발전은 결국 핵 위협, 생태 위기, 에너지 위기, 문화적인 위기에까지 이르게 되어 각국 정부의 중대한 문제로 떠오르게 됐다.

많은 중국인의 눈에는 내(과학)가 보물 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과학의 성공적인 이면에는 잠재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무분별한 대규모 자연개발로 더 많은 에너지를 확보함에 따라 점차 인간생존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이 드러나고 있다. 지구에 매장되었던 자원들은 석탄, 석유의 과도한 채굴로 이미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지구에서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다면 모든 생존 기반이 무너질 것이다. 단지 전력만 없어져도 휴대전화, 컴퓨터 등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현대인은 당장 끝없는 암흑 속에 떨어지게 될 것이며 모든 문명이 거의 다 사라질 것이다.

중국의 전통과학은 일찌기 중용(中庸)의 개념과 도리를 명시해왔다. 어떤 것이든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반드시 훼멸된다는 것이다.

나(과학)는 일종의 지식일 뿐이므로 인류를 위해 잘 활용하면 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절제하게 사용하면 인류는 자멸할 것인 바, 그렇게 되면 ‘과학’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꼴이 될 것이다.

4. 과학 정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은 과학에 대해서 진정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문제의 해결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오랜 과학 문제에 대한 재구성이나 참신한 묘사를 포함해, 문제 제기야말로 진정으로 세계에 공헌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과학적인 정신은 무엇보다도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알려줘야 한다. 과학이 절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우주와 인간세계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과학자들도 과학으로 모든 답을 찾을 수는 없다. 현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서양 철학자 칼 포퍼가 제시한 ‘반증 가능성’ 원칙에 따르면, 과학이 대답할 수 있는 한계는 반증 가능한 질문, 간단히 말해서 관찰할 수 있는 반증의 가설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백조가 흰색이라는 가설에서 한 마리의 흑조가 발견됨에 따라 가설이 반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 철학, 문학, 예술 등 인문 학문 분야의 문제들은 반증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며 다만 과학적 답변의 범위 안에 있지 않을 뿐이다.

내(과학)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수없이 많은데, 외계인의 존재 여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니스호수의 괴물, 버뮤다 삼각주, 임사체험, 육감, 각종 기현상, 우주의 가장자리는 어디까지인가 등등은 과학인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들이다. 불교의 수련자들이 열반이나 입적 시에 흔히 보여주는 홍화(虹化) 현상 같은, 반증할 수 없는 다양한 종교적인 신적(神跡)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홍화의 현상을 목격했지만 그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티베트족 역사기록에 의하면 득도한 고승이 홍화 하면 몸이 무지개 빛으로 변해 공중으로 사라진다고 전한다.

기독교의 두 가지 큰 기적인 ‘동정녀의 아들 출산’과 ‘예수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워 많은 사람이 믿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 탄생은 인류 역사의 새로운 분수령을 이루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을 기원전(B.C. Before Christ)이라 하고, 그리스도가 태어난 이후를 기원후(A.D. Anno Domini ‘우리 주의 해’)라고 하지 않는가.

예수의 신적은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에 기록돼 있다. 예수가 행한 신적 중에서도 병을 고치고, 마를 쫓고, 자연계를 지배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등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그 외 모든 신적을 해석하려면 보다 더 높은 과학적 방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중국 한의사가 말하는 맥락(脈絡)이나 기공, 주역, 팔괘 등등은 모두 그 심오함이 감탄할 만하다! 1992년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전하신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여러 가지 신적들은 과학의 어떤 논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두 잘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겠다. 코로나19 전염병이 2019년에 발생해 전 세계에 퍼져 3년째 접어들고 있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알려진 모든 서방국가와 학자들은 코로나 전염병의 출처와 대처법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바이러스의 끊임없는 ‘과학적 변이’는 전 세계 과학자들을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게 만들었고, 결국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학의 한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사실 가장 중요한 과학정신의 또 다른 한 가지는 비판적 사고인데, 다시 말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내가 과학의 이름을 바로 잡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나는 과학이 전능하다고 말하지 않으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라는 것과 과학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전능한 자로 만든 것은 인간의 욕심과 억제하지 못하는 끊임없는 추구였다.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단체는 나를 몽둥이로 삼아 그들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일과 현상에 대해 나를 휘두르며 “당신은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난한다.

거듭 말하는데, 나는 과학정신이 있는 것이며, 과거에 대해 의심을 던지는 안목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시 생각하고, 논증하고, 연기하고, 실험하면서 마침내 과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이론의 결함과 결핍은 차치하더라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범적인 의심이었으며, 이것들은 결국 과학의 중대한 진전을 가져왔다.

특히 분명한 것은 내가 현재는 ‘실증과학’의 개념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이다. 실증과학의 연구라는 것은 정의를 내리고 엄밀한 수학 논리에 기초에 추론하는 한편, 동시에 ‘현대과학의 아버지’ 뉴턴이 정리한 과학 패러다임에 근거해 다시 거듭해서 실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는 실증과학을 넘어선 것들에 대해서는, 즉 그것들을 정의할 수 없고 실험을 반복할 수 없으면 이른바 ‘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증과학은 지난 몇백년 동안 인간의 물질생활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진정한 과학정신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과학적으로 한 마디 평을 해본다면, 실증과학은 결코 과학의 전부가 아니며, 실증과학은 단지 과학의 일부분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실증과학은 뚜렷한 장점 외에, 더욱 뚜렷한 한계와 결함을 갖고 있다.

5. 맺음말

인체, 생명, 우주를 설명하거나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어떤 학문이든, 그것이 학문의 범주에 속하든 종교의 범주에 속하든 간에, 그것은 과학이며, 어쩌면 실증과학보다 훨씬 더 높은 과학일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다른 분야의 지식에도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반성하며 끊임없이 학문적 포용성을 넓히면서 사실을 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의 태도이고 과학의 본성인 것이다.

지면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것으로서 간단하게나마 ‘과학’이라는 내 이름을 바로잡아보았다. 더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계속해서 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스스로 진정한 과학정신을 갖고 과학의 전모에 대해 과학적 연구를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원문발표: 2022년 3월 23일
문장분류: 천인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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