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더펑(德風)
[밍후이왕] 얼마 전 대학교수인 이전 동료를 만났는데 미국 대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는 일부 견해가 달랐는데, 그는 내게 자기가 독립적인 사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지 않냐고 했다. 내가 그에게 ‘9평 공산당’을 보았는지 물었더니 그는 보지 않았다면서, 구실을 찾아 피하며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독립적인 사고라는 것이 정말 너무 제한적인 것 같은데요. 중국공산당(중공)이 정해준 범위 안에서 어떻게 소위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습니까? 나오는 결론이란 모두 중공의 그 한 세트가 아닐까요?”
사실 중국에는 독립적인 사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엘리트’가 많은데 그들은 중공이 그은 ‘레드라인’에 부딪히기만 하면 힘을 못 쓴다. 왜 회피하면서 악당이 보지 못하게 한 내용에 대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할까? 그는 그러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중공 악당은 발언권을 포함한 모든 물자와 권력 자원을 독점하고, 모든 규칙과 가치를 멸시하고, 법률 위에 서서 권세와 폭력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생사여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 악당은 역사상 끊임없는 운동으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강해지게 했는데, 순종하는 자는 잘되게 하고 거역하는 자는 죽였다.
타협하면 안전할까? 중공이 원하는 것은 인민의 두려움이다.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중공과 같이 가면 안전할까? 수많은 역사 교훈과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악마와 양심을 거래하면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봉황(鳳凰)TV를 방문했던 장훙빙(張紅兵) 변호사는 소년 시절 악당에 세뇌되어 사상이 공산당과 고도로 일치했다. 그는 ‘계급의 적’으로 지목된 자신의 친어머니 팡중머우(方忠謀)를 고발했다.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류사오치(劉少奇)를 위해 몇 마디 변호했다는 이유로 곧바로 체포되어 악당에 의해 처형되었다. 몇 년 뒤 류사오치가 억울한 누명을 벗자, 성인이 된 장훙빙은 장기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며 참회 속에 있었다.
중공 악당은 사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 매번 운동을 일으킬 때마다 ‘소수의 사람’에 대해 타격을 했다. 매번 일부분의 사람만 선을 그어 밖으로 뺐다. 일단 선 밖에 있게 되면 독재 정치에 의해 잔인한 박해를 받는다. 사람들은 매번 자기가 안전선 밖으로 매겨질까 봐 두려워 서슴없이 가족애를 끊어버리고 양심과 우정을 배반하면서 악당과 같은 노선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소수의 사람은 시간에 따라서 계속 바뀌었다. 오늘 피할 수 있다 해도 내일 역시 피할 수 있을까? 작가 라오서(老舍)처럼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악당을 바싹 따라 노선을 일치하게 유지했지만, 아무리 똑같이 하려 해도 악당의 변덕스러운 리듬을 따라가진 못했다. 결국, 어느 날 투쟁을 당한 후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적극적인 추종자와 체제 내 맹목적인 집행자의 결말은 모두 마찬가지다. 당시 네위안즈, 탄허우란 등 5대 홍위병 ‘조반파(造反派)’ 지도자는 악당의 호소에 적극 호응했다. 첫 번째로 대자보(大字報)를 붙이고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묘를 부수는 등 미친 듯한 행위를 해서 한때는 잘 보냈다. 스스로 중공을 위해 용감한 선봉이 되었고 통치자와 함께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겼지만, 문화대혁명이 지나가자마자 중공에 의해 문화대혁명 동란의 범죄자로 되어 ‘반혁명죄’로 9년에서 17년 등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창해일속(滄海一粟, 넓고 큰 바닷속의 좁쌀 한 알)에 불과할 뿐이고 더 많은 사례는 편폭의 제한으로 여기서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겠다.
중공 악당과 같은 노선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실제로 자율 또는 피동적으로 양심을 어기고 악당을 도와 악행(혹은 악행에 협조) 하는 것이고 나중에 청산될 것이다. 공산당 내부에 의해 청산되든, 법에 의해 청산되든, 다른 형식으로 청산되든, 청천벽력같은 일이 생기든, 모두 좋은 결과가 없다.
비교해보면, 우리는 신의(信義)를 중히 여겨 감당해낼 수 있는 정인군자만이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튼소리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며 도덕적 저지선도 없는 것을 어떻게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어찌 당신에게 진정하게 안전한 느낌을 줄 수 있겠는가? 최근 홍콩 문제를 보자. ‘일국양제(一國兩制), 50년 변하지 않는다’고 한 증거가 확실하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23년 만에 맹세한 약속을 완전히 뒤집었다.
중공은 신의라곤 전혀 없는 불량배일뿐만 아니라 공산당은 사탄교와 일루미나티에서 유래됐다. 일루미나티의 창시자는 ‘핵심 계획’ 초안을 작성한 반(反)신 신학 교수 독일인 바이스하우프트다. 그는 사탄의 힘으로 인류 문명과 기존의 도덕 질서를 무너뜨리려 했다. 공산당 선언의 핵심 사상은 이 ‘핵심 계획’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공산당이 믿는 것은 실제로 마귀 사탄이다. 목적은 전 인류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공산당의 본질은 악마이기에 사람들에게 재난과 공포만 가져다줄 뿐이다. 어찌 그것에 기대서 안전한 느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악당은 수십 년간 지속하여 사람들을 박해하고 무고한 인명을 수없이 죽였다. 앞으로 갚아야 한다면 이는 일반 세인에게 진 죄업을 갚는 것일 뿐이다. 알다시피 인간 세상의 죄업 중에 바른 믿음에 대한 박해보다 더 큰 죄업은 없고 불법(佛法)과 그 수련인에 대한 박해보다 더 큰 죄업이 없다. 그런데 1999년부터 중공 악당은 파룬따파(法輪大法)와 그 수련자를 박해하면서 갖은 사악한 수단을 다 썼다. 예를 들면 하늘을 경악케 하는 끔찍한 강제장기적출 악행은 하늘만큼 끝없는 죄업을 지었다. 이는 신(神)에게 빚을 진 것이기에 영원히 갚을 수 없다. 추종자도 무간지옥에 휩쓸려 들어가 영원히 형벌 받을 것인데 무슨 안전을 담론할 수 있겠는가?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안정감(安全感)을 얻을 수 있을까?
얼마 전에 동영상에서 한 서양인 젊은이의 이야기를 보았다. 어느 날 그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 도착한 후 바퀴에 피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오던 길을 돌아가면서 찾아보았는데 길가에 한 소녀가 피 못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어린 소녀를 친 것이 아니라 그의 차 바퀴가 혈흔 위로 지나간 것이다. 그는 즉시 어린 소녀를 병원에 싣고 가서 응급치료를 받게 했다. 제때 이송해서 치료받았기에 소녀는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줄곧 혼수상태였다. 소녀의 부모는 그가 가해자인 줄로 알고 매우 분노하며 그를 한바탕 구타했다. 그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모든 의료비와 많은 배상금을 지불했다. 수십일 후 소녀가 깨어났고 교통경찰도 감시 카메라 영상을 통해 진짜 범인을 찾았다. 그제야 진상이 밝혀졌다. 기자가 이 젊은 남성을 인터뷰할 때 그는 “이렇게 한 것은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한 것이었어요.”라고 했다.
이렇게 단순한 한 마디, 편안한 마음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하게 안전할 수 있는 법칙이 들어있다. 마음이 편안해야 진정하게 안전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편안한 마음일까? 자신의 양심에 따를 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내심의 도덕 규범이라고 말했다. 장훙빙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젊은이는 지혜가 성숙되지 않았기에 외부에서 오는 사상에 교란받고 미혹되기 쉽다. 중공 악당은 줄곧 젊은이의 이 약점을 꽉 잡고 5.4 시기부터 청년 학생을 이용해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내전 시기에는 국민당 고위 간부 자녀를 이용해 침투했으며, 정권 찬탈 후에는 홍위병을 이용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오늘날에는 중등, 초등학생에게 강제로 홍색 세뇌를 했다. 줄곧 반(反)전통 이념, 물질 욕구로 사람들의 선천적인 본성인 양심을 층층이 속여 사람의 행위가 줄곧 바른 도덕적 궤도, 즉 양심을 이탈하게 만들어, 생명이 무지 속에서 수습할 수 없는 죄업을 짓게 했다.
소년 시기의 장훙빙은 세뇌받은 후 원래 있어야 할 순수한 가족애와 가정의 온기를 완전히 벗어나 가장 가까운 육친이 생명을 잃게 했다. 성인이 된 후 이지적이고 명석해졌을 때 양심이 살아나자 깊이 후회했다. 자기가 젊었을 때 주입받은 ‘늑대 젖’ 때문에 그지없이 후회했다. 악당에게 수년간 중독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른 도덕적 궤도를 벗어나 생명을 훼멸로 나아가게 했는가?
양심의 인도에 따라 바른 도덕적 궤도로 되돌아가야 생명이 진정으로 안전할 수 있다. 진선인(真·善·忍)은 양심에 대한 최고의 좋은 지침이다.
원문발표: 2021년 5월 10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10/4243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