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르노 H.
[밍후이왕](전편에 이어)
회화 속의 시간
사람들은 사실 하나의 시공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여러분이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뇌 신경을 통해 대뇌에서 전달되는 데는 찰나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사람들이 ‘현재’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현재’는 이미 찰나의 과거가 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감지하는 것은 단지 길이, 너비, 높이로 이루어진 공간 환경이 아니며, 늘 시공이라는 개념 속에서 시시각각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다.
회화는 또 자연히 시간에 대한 표현과 연관되는데, 예를 들어 작품 속의 역동적인 묘사, 연속적인 서사화의 구도 등등이 바로 시간이라는 요소를 평면에 투사하는 방법이다.
가장 보편적인 화법은 구도, 명암, 색채를 통해 일종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방식인데, 이런 표현 방식은 공간의 정지된 순간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연속되는 경향을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 바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동적인 느낌’이다. 여기에서는 라파엘의 유화 ‘사탄을 물리치는 성 미카엘’을 통해 이러한 기교를 간략히 소개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모두에게 비교적 친숙할 것이다. 작품은 ‘성경 계시록’에 언급된 성 미카엘과 큰 붉은 용 사탄이 싸우는 장면이며, 붉은 용이 땅에 던져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에서 사탄을 사람 모습의 마귀로 그렸지만, 그의 정체를 나타내기 위해 뱀 꼬리가 보이게 했다. 이는 ‘계시록 12장 9절’에 이렇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화가는 악마가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정의가 결국은 악과 싸워 이긴다는 주제를 표현했다.
작품의 기법과 관련해 먼저 빛과 그림자의 사용을 이야기하겠다. 이 작품의 조명 배치에는 독특한 미적 감각이 있는데 작품 속 성 미카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암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약간 비스듬한 선을 형성해 그림의 전체 명암을 합리적으로 둘로 나눈다. 왼쪽 절반은 조금 밝고, 오른쪽 절반은 약간 어둡게 해 명암이 대비되는 경향을 만든다. 동시에 성 미카엘의 상반신이 아주 밝았지만, 작품 중간 부분은 옷과 환경의 고유한 색으로 인해 어둡고, 가장 아래에는 또 빛을 받은 마귀의 신체가 약간 밝아서 전체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밝고, 어둡고, 약간 밝은’ 리듬을 이루어 일종 예술적인 조명 효과를 얻는다.
이렇게 빛과 인물이 어우러지는 움직임과 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쬐는 형세는 작품에서 큰 작용을 일으킨다. 우리는 광선이 위에서 아래로 비추는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상징하며, 그래서 광원이 직접 비치는 성 미카엘의 머리, 가슴, 팔 부분이 가장 밝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 더해 광원에서 멀리 떨어진 악마는 자연히 밝지 않아 위에서 아래로 빛이 쏟아지는 형세를 다시 한번 암시한다. 또한 성 미카엘의 밝은 상반부는 공간의 폭이 넓고, 하반부에 있는 다리와 발의 공간이 좁은데, 무기와 다리가 이루는 협각과 합쳐지면서 아래로 창을 찌르는 모습에 매우 강렬한 동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회화가 비록 공간 예술에 속하지만 이런 공간은 정지된 일순간으로 보이지 않으며 분명히 시간적 흐름을 지니고 있다. 즉, 성 미카엘이 하늘에서 내려와 마귀를 밟고 창으로 내리 찌르는 일련의 동작이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근거로 자연스럽게 전후의 시간을 연상할 수 있다.
색깔 측면에서는 정의로운 쪽의 냉온 색상 대비가 더욱 풍부하다. 이는 성 미카엘의 배경이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고, 피부와 갑옷이 따뜻한 색이며, 날개에 차갑고 따뜻한 색의 깃털이 함께 있고, 팔에 파란색 옷이 걸쳐져 있어 이런 따뜻함과 차가움의 대비가 풍부한 색감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다시 사탄을 보면 몸이 지면에 있고, 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명암 대비와 냉온 대비가 더욱 약하며, 더욱더 어둡다. 이런 기법은 또한 정의로운 쪽을 밝고 다채롭게 하며, 사악한 쪽을 쇠약하고 어둡게 한다.
이러한 함의적인 구도 방식에서는 또 정의로운 쪽이 그림 대부분을 차지하고, 사악한 쪽은 작은 부분을 차지해 정의가 악보다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동시에 우리는 성 미카엘의 얼굴이 정면을 향하고 밟힌 악마는 땅에 엎드려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나지 못해 얼굴이 비틀리고 일그러져 있음을 투시하게 된다. 이런 기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정의가 밝고 힘차며 자신 있고 아름답지만, 악은 어둡고 약하며 두렵고 추함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화가의 기법이 상당히 좋다. 작품 화폭은 크지만, 인물의 조형이 완벽하고, 명암의 전환이 부드러우며, 표정과 태도가 자연스러워 그림 속 상황과 부합한다.
이렇게 다이내믹한 분위기를 묘사해 시간의 연속성을 표현하는 기법은 미술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회화 언어 중 하나다. 시간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도 많지만 가장 직설적인 방법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그린 것이다. 시간은 원래 형체가 없는 신이지만 신화에서는 자주 형체를 드러내는데, 예술 작품에서는 대부분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 시켜 긴 시간의 존재와 무수한 시대를 겪은 노련함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때때로 시간이 쏜살같이 가며, 때론 시간이 비틀거리며 간다고 느끼는데, 이런 것이 모두 작품 속 이미지에 나타나 있다. 등에 날개를 달고 있는 노인은 손에 시간을 계산하는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데, 화가는 이렇게 쉽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시간 신의 신분과 직능을 표현했다.
물론 또 다른 방법들이 있고 어떤 것은 이미 현재 보기 어렵지만, 역사적으로는 존재했다. 여기에서는 이런 유형의 작품을 예로 들어 간단히 소개할 수 있다.
이는 한 폭의 서사화로, 예수의 수난 초기 감람산에서의 기도, 십자가에 못 박힘, 이후 부활, 마지막으로 승천하는 일련의 장면이 교묘한 구도로 펼쳐져 있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또 구름과 안개가 걷히도록 해 구름 뒤 천국 세계를 묘사했다. 이렇게 하나의 화면에 서로 다른 시간의 장면을 동시에 표현하고, 인간과 신의 두 공간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식은 역대 서양인들에게는 이미 관습적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작품 속에 단일한 타임라인의 확장을 나타낼 수 있고, 구도상 서로 다른 운명을 선택한 상황 전체를 표현할 수 있으므로 예술로 그려낼 수 있는 시공은 절대 하나뿐이 아니다. 거기에서 시간은 단지 하나의 고정된 숙명의 선이 아니며, 동시에 여러 가능성, 즉 서로 다른 선택을 통해 서로 다른 운명과 미래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숙명론 관점에서 볼 때 인생의 길은 심지어 일찍이 확정된 것으로 층층의 배치가 있다. 유일한 자유 의지는 생명 자체의 바른 생각의 강약과 도덕적 선택이다. 천당과 지옥의 장면이 동시에 나타나거나, 사람들에게 선택하게 하는 그림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평면상에 다중 시공 개념을 표현한다.
15세기 플랑드르 화가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은 그의 ‘본 제단화’에서 연장 방식의 전통적 구도를 이용해 ‘최후의 심판’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표현했다. 그림 중앙 상단에는 예수가 앉아 있고, 양옆 구름 속에는 일부 성도와 천사들이 그려져 있으며, 그림 정 중앙에는 중생을 심판하는 성 미카엘이 정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상에서는 죽은 사람들까지 부활해 심판을 받으며, 성 미카엘이 그들의 선악을 저울질한다. 선한 사람은 화면 왼쪽 천당으로 인도되며, 악인은 오른쪽 지옥으로 던져진다.
사실 성 미카엘의 재판과 관련해 적지 않은 언어학자, 역사학자, 종교학자들이 어원과 세계 여러 민족의 종교, 신화의 관점에서 기원을 줄곧 추적해 왔다.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미카엘, 메시아, 미륵 등의 이름은 모두 같은 신을 지칭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하고, 천지를 법으로 바로잡으며, 중생의 선악을 저울질해 그들이 돌아갈 곳을 결정한다.
그가 친히 속세로 내려오므로 성 미카엘은 지상에 서서 중생과 접촉하게 된다. 지면과 천당, 지옥이 비록 같은 공간에 있지 않지만, 화면에서는 동시에 표현된다. 이 그림에서 중생이 갈 곳도 천당과 지옥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고, 심판을 받는 중생에게 심판 이후의 시간은 마찬가지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미래를 의미한다.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최후의 심판이 중생에게는 두렵고 긴장되는 최후의 순간이다. 그러나 사람들도 모두 알듯이 중생의 행방에 대한 판결은 그들이 과거에 행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근거로 내려진다. 선에는 선의 응보가 있고, 악에는 악의 응보가 있어 악을 행하지 않으면 악의 응보도 없고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 황폐해진 오늘날, 또 얼마나 되는 사람이 이것을 믿을 것인가? 현대 과학이 장악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믿는 것은 금전, 권력, 이익, 욕망이며 수많은 사람은 심지어 불도신(佛·道·神)을 옛사람의 ‘우매한 상상’으로 여긴다. 신성하고 바른 믿음은 거꾸로 ‘봉건 미신’으로 정의되어 비웃음을 산다. 스스로 도덕 소양 제고를 위해 노력하는 수련자는 정신이상자로 취급되면서 가볍게는 차가운 조소와 신랄한 풍자,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며, 심하면 박해와 타격의 목표가 되어 참혹한 고문과 학대를 당하고 심지어 생체장기 적출로 학살된다.
자신이 신봉하는 신과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은 인류 문화 속에 아주 일찍 형성됐으며 원래는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수련 방식에서는 신과 부처 이름 등등을 공손히 암송할 것을 요구하는데, 점차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모르는 사이에 언어 습관을 형성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일을 아름답게 완성한 것이 보일 때 부처를 믿는 사람들은 종종 “나의 부처님은 자비로우시니, 좋고도 좋구나!”라며 감탄한다. 도를 믿는 사람은 아마 “복이 무량합니다, 천존이시여!”라고 암송할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우리 하느님 덕분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믿으면 곧 그의 이름을 암송한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중국 네티즌들은 같은 상황에 부닥칠 때 “666, 대단해!”라고 외친다. 666이 무슨 뜻인지 모두 알겠지만 ‘계시록’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짐승의 수’와 관련이 있다(역주: 바이두 백과에 따르면 666은 牛牛牛와 같다고 한다). 짐승의 수는 바로 숫자 666이며, 신을 적으로 여기는 사악한 짐승의 이름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출처도 다르며 우연의 일치라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은연중에 하늘의 뜻이 있다”는 옛말도 있는데 그것이 사람의 반성과 깨우침을 끌어낼 수 없지 않겠는가?
지금은 윤리, 도덕, 선악이 무너진 시대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종교와 신화에서 묘사된 말세의 광경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전 세계의 식량 위기, 급격한 출산율 하락, 도처에 만연한 전염병, 끝없는 각종 천재 인화, 끝없는 사망자 증가…. 속담에 “선악에는 결국 응보가 있다”고 했다. 전통문화에서는 인과를 중시하며 어떤 원인을 심으면 어떤 결과를 얻는다고 한다. 사람에게 피의 깃발을 향해 독한 맹세를 하게 하고, 사람에게 짐승의 표를 새기고, 신이 창조한 대지 위에 ‘무신론’을 퍼뜨린 붉은 용이 자행하는, 수련 단체에 대한 박해는 신불(神佛)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천지간에 가장 큰 죄악이다. 따라서 붉은 용과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선과 악의 싸움 이후, 최후의 실패와 가장 가혹한 하늘의 징벌에 직면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에서 모두 언급한 것이다.
말세의 환경에 처한 중생으로서 가장 현명한 길은 바로 불도신(佛·道·神)의 편에 서서 수련 단체를 존중하고, 정의를 지지하며, 짐승의 표를 지우고, 신과 동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붉은 용과 악마의 독을 피하고 자신을 위해 아름답고 행복한 미래를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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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정념으로 전통 기법을 사용해 신을 표현한 작품 자체가 일종 시공의 매개물에 해당하며,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과의 소통을 돕는 신성한 가교와 같다. 회화와 시공의 관계는 사실 대단히 복잡하다. 본문도 인류의 현존하는 학술이론을 바탕으로 그것의 한두 가지만 간략히 소개한 것이다. 실제로 각 방면의 각종 요소가 너무나 많아 절대로 필자가 한두 편의 글로 모두 개괄할 수 없다. 예술가들에게는 이에 대한 수많은 체득이 있지만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따뜻함과 차가움을 저절로 안다”는 옛말처럼 말로 표현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본문도 단지 일종의 소개 글로써 여러분에게 회화 예술의 이러한 특징을 얕게 설명했을 뿐이다. 한없이 부족함을 피하기 어려우니 수많은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전문 끝)
원문발표: 2021년 12월 27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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