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해명(海明)
[밍후이왕] 청명절을 앞두고, 후베이(湖北)성에서는 사망자의 유골함을 배포하는 것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우한의 각 장례식장에는 입구에 길게 줄을 서기 시작했고 예약은 5시간 만에야 받을 수 있었으며 직장 또는 지역사회 관계자가 동행해야만 수령할 수 있었다.
사망자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우한의 한커우(漢口) 장례식장만 해도 3월 26일, 27일 이틀에 걸쳐 두 트럭의 유골함이 총 5천 개였으며 중공이 발표한 전국 3천여 명의 전염병 사망자 수를 크게 웃돌았다. 그리고 한커우 장례식장은 우한시의 7개 장례식장 중 하나에 불과하다. 7개의 장례식장에는 총 74대의 소각로가 24시간 가동하고 있어 대략 한 달 동안의 사망자 수는 이미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2월 중순, ‘이동식 의료 폐기물 소각로’ 40대가 우한에 투입돼 수습한 시신은 아직 포함되지 않았다.
이 같은 추산은 진실한 숫자가 아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거짓말이 숨을 곳이 없도록 하기에는 충분하다.
중공은 ‘사망자 수’를 ‘블랙박스’에 밀봉하면 아무도 모를 것으로 생각하지만, 한 속담처럼 신은 한쪽 문을 닫는 동시에 다른 쪽 문을 열어주신다.
중공 정권 수립 이래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천재인화, 큰 재난이든 작은 재난이든 막론하고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대하다(偉光正)’는 이미지를 보기 좋게 꾸미기 위해 국민의 사상에 대해 늘 은폐 보도하고 적게 보도하며 심지어 보도하지 않았다.
‘당산 대지진’ 3년 후에야 발표
1976년의 ‘당산 대지진’은 대지와 산이 요동치는 가운데, 백만 명이 넘는 이 공업 요충지는 순식간에 폐허가 돼버렸다. 그러나 중공 당국은 3년이 지난 뒤에야 당산 대지진으로 24만24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공식적인 자료를 발표했다.
1976년 말, 이듬해의 직물 배급표(布票)를 배포할 때, 원래 120만 명이던 당산에 65만 명분의 직물 배급표를 배포했다. “직물 배급표는 사람의 수에 따라 배포하는 것이다.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사망했는가?” 이에 따라 추산하면 당산 지진의 사망자 수는 절대 34만 명에 그치지 않으며 최소 55만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진이 끝난 뒤 민간에서는 60만 명이 사망했다는 얘기가 이미 나왔다.
계획경제의 시대에 국민들이 무엇을 사든 필요했던 표가 마침 재앙의 진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 셈이다.
5만 명의 ‘-5.2%’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중공의 대약진, 제강·제철 운동, 수리시설 보수, 농업 황폐화로 대기근이 발생했다.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표로 음식물을 구매했고 매일 배불리 먹지 못했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한정된 식량을 다 먹은 뒤 풀뿌리, 나무껍질은 물론 심지어 사람까지 먹기 시작했다. 이 대기근으로 도대체 몇 명이 아사했는가?
중공은 수년간 이 문제를 함구해왔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인구 프로파일이 개방되면서 1959년 인구 증가율은 마이너스 2.4%, 1960년 마이너스 4.7%, 1961년 마이너스 5.2%, 1962년 마이너스 3.8%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중국 인구가 5억이었던 것을 이 마이너스 비율로 계산하면, 감소된 인구는 3천만 명에서 4천만 명 사이이며 3년 동안 대기근으로 3천만 명이 아사한 것은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
사망한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지만, 출산율 저하는 오히려 인구의 비정상적인 감원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큰 재앙도 은폐하고 작은 재앙도 은폐
2015년 8월 톈진 폭발사건으로 소방관의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처음이었다. 중공 매체는 21명으로 발표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여론의 질타를 불러일으켰다.
중국 뉴스 포털 제몐(界面)에서는 공안부 소방국의 소식을 인용해 화재 진압에 참여한 9개의 소방지대와 3개의 전담대가 전부 희생됐다고 언급했다. 내막을 알고 있는 한 인사는 한 소방중대가 대략 20명 내지 30명이며 전담 소방대는 15명 이상이라고 인터넷에 폭로했다. 이렇게 되면 이번 폭발로 희생된 소방대원은 200~300명 사이여야 한다.
편성은 규칙이 있는 것으로 몇 팀이 출동했고 몇 명이 돌아왔는지 알기만 하면 간단하게 계산을 산출해낼 수 있다.
2012년 7월 베이징에서 60년 만의 이례적인 호우로 중공 매체에서는 37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많은 베이징 시민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여 수백 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중공의 관례에 따르면 은폐는 필연적인 것으로 큰 재앙 작은 재앙을 막론하고 중공은 모두 습관적으로 진상을 은폐해왔다.
‘코드 번호’가 매겨진 실종자들
1997년 7월 장쩌민(江澤民)은 중공과 함께 파룬궁(法輪功) 박해 운동을 일으켰다. 이 20년 동안 무수히 많은 파룬궁 수련인이 불법적으로 수감됐고 잔혹하게 고문을 당했으며 학살당했고 심지어 생체 장기적출을 당했다. 해외 밍후이왕의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4천여 명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박해를 당해 사망한 것으로 입증됐다.
그렇다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얼마나 될까? 중공이 일부러 은폐하려고 하기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파룬궁 수련인이 피해를 봤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는 간나(甘娜)는 베이징 출신으로 수도 공항의 세관원이었다. 2001년 세 번째로 베이징 신안(新安) 여자 노동교양소에 수감됐을 때, 혈액검사, X선 촬영, 심전도 및 눈 검사 등이 진행됐다. “당시, 나는 느낌이 매우 이상했다. 노동교양소의 경찰관은 나를 전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전면적인 신체검사를 시행했고 나는 몹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라고 간나는 말했다.
대략 2000년 9월에서 10월 이후, 마싼자(馬三家)로 납치된 파룬궁 수련인은 감독 관리 병원으로 보내져 전면적인 정밀검사가 진행됐다. 이때의 신체검사 항목은 이전과 전혀 달라졌으며 혈액형 검사, 채혈 등 많은 항목의 검사가 이루어졌다. 어떤 경우에는 면담이 요구됐고 면담을 할 때 의사 앞에는 얇은 A4용지 크기의 표가 있었다. 매 사람의 이름 앞에는 모두 하나의 ‘코드 번호’ 숫자가 매겨져 있었다. 일부 특수 혈액형의 수련인 코드 번호 앞에는 삼각형의 표시가 있었다. 당시 의사는 일부 측정되어 나온 특수 혈액형의 파룬궁 수련인에 대해 중점적으로 관심을 두고 가족 유전병력 유무 등을 캐물었다.
밍후이왕 보도에 따르면, 2000년 중공은 청원했던 파룬궁 수련인에 대해 매우 악랄한 연좌정책을 사용하여 가족들을 직장에서 해고했고 직장 책임자들을 처벌했으며 전 직원들의 보너스를 없앴고 심지어 지방 정부 부처에서 책임을 감당하게 했으며 관직으로 위협했다. 이런 이유로 중공은 사실상 수련인 주변의 모든 환경을 전부 동원해 파룬궁 박해에 동참시켰다.
이에 2000년 무렵부터 가족, 직장, 지역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청원했던 많은 파룬궁 수련인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집 주소를 밝히지 않았다. 당시 밍후이왕에서 파룬궁 수련인들의 교류문장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름 주소를 밝히지 않는’ 것은 파룬궁 수련인이 연좌 박해를 저지하는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한 가지 방법이었다.
베이징 공안 내부 소식에 따르면, 2001년 4월까지 베이징으로 청원을 갔다가 체포된, 등록되어 기록된 파룬궁 수련인은 83만 명에 달했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등록되지 않은 수많은 파룬궁 수련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외지에 수감된 사람의 수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2000년 7월, 베이징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베이징의 각 구치소에 수감된 이름, 주소를 밝히지 않은 파룬궁 수련인을 단체로 톈진으로 압송해 톈진의 각 구치소에 수감했다. 긴 흰색의 압송 차량 행렬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톈진 외에도 어떤 수련인은 동북지역으로 보내졌고 어떤 수련인은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 현재 해외에 체류 중인 궈궈딩(郭國汀) 변호사는 “내가 직접 처리한 상하이 황슝(黃雄) 사건이 그랬다. 황슝은 상하이 교통대학의 기숙사에서 실종됐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우리는 여러 곳을 찾아보았지만 모두 없었다.”라고 말했다.
2006년 마침내 누군가 나섰다. 선양(瀋陽) 쑤자툰(甦家屯)에서 생체장기적출 수술을 집행한 의사가 양심의 가책을 감당하지 못해 그 가족이 해외에서 파룬궁 수련인의 장기를 생체로 적출한 진상을 폭로해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파룬궁에 대한 10여 년의 조사를 거쳐 증거를 찾은 후, 현장 사례(사악한 무리가 생체 적출 수술을 마친 후 즉시 시신을 훼손해 흔적을 없애므로 있을 수도 없음)가 없는 상황에서 다차원적인 하나의 방대하고 상세하며 확실한 증거 사슬이 구성됐다.
2019년 6월 17일, 런던 ‘독립민간재판소’에서는 다차원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증거 사슬에 의거해, 중공에 강제 장기 적출이 존재하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중지되지 않았다고 판정한다며 공식 발표했다.
이런 비밀을 언제까지 은폐할 수 있을까? 중국에는 남이 모르게 하려면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 있다.
맺음말
중공 당국의 숫자는 이미 믿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이번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를 겪으면서, 보다 더 많은 나라 사람들이 깨어났다. 중국인들이 진상을 알아보고 전파하는 과정은 사실 중공이 해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중공은 중국 민중에 의해 버려지고 있다. 사악한 중공이 해체되는 시기는 진상이 온 세상에 명백히 밝혀지는 날이다!
원문발표: 2020년 4월 11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4/11/4036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