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음(淸音)
[밍후이왕] 2011년 8월 13일 낮 12시, 베를린 전체는 정적에 휩싸여 교통이 정지되고 행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교회 종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는 베를린에서 베를린 장벽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다. 이 순간, 온 베를린은 봉쇄를 뛰어넘으려다 목숨을 바친 동독 시민을 위해 1분간 묵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재난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으로 재건됐으므로 다음 세대는 이런 역사적 증거 앞에서 재앙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동독에서 베를린 장벽을 세울 때 ‘제2의 만리장성’이라고 명명한 것은 만리장성처럼 견고하다는 뜻인데 결국 세계인들에게 해체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만리장성의 고향인 중국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인터넷 베를린 장벽, 즉 중국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인터넷 검열을 하는 ‘만리 방화벽’이 설치됐다. 매일 수많은 사이버 경찰이 그곳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자신들의 거짓말을 감추고 중국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해서다. 진정한 베를린 장벽에 비해 중국공산당의 보이지 않는 베를린 장벽은 중국인들이 진상을 알지 못하도록 시시각각 가로막고 있다.
소련이 해체된 후 세계 6000여 개의 레닌 상을 무너뜨리거나 철거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레닌 상을 철거하는 장면이다
돌아보면,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공산주의를 청산하는 험난한 과정에서 1990년에 소련공산당이 해체됐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나 건축물, 조각상, 도장 표지로 존재해, 수많은 피해자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공산당의 사악함을 청산하는 각종 매개물을 장려해, 기념비와 기록보관소 건립을 시작해 공산주의의 붉은 재앙에 대한 세계의 인식에 상징성을 갖게 했다.
레닌 상을 넘어뜨린 그 순간
전 세계 공산주의 후계자들의 ‘위대한 지도자’ 레닌의 상은 예전에 소련이 사회주의 진영 국가에 수출한 중요 물자로, 전 세계에 7428개의 레닌 상이 세워진 바 있다. 그러나 많은 공문서 파일이 점차 공개되면서 점점 많은 문헌에서 레닌이 러시아인을 학살한 사실이 드러났다.
예전의 ‘국부’ 레닌의 이미지가 점차 붕괴되어 6000여 개의 레닌 상을 넘어뜨리고 철거했다. 레닌 상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 사람들은 놀랍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다. 붕괴한 것은 레닌 시대에 남겨진 무거운 응어리와 역사적인 상처다.
1991년 리투아니아 시민이 넘어뜨린 레닌 상을 올라타고 있는 장면은 공산주의 통치 시대가 끝났음을 상징한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도심의 한 레닌 상을 넘어뜨린 후
빅터 부르가이츠크 우크라이나 폴타바 주지사는 2014년 11월 24일 전에, 즉 ‘대기근 기념일’ 전에 그 주(州)에 있는 모든 레닌 상을 무너뜨리라고 지시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학살한 흉수의 조각상을 계속 보존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전국의 거리, 광장, 학교 및 기타 지역의 전 소련 공산 독재정권 시기의 표식을 지우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약 2200개의 레닌 상이 있다. 흥미롭게도 우크라이나 언론과 사회학자들이 발표한 우크라이나 레닌 상 분포도는 레닌 상이 많은 곳일수록 범죄율이 높고 경제적으로 각종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레닌 상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거의 없는 중부와 서부 지역에는 지역사회가 빠르게 발전했고 치안도 매우 좋다.
2015년 4월 9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투표를 거쳐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구소련 시기의 국기, 국장, 국가(國歌), 낫, 망치, 오각별 등을 포괄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표식을 전면 금지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공산주의 금지 표식에는, 공산당 대표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포함하며, 공산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리와 도시 이름을 다시 명명해야 한다고 했다.
레닌에서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독재자는 소련 국민에게 큰 재앙을 가져다줬다. 구소련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저서 ‘한 잔의 쓴 술-러시아의 볼셰비키주의와 개혁 운동’에서 “이 한 세기(20세기)에 러시아에서 전쟁, 기아와 탄압으로 사망한 사람은 6000여만 명이나 된다”라고 썼다.
러시아 10월 혁명 100주년이 다가오는 2017년 10월 30일, 전 소련 시대의 정치적 박해를 기념하는 ‘슬픈 벽’ 기념비 제막식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것은 러시아 최초의 청동 조각상 국립 기념비다. 이 조치는 세계에 명확한 신호를 내보냈다. 무고한 사람을 무차별 살해한 소련공산당의 범죄 역사는 부정됐고, 10월 혁명의 발원지와 그 사악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부정된 것이다.
동독 모든 사람이 진상을 알도록 비밀문서 공개
동독이 해체되기 전에는 철저한 감시가 이뤄졌으며, 경찰서 정보원까지 고려한다면, 6.5명의 동독인마다 비밀경찰 정보원이 1명 있던 셈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자, 동독의 비밀경찰들은 가장 빠른 속도로 전력을 다해 문서를 소각하느라 뜨거운 가마 속의 개미처럼 바빴다. 심지어 사무실에서 대야에 문서를 놓고 소각했다. 이 회색 빌딩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하고 있음을 발견한 민중은 40년간 독재 정권의 ‘모든 기록’을 지켜냈다.
확보된 공문서에는 180km에 달하는 서면 자료, 3900만 장의 카드 색인, 수십만 장의 사진과 녹음테이프 문서가 있었으며 갈기갈기 찢어진 문서는 1만 5600포대나 됐다. 사람들은 각종 방식으로 찢어진 조각을 맞추며 전력을 다해 공문서를 복구했다.
모든 개인, 조직, 기구는 이 공문서를 열람할 권리가 있기에 일반인에게 공문서를 공개했는데 동독 인구의 10%가 되는 170만 명이 공문서를 보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공문서 관리를 책임진 마리아나 비틀러는 말했다. “많은 사람이 침묵을 깨고 진상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과거 자신에게서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독일이 통일된 후 한때 독재정권의 통치를 상징하는 동독 국가보안부 본부 건물은 기념관과 박물관이 됐다. 각종 전시, 출판물과 역사 증인의 연설 등 활동을 통해 이 재앙의 역사를 상기시켰다.
예전의 동독의 국가보안부 본부 건물이 기념관과 박물관이 되다
폴란드의 90km 길이의 공문서
1990년 1월, 폴란드에서 42년간 집권하면서 300만에 가까운 당원을 거느렸던 공산당 조직이 해체됐다. 폴란드인들은 공산체제를 포기한 뒤 ‘공산주의 제거’를 위해 제도적, 문화적, 심리적 차원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해로운 유산을 해체하는 데 주력해 왔다.
1998년 12월 폴란드 의회는 공산당 통치시대의 정치적 박해를 전문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민족기억연구소’를 설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5년까지 이 연구소에서는 90km 길이에 달하는 파일을 수집했고, 1794건의 출판물을 발표했으며, 453차례 전시회를 개최하고, 817차례 회의를 열었으며, 30개의 교육 웹 사이트를 설립했다. 동시에 연구소 수사관들은 10만 3000명의 증인과 인터뷰하고 508건의 범죄 혐의자를 심문해 137건의 기소를 성사시켰다.
2016년 5월 폴란드 대통령의 서명에 따라 ‘공산주의 해체법’이 시행됐다. 이 법은 공산주의와 기타 전체주의 제도를 선전하는 것을 금지했다.
2017년 6월 22일 폴란드 의회는 또 다른 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년 안에 공공장소에서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조각상과 기념비를 모두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폴란드 의회는 비슷한 법을 통과시켜 사회에 명확한 신호를 보냈다. 폴란드 국가는 전체주의 체제를 금지하고 반대하며 권위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또 역사적으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기념비가 보존된다면 전체주의 지지자들이 잘못된 견해를 퍼뜨리고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련과 동유럽은 1990년부터 2017년까지 공산주의를 숙청하는 데 20여 년이란 노정을 겪었다. 이는 공산당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사회에 침투했는지 보여준다. 공공장소 건물, 문자, 공산주의 표식을 완전히 없애는 데는 20여 년이 걸렸다. 그래서 전 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성과 인식에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체제를 갖게 됐다.
공산주의의 표식이 하나하나가 무너지고, 기념비, 기록보관소, ‘슬픈 담’을 하나둘 세우기 시작했다. 오직 공산주의 독소의 철저한 청산만이 세인을 진정으로 깨어나게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을 돌이켜보면서
아직도 공산주의에 휩싸여 있는 중국을 돌이켜보면 마오쩌둥 상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공산당 깃발이 채소 시장, 빵집, 협상 테이블 어디에나 할 것 없이 다 걸려 있고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에도 여전히 ‘홍색 정권’을 찬양하고 있다.
중공은 문화대혁명을 ‘10년 대동란’이라고 인식하더라도 어떤 공개적인 기념형식을 용납하지 않아, 공개적인 기념과 반성도 하지 못하게 했다. 삼반오반(三反五反), 3년 대기근, 6.4 대학살(천안문 사태) 등 역사적 사실을 중공은 한사코 부인하고 있기에 어떤 기념 형식이 나타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재난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모든 기념에 ‘정권 전복’이라는 큰 누명을 씌웠으며 국내안정보위국(국보) 경찰은 모든 주요 인물을 항상 감시했다.
저녁 7시 정각마다, 중공의 나팔수인 신원롄보(新聞聯播)는 ‘위광정(偉光正-위대, 영광, 정확)’을 선양하고,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억만 세인을 세뇌시켰다. 그리하여 사회는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환경과 체제를 갖지 못하게 됐으며 민중을 재난에 빠뜨렸고 사회 전반의 도덕성이 타락됐으니 통탄할 일이다.
실제로 중공은 여전히 생명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중공은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았다. 한 외국인은 해외 파룬궁 게시판 앞에서 그녀 가족도 공산주의 박해를 받았기에 파룬궁수련생이 직면한 압력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인권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공공장소에 있는 게시판은 중국 관광객이 해외여행을 할 때 볼 수 있는데 이런 기회는 잠깐일 뿐이고, 그 수가 제한되어 있어 국내(중국)의 10여 억 민중은 여전히 진상을 모르고 있다.
중공이 정권을 잡은 이래 중국인들에게 수많은 재앙을 안겨주었고, 수천만 명의 중국인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중국은 애써 진상을 감추고,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금지해, 사람들이 중공의 죄악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공문서는 지금까지도 해금되지 않았고 교과서에는 아직도 파룬궁을 비방하는 문장이 존재한다.
매번 재난 때마다 사람들은 교훈을 얻었다고 했지만, 중국공산당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다. 탕산 대지진 이후 32년 만에 발생한 원촨 대지진도 사망자 수를 숨겼고, 사스가 발생한 지 17년 만에 폭발한 우한 폐렴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재난은 우리에게 상처가 낫는다고 아픔을 잊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중공에 대한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에게 동유럽과 소련처럼 공산주의 독소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그 여독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2004년 에포크타임즈에서 발표한 사설 ‘9평 공산당’에서 말한 것과 같다. “오직 공산당에 대한 모든 환상을 버리고, 철저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증오와 탐욕의 욕망에 절대 휘둘리지 않는 것만이 반세기 동안 중국 사회를 통제해온 체제의 악몽에서 철저히 벗어날 수 있으며 자유 민족의 몸으로 인성을 존중하고 보편적인 관심과 사랑을 기초로 하는 중화문명을 다시 건립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발표: 2020년 4월 9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9/40358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