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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어부

글/ 리칭(李青)

[밍후이왕] 중국 5천 년 역사에서 정사(正史)는 겨우 24부에 불과하고, 역사가(史家)의 눈에 들어 24사에 기록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드물고 귀하니,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제일의 사서로 불리는 사기(史記)에 한 어부가 이름을 올렸다. 이 어부는 무엇 때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을까?

초평왕(楚平王)은 참언(讒言)을 듣고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와 형을 살해했으며, 초상을 그려 현상금을 내걸고 오자서까지 붙잡으려 했다. 오자서는 어쩔 수 없이 도망쳤다. 먼저 송나라와 정나라로 도망갔으나 모두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결국 태자 건의 아들을 데리고 함께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자서가 소관에 이르렀을 때 소관의 관문을 지키는 관리가 그들을 붙잡으려 했다. 오자서는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추격해 붙잡으려는 관리도 바짝 뒤를 쫓았다. 오자서가 강가로 도망쳤을 때, 마침 강에 어부가 배를 저어왔다. 어부는 오자서의 상황이 매우 급박한 것을 알고 오자서를 배에 태워 강을 건너게 했다.

강을 건넌 후, 오자서는 몸에 지닌 검을 풀며 감격해 말했다. “이 검은 백 냥 값어치가 있는데,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어부가 대답했다. “초나라는 법령으로 오자서를 붙잡은 사람에게 조와 쌀 5만 석을 주고 집규(執珪: 춘추전국시대 때 초나라 작위 등급의 하나로, 지위는 봉국의 군주에 해당한 고위직)의 작위에 봉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그게 어찌 백 냥 값어치의 보검뿐이겠습니까!”

어부가 오자서의 보검을 단호하고 정중하게 거절하자, 오자서는 어쩔 수 없이 어부에게 작별을 고하고 오나라로 들어갔다.

어부는 초평왕이 큰 상을 걸고 오자서를 붙잡으려 한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오자서 일가의 억울한 사정 역시 알고 있었다. 오자서가 위급할 때, 어부는 의연하게 오자서가 강을 건너게 해주었고, 또 오자서의 진심 어린 보답을 마다했는데, 이 얼마나 고결한 사람인가! 사마천은 이 단락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어부에게 틀림없이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이 선량한 파룬궁 수련자들을 광적으로 박해할 때, 파룬궁 수련자들을 돕는 양지가 있고 진상을 명백히 아는 사람도 매우 많다. 이런 마음씨 좋은 사람 중에는 관리와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 사법기관 관계자를 포함한 국가 공무원이 있는 것은 물론 일반 국민도 포함돼 있다. 그들은 자신의 편리한 여건을 활용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묵묵히 파룬궁 수련자들을 도우면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이런 ‘어부’들도 반드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역사가 이 한 페이지를 넘길 때, 인류는 영원히 이 ‘어부’들의 위대함을 영원히 마음 깊이 새길 것이다!

[‘사기(史記) 오자서 열전 제6편’을 참고함]

 

원문발표: 2022년 2월 14일
문장분류: 천인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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