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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지도자들은 왜 공산당을 포기했는가?

글/ 싱민(醒民)

[밍후이왕] 중국 교과서에는 중국공산당(이하 중공) 제1차 인민대표대회(이하 제1차 대회로 약칭)는 기념비적인 회의라고 말한다. ‘천두슈, 취추바이……’ 등이 이 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을 설립했다. 2017년 10월 31일 현 중공 지도자는 상하이에 있는 중공 제1차 대회 옛터를 방문하여 역사의 유적에서 ‘공산주의’ 맥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제1차 대회 옛터에는 제1차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옛 사진만 있을 뿐 중공 설립자들의 후속 변경 사항을 자세하게 펼쳐 보여줄 수 없었다.

천두슈(陳獨秀), 취추바이(瞿秋白), 장궈타오(張國燾) 등 제일 먼저 중공의 ‘홍선(紅船)’에 발을 디딘 개척자들이 가장 먼저 공산주의를 포기할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중국 교과서와 중국 매체에서 금지되었다.

1. 천두슈, 공산 깃발의 철저한 각성

천두슈는 중공 창시자 및 초임 총서기로 공인받은 사람으로 54운동의 주요 발기인이며 베이징 대학 문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중국이 내우외환에 처한 청말 민초(民初)에 많은 애국지사가 강국의 길을 탐구했다. 천두슈가 1915년에 창설한 ‘신청년’이 당시 ‘신문화 운동’의 깃발이 되어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했다. 1921년 천두슈는 중국공산당 초임 총서기를 맡고 소련 공산주의 국제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실천 과정에서 내재적인 중국 전통문화의 기본요소가 천두슈에게 공산당은 바른 정당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소련공산당은 중국 당원에게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지시했는데, 천두슈는 국민당의 ‘부체(附體)’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1929년 장쉐량의 동북군이 소련의 수중에서 동북의 철도[中東路] 통제권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 소련 홍군이 중국 동북을 공격할 때 중공은 ‘무장으로 소련을 보호하자.’라는 구호를 제기했다. 천두슈는 중공이 국익을 돌보지 않고 ‘소련을 보호’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와 같은 그의 합리적인 행동을 중공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해 11월 천두슈는 중공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천두슈는 중공과 점점 멀어져갔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감옥에서 중국고대 언어문자, 공자, 도가학설 등 연구에 몰두하면서 사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중화전통문화 중에서 천두슈는 마침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천두슈는 1938년 3월 17일 ‘신화일보에 보내는 편지’에서 “당신들은 여태껏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실의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 당신들이 코를 꿰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 전사이고 당신들을 반대하면 매국노인가? 인간이 되는 도덕성이 이러한가?”라고 썼다.

1940년 11월 28일 천두슈는 ‘최종정치견해’라는 글에서 “‘무산계급독재’라는 것은 전혀 없으며 그것은 당의 독재이고 결과도 지도자의 독재일 뿐이다. 어떤 독재든 모두 잔악, 기만, 거짓, 횡령, 부패한 관료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라고 썼다.

그는 또 “우리가 사랑하는 국가는 인민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한 국가이지 인민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썼다.

2. ‘시종일관 가면을 쓴’ 취추바이

취추바이는 천두슈에 이어 중공 초기 지도자로, 중공 주재 공산국제대표로 소련에 갔다가 귀국해 여러 차례 무장폭동을 이끌었다. 취추바이는 1935년 중공군 대장정 전에 남아서 원지를 지키다가 국민 정부에 체포됐는데 처형되기 1달여 전 옥중에서 ‘다여적화(多餘的話)’를 썼다.

이 글에서 취추바이는 자신이 중공의 지도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역사적 오해’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나와 마르크스주의’ 장(章)에서 자신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적이 전혀 없고, ‘자본론’은 더더욱 읽지 않았고 겨우 상식만 있는데, 기회는 모두 신문 잡지의 단편적인 논문과 레닌 책자 몇 권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연구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가 “소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라는 허명을 훔쳤다.”

“역사적 오해 때문에 나는 15년 동안 억지로 정치 일을 해 왔다.” 중공을 떠난 것에 대해서는 “나는 아쉽지 않고, 마찬가지로 후회하지 않는다.”, “7~8년 동안 나는 일찍 극히 지겨움을 느꼈다.”, ”나는 시종일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지금 나는 마지막 탈을 벗었다.“라고 했다. 문장 말미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책을 언급하지 않고 대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을 언급하며 ‘다시 읽어보라’고 했다.

이 ‘다여적화’는 한 지식인이 어떻게 공산주의의 궁극적 이상에 끌려 공산당에 들어갔는지, 그 후 진실한 현실 속에서 공산당의 잔혹한 대외·대내 투쟁에 직면해 당의 충성, 복종 원칙에 따라 영혼이 분열되고 독립사상을 포기하는 ‘배우’가 됐는지를 투철히 분석했다. 한 면으로는 공산당의 주장을 선전하면서 다른 면으로는 계급으로 계급을 소멸시키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이용해 아름다움에 도달하려는 논리를 의심해 계급성이 인성을 부정하는 것에 질색했다.

취추바이는 죽은 후 중공에 의해 ‘배신자’로 내몰렸고, 아내는 참혹하게 죽고 아이는 감옥에 갇혔으며, 부모의 무덤은 파헤쳐졌다.

3. 장궈타오, 탈당 성명을 발표

장궈타오는 ‘54운동’ 때 학생 리더였다. 1921년 여름, 장궈타오는 중공 제1차 대표대회를 준비하고 대회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장궈타오는 또한 ‘중공 원로’ 중에서 유일하게 레닌을 만난 중공 대표였다.

장궈타오가 어위완(鄂豫皖, 후베이-허난-안후이 지역)에서 창립한 홍사방면군(紅四方面軍)은 중공내부의 잔인한 투쟁 중에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 역시 불운을 피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정풍(整風, 기풍을 바로 잡다)’이라는 명목으로 장궈타오에 대한 포위공격을 진행했다. 대회에서 비판하고 작은 회의에서 투쟁하고 수많은 죄명과 모자를 그의 머리에 뒤집어씌웠다. 장궈타오는 처음에는 매우 고통스러워하다가 나중에는 좌절했다.

1938년 4월 2일 그때 섬감녕변구[산시(陝西)·간쑤(甘肅)·닝샤(寧夏)의 변경 지역] 정부 대리주석이었던 장궈타오는 어쩔 수 없이 황제릉에서 제사 지내는 기회를 빌려 혼자 옌안을 떠나 충칭으로 도망갔다.

1938년 4월 5일, 장궈타오는 우한에서 탈당성명을 발표했다. 말속에는 이념에 환멸감을 느끼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공산당은 내가 평생 동경하고 그것을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분투해야 할 그 당이 아니다!”

1948년 장궈타오는 상하이에서 ‘촹진(創進)’ 주간지를 창립했다. 발표한 기사에서 공산당은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도덕적 윤리와 국가 존망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 더욱이 서슴없이 서민을 도구로 간주했다. 20년 동안 기나긴 세월 속에서, 공산당은 학살, 파괴 및 혼란에 몰두해 왔다. 공산당의 무장혁명이 성공한다면 군사 정복의 힘을 빌려 일어난 것이기에 틀림없이 독재정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궈타오가 마오쩌둥과 헤어진 후 최종적으로 중공의 본질을 똑똑히 보고 나아가 전면적으로 탈퇴하고 중공을 이탈한 과정은 사람들에게 역사와 현 사회에 대한 깊은 계시를 남겨주었다.

중공 창당 원로였던 장궈타오는 공산주의 열광자이자 당시 홍사군을 지도할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마오와 중앙 세력의 약 10배도 넘는 권력을 행사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당하고 잔인한 투쟁과 무정한 타격을 받았으며 중공의 진영에서 배척되어 하마터면 불행한 일을 당할 뻔했다.

장궈타오는 제때 중공을 이탈하여 류사오치, 펑더화이 등과 같은 한 무리 중공 원로들의 불운을 면했고 그의 가족에게 무한한 혜택과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장궈타오는 목숨을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일찍이 인권 보호와 신앙의 자유로 유명한 캐나다로 이민하여 자유와 청신한 인문과 자연환경을 즐길 수 있었다.

역사의 진상이 하나씩 드러날 때 양심과 사악 사이에서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과 거짓을 포기하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아주 소중하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4. 옐친의 탈당과 고르바초프의 유감

실제로 소련 공산주의 정권의 마지막 순간 옐친도 탈당을 결정했다. 옐친이 탈당을 선언하기 며칠 전에 그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들을 떠나세요. 당신은 대통령입니다. 당신은 이 당이 어찌 된 일인지를 똑똑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당신은 인질이고 희생양입니다.” 고르바초프는 좀 주저했다. 옐친이 공산당에 대한 명석한 인식과 탈당을 선택하여 일어난 효과는 역사가 마지막 답안을 제시했다.

옐친이 탈당한 후 더 많은 사람이 소련공산당을 탈당했다. 1년도 되지 않아 1900만 명의 당원이 있고 74년 동안 집정한 소련공산당이 완전히 멸망했다. ‘굴라크 수용소’가 교과서에 쓰여 있고 공산당의 사악한 ‘슬픈 벽’이 마침내 완공되었다. 이는 공산주의 재난에 대한 영구적인 건물이 있음을 상징한다.

영국 ‘가디언’은 소련이 해체된 후 20주년 때 고르바초프를 단독 인터뷰했다. 기자가 그에게 가장 유감스러운 일을 물었을 때 고르바초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땅히 일찍 공산당을 떠나야 했다.”라고 말했다.

소련이든 중국이든 많은 지식인, 문화 유명인과 집안 형편이 괜찮은 사람은 모두 공산당에게 꾀어 들어갔다. 들어간 후 이용당하고 박해받은 다음 헌신짝처럼 버림받았다. 이런 사례가 매우 많다.

중국에는 “지난 일의 경험과 교훈을 기억하여 장래의 거울과 본보기로 삼으라.”는 옛말이 있다. 중공정권이 어떤 물건인지를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중공의 미디어 인민일보의 공식 블로그에 미국 정부가 모든 중공 당원에게 비자발급을 거절할 것이라는 소식이 밝혀진 후 손뼉 치며 좋아하는 평론이 수천 건이나 됐다. 심지어 이번에는 인터넷이 통제 불능이 아니냐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통제 불능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각성한 것이다. 형세를 거슬러 가고 깨어나야 할 때 깨어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역사의 중요한 순간 자신에게 유감을 남기지 않도록 중공을 탈퇴하고 이 악마를 포기해야 한다. (발췌)

 

원문발표: 2020년 7월 25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25/4094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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