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목격자 “무조건 죽여라”고 한 내막을 밝히다

지난 19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글/ 리정콴

[밍후이왕] “3월 13일 저녁 7시경, 내가 직장에 돌아와 2층을 지날 때(우리 부서는 6층에 있고 형사경찰은 2층에 있음) 심문하는 소리와 때리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조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몇몇 대원이 고문하고 있었다. 류하이보(劉海波)를 실 한오라기 없이 벗겨놓고 호랑이 의자(老虎凳-고문 의자)에 수갑을 채우고 머리를 억눌러 무릎을 꾼 자세를 취하게 하고는 두 명의 대원이 고압 전기 곤봉을 들고 항문에 대고 힘껏 전기충격을 가했다. 옆에는 부러진 몽둥이가 몇 개 있었다.” 이 장면은 훠제푸(霍介夫)의 머리에 깊이 새겨져 잊을 수 없었다.

훠제푸(남)는 1970년 지린(吉林)성 농촌에서 태어났다. 1993년 지린 공안 고등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창춘(長春)시 공안국 콴청(寬城)지국 남(南)광장 파출소 경장을 맡았다.

훠제푸가 류하이보가 고문받는 것을 직접 보기 일주일 전인 2002년 3월 5일, 세계를 놀라게 하는 ‘3.5사건’이 발생했다. 3월 5일, 창춘 유선텔레비전 네트워크가 차단되고 파룬궁(法輪功) 프로그램이 삽입 방송됐다…… 훠제푸는 말했다. “당시 전국인민대회 기간이었다. 장쩌민은 몹시 화나 성위서기(省委書記) 왕윈쿤(王雲坤)을 비평하고는 기한 내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공안부가 주관하는 사건이 되었다.”

3월 6일부터 12일까지 전 시에서 체포하고 “무조건 죽여라”

“3월 6일 저녁 7시, 콴청 지국은 중급 간부 회의를 열었다. 저우춘밍(周春明) 국장이 시공안국회의 정신을 전했다. …… 전체 공안국 간부 경찰은 행동하여 ‘장쩌민(江澤民)을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 주위로 단결하고’, ‘고도의 정치 책임감’으로 이 간고한 임무를 완성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파룬궁 수련생은 규범을 넘어 엄격하게 처리하라’고 설명하고 전 시(全市) 6000여 명의 간부 경찰이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우리는 장시간의 수사와 방범(防範) 운동에 매진했다.” 훠제푸는 긴급 명령을 받았다. 창춘 삽입 방송에 관련하여 장쩌민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무조건 죽여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 공안부 류징(劉京) 부부장은 기한 내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창춘으로 달려갔다.

현지 군대와 경찰, 정부 공무원은 잇따라 동원되어 미친 듯이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다. 5000여 명의 창춘 파룬궁수련생이 불법적으로 체포된 후 각 감옥과 수용소로 비밀리에 잡혀가 고문 박해받았다.

훠제푸는 증언에 다음과 같이 썼다. “3월 12일 콴청 지국 형사경찰 대대 중요 사건 2대대는 거주지 제공에 참여한 류하이보, 허우옌제(侯豔傑) 부부를 체포했다. 류하이보는 창춘 뤼위안(綠園)구 춘청병원의 방사선과 의사다.” “형사경찰 대대는 류하이보, 허우옌제 부부를 장시간 구타하고 고문했다.”

3월 13일 밤, 훠제푸는 콴청 지국 2층에서 류하이보가 고문받는 장면을 보았다.

“경제 범죄 수사과의 웨이궈닝(魏國寧)도 안에 있었다. 우리는 현장에 있는 아이리민(艾力民) 대장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반드시 그가 입을 열게 해야 한다면서 상부에서 요구한 것이니 괜찮다고 했다. 그는 동시에 우리에게 나가라고 했다. 웨이(魏)는 나온 후 내게 ‘너무 잔인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대장 쑨리둥(孫立東)을 찾아가 그들에게 때리지 말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웨이는 남의 일을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혼자 쑨을 찾아갔지만, 찾지 못했다. 나는 사무실에 돌아온 후 불안했고 제지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나는 6층에서 10여 분 있다가 또 3층으로 쑨리둥을 찾아갔다. 3층 계단에서 나는 쑨이 2층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다른 방에서 때리지 말라!’ 누군가가 나와서 어찌 된 일인지를 물었다. 그는 ‘이 방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나는 2층에서 류하이보를 호랑이 의자에서 내려놓고 땅에 눕히는 것을 보았다. 쑨이 다가와 그에게 옷을 입혀주라고 했는데 그는 이미 죽었다. 몇몇 사람이 서둘러 그에게 옷을 입혔지만, 입혀지지 않았다. 이때 마침 웨이도 내려와서 보았다. 쑨은 우리를 보자 우리에게 얼른 떠나라고 했다. 그는 아이리민에게 소문내지 말라면서 그가 상부에 보고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창춘 유선텔레비전 삽입 방송 사건의 연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류하이보는 삽입 방송자에게 거주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게 학살될 수 있을까? 장쩌민은 왜 화가 치밀어 “무조건 죽여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을까?

‘톈안먼(天安門) 분신자살’부터 말해야 한다

2002년 3월 5일 창춘 삽인 방송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인 2001년 1월 23일, 베이징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창춘 삽입 방송 내용은 주로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의 진상이었다. 파룬궁은 원래 억울함을 당한 것이었구나. 창춘 시민은 놀랐다. 이 점이 바로 별의별 궁리를 다 해 파룬궁을 궁지에 몰려고 했던 장쩌민을 격노시켰다.

1992년부터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창춘에서 정식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전했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진선인(真·善·忍)을 원칙으로 하며, 다섯 가지 부드럽고 완만한 공법이 있다. 병이 제거되고 건강해지며 도덕 수준 향상에 탁월하여 1999년까지 약 1억 명이 파룬궁을 배우고 연마했다. 사회적 도덕 수준이 향상되고 사람 마음을 바로잡기에 ‘양청 석간신문(羊城晚報)’과 ‘의약보건신문(醫藥保健報)’은 파룬궁이 광범위한 대중의 환영을 받는다고 잇따라 보도했다.

국내에서 정계와 학계는 잇따라 파룬궁을 주목했고 상당히 많은 엘리트가 수련에 들어섰다. 1998년 차오스(喬石)를 대표로 하는 일부 전국 인민대표 이직·퇴직 간부들이 파룬궁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연구를 하여 ‘파룬궁은 나라와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움은 있으나,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는 결론을 얻었고, 연말에 장쩌민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국에 조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장쩌민은 매우 두려워했다. 1989년 6.4 탄압에 의지해 정권을 잡은 무능하고 덕이 없는 장쩌민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어려웠다. 그는 차오스 등 원로급 인물에 대해 줄곧 불만이 있었다.

사실 일찍이 1996년에 중국공산당(중공)과 장쩌민 정부는 이미 공안을 파견하여 파룬궁을 깊이 조사했다. 그러나 장시간 실정을 알아보고 검증을 거쳤지만, 아무 문제도 찾지 못했다.

1999년 여름, 장쩌민은 파룬궁이 광범위한 대중의 환영을 받고, 배우는 사람이 억에 달하자 질투심이 생겼다. 다른 상무위원이 파룬궁 박해를 찬성하지 않은 상황에서 장쩌민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1999년 7월 20일,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다.

2000년에 이르렀어도 정치국 위원들은 탄압에 관심이 없었다. 산둥(山東), 랴오닝(遼寧) 등 일부 성(省)을 제외하고 많은 성시(省市)는 탄압에 관심이 없었다. 체제 내의 부정적인 저항과 대중의 보편적인 혐오감으로 중공은 파룬궁 탄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2001년 1월 23일 섣달그믐날, 전국의 국민이 집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물만두를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충격적인 화면이 나타났다. 톈안먼 광장에서 다섯 명이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활활 타는 불, 소화기를 들고 불을 끄는 경찰, 타서 면목을 알아볼 수 없는 어린 소녀가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다. ……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은 장쩌민 집단이 잔인하게 파룬궁을 탄압한 가장 중요한 ‘추동력’이 되었다. 장쩌민이 직접 명령을 내려 전국의 크고 작은 미디어에서 비판 고조가 일었다. 2001년 1월 31일부터 나흘 동안 신화사와 중국신문사의 인터넷판에는 각각 107편과 64편의 파룬궁을 비판하고 성토하는 문장이 실렸고, 14개가 넘는 성시 자치구의 ‘각계 군중’이 잇따라 나서서 파룬궁을 비난했다.

그 이후 한 달 사이에 중공은 2000여 개 신문, 1000여 개 잡지, 수백 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 명령하여 함께 전력을 다해 전 국민을 파룬궁을 증오하는 폭풍우 속에 몰아넣게 했다. 비극적이고 터무니없는 장면을 방송하여 사람들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본인이 이전에 본 파룬궁의 기적과 파룬궁수련생이 한 좋은 일을 모두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런 ‘거짓말로 묶은 폭탄’의 폭격으로 사람들은 거짓말을 믿기 시작했다. CCTV는 고주파로 각계 사람들에 대한 무작위 방문 취재를 방송하고 반복적으로 재방송하여 집집이 알고 사람마다 알게 하여 수억 명의 사람들이 파룬궁을 증오하도록 하는 뿌리를 박았다.

봉쇄를 돌파한 선구자

2002년 3월 5일 저녁 7시 19분, 창춘시는 충격으로 들끓었다.

창춘 유선텔레비전의 8개 채널에서 동시에 ‘분신자살인가 조작극인가’, ‘파룬따파 세계에 홍전(洪傳)’ 등 진상 프로그램을 방송함으로써 충격받은 사람들은 잇따라 친척, 친구, 동료에게 전화하여 텔레비전을 켜고 진상을 보라고 알려주었다.

40분이 지나고 50분이 지났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꿈속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킨 이른바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은 ‘위화(偽火)’였다. 그 왕진둥(王進東)이라고 부르는 분신 자살자는 코와 입이 타서 비뚤어진 것 같았지만, 휘발유를 담은 두 다리 사이의 페트병은 고온에서도 전혀 변형되지 않았다. 다른 한 분신 자살자 류춘링(劉春玲)은 활활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경찰에게서 치명타를 입었다. 가장 어린 분신 자살자 류쓰잉(劉思影)은 기관지 절개 수술한 지 3일 만에 입을 열고 말할 수 있었고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 상식을 깨뜨린 각본은 볼품없이 서툴렀고 허점이 많았다. 중공이 조작한 분신자살 거짓말은 재빨리 전해졌다.

미국의 ‘위클리 스탠더드(The Weekly Standard)’는 ‘창춘 삽입 방송’에 관한 중요한 장편 보도 ‘미묘한 전파 속으로-몇몇 알려지지 않은 중국 열사가 어떻게 전 세계 자유를 도와주었는가’를 발표했다. 기사는 당시 창춘을 이렇게 기록했다. 파룬궁 프로그램이 8개 채널에서 50분 방송되었고 10만 명이 넘는 시청자를 모아 전 세계에 그들의 이름을 널리 전했다. 그들은 량전싱(梁振興), 류청쥔(劉成軍), 류하이보, 저우룬쥔(周潤君), 허우밍카이(侯明凱), 레이밍(雷明) 등이다.

텔레비전에서 진상 삽입 방송을 했다는 소식이 곧바로 중난하이에 전해졌다.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대폭으로 강력하게 폭로된 데 대해 장쩌민은 화가 치밀어 이지를 잃고 “무조건 죽여라”는 비밀 명령을 직접 내렸다. 창춘 전 시에서 계엄령을 내리고 광범위한 수색 체포를 하여 짧은 며칠 사이에 창춘 지역에서 5000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생이 불법적으로 체포되었다. 텔레비전 삽입 방송에 참여한 파룬궁수련생 중에서 많은 수련생이 맞아 죽었다.

중공은 창춘 대 체포 사건을 주목하는 국제 여론이 두려워 공모하여 진상을 은폐하려고 했다. 훠제푸는 말했다. “3월 16일 오후 1시 30분, 지국은 형사경찰과 일부 부서의 과장 회의를 열었다. 저우춘밍은 파룬궁수련생 류하이보는 심장병으로 죽었다고 했고 각 부문에 경찰 인력을 뽑아 영안실을 지키게 했으며, 여성 경찰을 뽑아 병원에 이송된 허우옌제를 지키게 했다. 이때 나는 어디에서 나온 용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과는 안 된다. 류는 맞아 죽었다. 나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해 나의 회의 참여를 중지시켰다.”

훠제푸는 자기 의견을 견지하고 파룬궁을 취소한 데에는 법률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였기에 결국 업무가 중지되었고, ‘파룬궁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중공에 의해 15일간 구류되고 나중에는 해임되었다. 2002년 6월 말 그는 중국에서 해외로 도주했다. 훠제푸는 중공이 잔인하게 류하이보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 해외에서 좀 정착한 후 2004년 1월 7일 밍후이왕에 본명으로 증언을 제공하여 류하이보가 학살된 진상을 밝혔다.

지난 19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이 지난 지 20년이 된다. 창춘 삽입 방송 이후 이 19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창춘 삽입 방송 이후 6개월 동안 비인도적인 고문과 고문에 의한 자백을 강요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2년 창춘시 중급법원은 9월 18일, 15명의 파룬궁수련생에게 불법적인 징역형을 선고했다. 형량은 저우룬쥔 20년, 류웨이밍(劉偉明) 20년, 류청쥔 19년, 량전싱 19년, 장원(張聞) 18년, 레이밍 17년, 쑨창쥔(孫長軍) 17년, 리더하이(李德海) 17년, 자오젠(趙健) 15년, 윈칭빈(雲慶彬) 14년, 류둥(劉東) 14년, 웨이수산(魏修山) 12년, 좡셴쿤(莊顯坤) 11년, 천옌메이(陳豔梅) 11년, 리샤오제(李曉傑) 4년이다. 류청쥔, 레이밍, 량전싱, 허우밍카이 등 파룬궁수련생은 이미 박해받아 사망했다.

시간은 항상 모든 것을 조용히 기억하고 있다.

다음은 예전에 장쩌민이 직접 ‘파룬궁수련생은 규범을 넘어 엄격하게 처리하라’고 명령한 후의 일부분 창춘 각급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 관계자에 관한, 2002년 3월 5일 ‘삽입 방송’ 사건 이후 19년 동안의 상황이다.

1. 쑨리둥

1952년 11월생, 전 창춘시 콴청구 공안 지국 형사경찰 대대장, 1999년부터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졸개 역할을 했고, 부하를 데리고 약 100명의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다. ‘3.5’ 삽입 방송한 파룬궁수련생 류하이보를 박해하여 죽인 원흉 중 한 사람이다. 2004년 초 쑨리둥은 사무실에서 급사했다. 그의 부하 형사경찰은 모두 그가 파룬궁수련생을 체포하여 응보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죽은 후 중공은 그를 창춘시 2004년 ‘10대 뉴스 인물’ 중 유일하게 사법계를 대표한 ‘뉴스 인물’로 선정했다.

중공이 포장 수법으로 선전했지만, 쑨리둥의 폭사는 창춘에서 큰 진동을 일으켰다. 남녀노소 모두 의론이 분분했다. 예전에 박해에 가담했던 많은 경찰 가족도 그들에게 일자리를 바꾸라고 요구했고, 일부 가담자도 자신과 자녀에게 연루될까 봐 두려워 더는 장쩌민의 졸개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다.

2. 류위안쥔(劉元俊)

54세, 전 창춘시 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이며 정치법률위원회 서기다. 창춘시 공검법과 ‘610’ 사무실을 주관했다. 1999년 7월 20일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이래, 특히 창춘시에서 파룬궁수련생의 텔레비전 진상 삽입 방송 이후 류위안쥔은 “무조건 죽여라”는 장쩌민의 지시를 필사적으로 따르면서 불법적으로 약 5000명을 체포했다.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불법적으로 중형 선고를 받거나 노동교양 처분 등을 받았다. 2006년 4월 중순, 류위안쥔은 갑자기 병에 걸렸고 2006년 5월 4일 간암으로 죽었다.

3. 장후이(張暉)

46세, 창춘시 중급법원 형사1법정 재판장. 그는 뇌출혈로 죽었다. 불법적으로 창춘 ‘3.5’ 텔레비전 삽입 방송 사건에서 재판장을 맡았다. 2006년 3월 2일 갑자기 뇌출혈로 죽었다.

4. 쑨완성(孫萬勝)

전 창춘시 중급법원장, 개인의 사욕을 위해 열심히 장쩌민 집단을 따라 미친 듯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다. 불법적으로 창춘 ‘3.5’ 텔레비전 삽입 방송 사건을 재판한 직접적인 책임자다. 창춘시에서 불법적으로 파룬궁수련생에게 징역형이 선고될 때 모두 쑨완성이 직접 심사하고 비준했다. 이 사람은 뇌물을 받아 중국 기율위원회로부터 사건 설명을 요구받았다.

5. 톈중린(田中林)

66세, 전 창춘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 창춘 텔레비전 삽입 방송 사건과 이전의 많은 박해에서, 여러 차례 형을 집행하는 현장에서 직접 박해를 배치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호랑이 의자에 묶여 있는 파룬궁수련생 앞에서 살인자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다. 2011년 톈중린은 검찰기관에 체포되었고 11년 형을 선고받았다.

6. 쑹리페이(宋利菲)

창춘시 중급법원 전 당소조 서기이며 원장이다. 창춘시 중급법원은 류청쥔 등 텔레비전 삽입 방송을 한 15명의 파룬궁수련생을 무고하게 판결하여 각각 4~20년 유기형을 선고했다. 당시 지린성 정치법률위원회 부서기였던 쑹리페이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2018년 6월 21일 쑹리페이는 기율과 법을 엄중하게 위반한 혐의로 심사를 받았다.

7. 류페이주(劉培柱)

지린(吉林)성 공안청 전 당위 부서기 상무 부청장이다. 창춘 ‘3.5’ 삽입 방송 사건은 류페이주가 창춘시 공안국 부국장으로 재임하는 기간에 발생했다. 공안국 제2인자로서 류페이주는 창춘 ‘3.5’ 삽입 방송 사건에 대해 “무조건 죽여라”고 한 장쩌민의 사악한 명령을 적극적으로 집행하였기에 ‘3.5’ 삽입 방송 사건의 박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2020년 1월 22일 류페이주는 낙마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당적(黨籍)과 중국 인민 해방군의 군적(軍籍)에서 제적되었다.

이러한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해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을 꾸며내는 데 가담한 자들도 모두 다양한 형식으로 그들이 지은 죄악을 갚았다. ‘가짜 분신자살 사건’을 직접 감독한 전 CCTV 뉴스 논설부 부주임 천망(陳虻)은 2008년 47살 때 위암과 간암을 동시에 앓다가 9개월의 고통을 겪은 후 죽었다. 양심을 어기고 ‘가짜 분신자살 사건’을 보도하고 증오를 선동한 CCTV 대변인 뤄징(羅京)은 2009년 림프종에 걸려 죽기 전에 구강 궤양이 심각했고 혀가 헐어 말을 할 수 없었으며,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2005년 ‘가짜 분신자살’ 4주기를 맞아 ‘초점방담(焦點訪談)’ 취재에서 분신자살 조작극을 다루었던 CCTV 여성 아나운서 팡징(方)은 2015년에 암에 걸려 타이완에서 44살의 나이로 죽었다. …… “선과 악에는 응보가 있고 천도(天道)는 윤회가 있다. 믿어지지 않으면 고개 들고 보라. 하늘이 누굴 봐준 적이 있는가!”

역사는 항상 무심결에 인류를 위해 과거와 미래를 통찰할 계기를 남겨주었다. 2020년 1월 23일 ‘톈안먼 가짜 분신자살 사건’(2001년 1월 23일) 19주년이 될 때 우한은 도시 봉쇄를 선포했고 전 인류는 모두 전염병이 온 것을 알았다. 시간이 이렇게 교묘하게 일치한 것은 하늘이 일깨워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닌가? 지난 1년 전염병의 전파 경로는 우한 폐렴이 바로 중공과 친공자(親共者)를 향해 온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중공 바이러스’라고도 부른다.

맺는말

“진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것을 공격하면 할수록 당신의 공격은 그것을 더 충실하게 하고 그것을 증명한다.”(갈릴레이)

19년이 지나갔다. 류청쥔, 류하이보 등 삽입 방송한 용사는 우리를 떠나갔지만, 수많은 파룬궁수련생이 마찬가지로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와 골목, 아파트 단지, 향촌과 진에서 소중한 중국인에게 진상을 전하고 세인에게 거짓말에 속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알려주고 있다.

신종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천상의 경보든 고금 중외 예언의 경고든 모두 더 큰 규모의 전염병이 곧 기습해 온다고 했다. 파룬궁수련생이 당신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는 9자 진언을 알려줄 때 꼭 소홀히 하지 말길 바란다. 2020년 우한 폐렴 기간 바로 이 9자 진언이 우한 시민을 위험한 상태에서 안전하게 하고 위험한 지경에서 벗어나게 했다. 좋은 기회는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 꼭 소중히 여기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2월 7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s://search.minghui.org/mh/articles/2021/2/7/419617.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