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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의 ‘인권’: 거짓말과 진상

[밍후이왕] 얼마 전 중국공산당은 ‘인권백서’를 통해 생존권과 발전권을 가장 중요한 ‘기본인권’으로 삼아 인권이 크게 개선됐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공민에게 어떠한 언론, 보도, 신앙의 자유가 없는 전제하에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근본적으로 자화자찬에 불과하다.

중국공산당은 한편으론 폭력 도구인 총대를 장악하고, 한편으론 여론 도구인 붓대를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신문, TV, 인터넷을 불문하고 모두 중국공산당의 위광정(偉光正,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올바르다) 대변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의 짙은 안개가 걷히게 되면서 중국공산당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사실을 봉쇄하고 진상을 훼멸시키고 있는데 그 내부 절차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2호병(콜레라)’의 유래

1959~1961년에 발생한 3년간의 대기근은 중국공산당의 대약진이 불러온 인재이지 천재가 아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3년 자연재해’라는 말만 들었을 뿐, 그 3년 동안 전국에 진정한 자연재해가 없었고, 또 그 2~3년 사이에 굶어 죽은 사람이 수천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더욱 모르고 있다.

그럼 왜 1959년부터 2019년까지 60년 동안, 사람들은 그 3년 동안의 대기근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매우 적고, 심지어 굶어 죽은 사람들의 수를 말하면 상당수의 일부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할까?

그것은 당시 굶어 죽으면 굶어 죽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2호병’에 걸렸다고 말하게 했기 때문이다.

1960년 4월 26일, 중국공산당 위생부는 기밀 통지를 통해 각 위생부서에 향후 기근에 의한 부종 환자 진단서에 일률적으로 ‘2호병’으로만 기재할 수 있다고 지시했다. (‘중국위생연감’ 3권 1985판)

대기근 기간에 상당수 사람이 병들어 죽은 원인을 기아라고 진단해서 비판받은 의사가 한 명 있었다. 왕산선(王善身)이라는 의사는 “왜 부종병을 치료할 수 없는가, 무슨 약이 모자라는가?”라는 질문에 “식량이 모자랍니다!”라는 한마디 말을 해 그는 대회에서 비판받고 감옥에 투옥되었다.

2호병은 의학적으로 콜레라인데 그 함의는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다. 하지만 굶어 죽는 상황을 감추기 위해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면서 대기근 기간 내내 콜레라라는 사실을 숨기고 초기부터 3년 동안 계속 부종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 당시에 콜레라만 감춘 것이 아니다. 대기근 동안 어느 중앙 지도자는 어떻게 고혈압, 심장질환, 간염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가 하며 개탄했는데 사실 모두 굶어 죽은 것이다.

심각한 굶주림으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1961년 4월 23일, 안후이(安徽)성 공안청은 ‘특수사건 발생 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썼다. ‘1959년 이후부터 발생한 특수사건(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건) 총 1,289건 가운데 푸양(阜陽)지역 302건, 벙부(蚌埠)지역 721건, 우후(蕪湖)지역 55건, 류안(六安)지역 8건, 안칭(安慶)지역 2건, 허페이(合肥)시 201건 발생했음. -안후이성 공안청 전 상무 부청장 인수성(尹曙生).’

3년 대기근 중, 간쑤(甘肅)성 퉁웨이(通渭)현에서 대규모로 사람들이 굶어 죽은 사건을 ‘퉁웨이 문제’라고 부른다. 1965년 7월, 퉁웨이현 위원회는 ‘전 현 사망 60,210명, 온 가족 사망 2,168가구, 고아가 된 아이 1,221명, 외지 유출 11,940명’이라고 보고했다. 2000년 퉁웨이현 노간부 좌담회에서 직접 그때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그해에 보고된 수는 실제로 굶어 죽은 사람을 3분의 1로 축소한 것이라면서 70% 이상의 가정에 죽은 사람이 있었고, 어떤 가정은 전부 죽어 대량의 시체를 매장할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퉁웨이현에서는 대기근으로 굶어 죽은 대량의 사람들에 대해 고위층을 제외하고 대외적으로 정보를 엄밀히 봉쇄했다. 그리하여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부 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다. 정보를 봉쇄하기 위해 당시 굶어 죽은 사람들을 굶어 죽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병’에 걸렸다고 말하게 했다. 그리고 현에서는 “그들이 ‘병’에 걸리는 족족 전부 매장하라”고 지시했다.

대기근 당시 소련에 빚진 중국의 외채는 총 57억4300만 위안인 반면, 1959년 재정 지출은 520억 위안에 달했다. 그 때문에 실제로 그해 중국이 진 빚은 그리 많지 않아, 같은 기간 대외로 원조한 금액은 빚을 갚는 금액보다 많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3년간의 대기근을 해명할 때에는 “자연재해와 소련의 빚 때문”이라고 운운하면서 “대내적으로 하늘을 원망하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원망해” 책임을 떠넘기는 핑계로 삼았다. 그리하여 여러 해 동안 중국의 민중들이 철석같이 믿도록 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대기근 시기에 외국의 원조를 거절하고 오히려 대량의 식량을 수출했다. 그중 1959년과 1960년에 중국공산당은 136억 근(816만 톤)의 식량을 순수출하였는데 이는 3400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양식에 해당한다.

‘캠브리지 중화인민공화국사(1949-1965)’ 제8장에서는 “가장 놀라운 것은 심지어 사망률이 상승하던 1959년에도 중국의 식량 수출은 놀랍게도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기재되었다.

세인의 생명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가? 진상에 대한 봉쇄가 얼마나 치밀한가? ‘3년 자연재해’라는 말로 굶어 죽어가는 3천여만 명의 생명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잘 살고 있는가?

1949년부터 시작된 삼반(三反), 오반(五反). 반우파(反右), 대약진, 문화대혁명은 일파만파로 퍼져 서민들이 도탄에 빠지고, 모든 업계가 쇠퇴해지는 대재난을 초래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인민에 대한 그들의 통치를 이어가기 위해 토지를 도급해주고 기업을 민영화 하도록 했다. 어디에 중국공산당이 없으면 거기에 활력이 있다는 것은 중국 민간에서 거의 공통된 인식이 되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이 개입하지 않기만 하면 일이 성사될 수 있고, 중국공산당이 ‘규범’을 적용하기만 하면 성사될 수 있는 일도 실패하게 된다.

중국공산당의 ‘인권백서’는 생존권과 발전권을 가장 중요한 ‘기본인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알다시피 보편적 가치로 말하면 정상적인 사회공민은 또 생명권, 재산권, 존엄권과 공정권도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입을 벌리기만 하면 공산당이 준 돈이고, 자기가 쓰는 돈은 공산당이 준 돈이라고 말한다. 공산당의 돈은 어디에서 오는가? 일찍이 2014년에 세계은행은 중국의 총 세율이 64.6%여서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을 크게 앞질렀다고 지적했다. 전문적인 경제수치에 따르면 중국기업이 내는 직접세는 간접세까지 더해, 중국기업의 세액공제 전 이익의 70%를 차지한다. 그리고 개인이 내는 세금은 직접세에 간접세까지 더하고, 거기에 부가가치세, 소비세까지 모두 포함하여 중국 정부가 개인에게 안기는 세금은 평균 소득의 51.6%에 이른다. 이 두 수치는 전 세계적으로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높다. 이렇게 높은 세금을 감히 받을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고, 중화 5천 년 역사에서도 이렇게 높은 세금을 감히 받을 수 있는 왕조가 없었는데 결국 우리 이 시대에 있다.

서민들이 이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는데도 중국공산당은 돈을 찍어 경제를 발전시켜 화폐가치를 하락시키고, 또 사람들이 집을 사서 화폐가치를 유지하도록 핍박했다. ‘2018 중국가계자산건강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우리나라 도시가구의 가구당 총자산 규모는 161만7천 위안인데 이런 자산의 80% 가까이가 부동산이다.

서민들은 저축을 꺼내 매매계약금을 지불하고 심지어 모든 저축을 다 털어서 분양주택을 구입한다. 중국공산당 중앙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2007년 말, 주민의 소비성 대출은 3조2700억 위안에 불과했지만 2018년에는 37조80억 위안으로 10배 증가해, 주로 주택 소비에 쓰였다. 따라서 주택은 서민들의 머리를 눌러 숨을 쉴 수 없는 큰 산이 되었다!

위에서 말한 것은 도시인데 그럼 농촌은 어떠한가? 소득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 위생도 도시에 비해 형편없다. 또 호적 제한으로 인해 농민공이 도시에 정착할 수 없어 아이는 부모를 따라 도시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홀로 남아있는 아이로 전락하였다,

중국공산당 정부의 2013년 ‘전국농촌잔류아동, 도농유동아동 상황연구보고서’는 중국의 농촌에 홀로 남아있는 아이는 6,102만 명이라고 추산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되자 사회적으로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 이후로 이런 유사한 보고는 더는 발표하지 않았다.

2012년 11월, 농촌의 집에 홀로 남아있던 5명의 아이가 한 쓰레기 집안에서 연탄불로 몸을 녹이다가 불행하게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졌다.

2015년 6월, 구이저우(貴州)성 비제(畢節)시의 한 가정에 5세부터 13세의 어린이 4명이 홀로 집에 남아있었는데 그들은 살충제를 먹고 자살했다. 이에 대해 ‘베이징청년보’는 “홀로 남아있는 아이 문제는 이미 아주 심각하다. 연구자의 표본조사에 따르면 구이저우와 안후이 두 곳에서 홀로 집에 남아있는 아이의 자살과 의외의 사고 발생률은 각각 12.88%와 20%이다.”라고 밝혔다.

중국공산당은 말끝마다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힌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천차만별로 나누는데 농민은 사실상 천민으로 취급되고 있다.

‘헌법’ 중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물질적 필요 말고도 정신적 욕구가 있다. ‘헌법’에는 언론자유, 보도자유, 신앙자유라고 쓰여 있지만, 중국공산당은 오히려 사회 전체를 부와 돈의 죄인으로 전락시키고, 언론과 신앙에 대해 모조리 봉쇄하고 있는데 이것은 1950년대의 진반(鎮反), 반우파 등 운동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최근, 후난(湖南)의 민주인사 왕메이위(王美餘)는 헝양(衡陽)간수소에서 급사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의 아내 차오수샤(曹曙霞)는 남편이 박해받아 죽었다고 믿었다. 왕메이위는 작년에 헝양. 창사(長沙) 등지에서 피켓을 들고, 합법성과 기반이 없는 중국공산당의 퇴진을 요구했다. 올해 7월 8일, 창사 기차역에서 경찰에게 트집잡혀, 말썽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헝양 간수소에 감금되었다가 불과 두 달여 만에 ‘죽음’을 당했다.

피켓을 들고 선거를 요구하면 붙잡고, 감금하는데 어디에 민주가 있고, 어디에 언론자유가 있는가? 그뿐만 아니라 그의 생존권도 박탈당했다.

1999년부터 2019년까지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20년 중에 파룬궁수련생들은 더욱 많은 박해를 받았다. 매일 체포, 감금되고 판결받는 파룬궁수련생이 있다. 또한, 대량의 증거가 증명하다시피 중국공산당은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각종 혹형을 사용하여 학대했으며, 또 강제로 장기를 적출하여 반인류 범죄를 저질렀다.

밍후이왕의 정보 출처에 따르면 1999년 7월 20일부터 2019년 7월 10일까지, 이 20년 동안 중국대륙에서 중국공산당에 의해 체포된 파룬궁 수련생의 총 연인원(한사람이 여러 번 체포되면 여러 번으로 계산함)은 적어도 250만 명에서 300만 명에 이른다.

오직 신념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 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밍후이왕의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의 박해로 죽은 사람 중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4,361명에 달한다.

이외, 밍후이왕이 이미 조사, 증명한 사례에 따르면 2019년 7월 10일까지, 86,050명이 체포, 28,143명이 불법노교, 17,963명이 불법판결, 18,838명이 세뇌반 감금, 809명이 정신병원 입원, 그리고 각종 고문 박해를 당한 총인원 수는 518,940명이다. 중국공산당의 박해는 너무나 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이 많은 차별대우를 받게 했고, 실직당하고 수입을 잃게 하였으며, 또 오랫동안 정신적 박해를 받고 가정이 파탄 나며, 불구가 되고 사망하게 하였다.

9평 편집부에서 출판한 신간 ‘공산주의의 최종 목적’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 30년에는 ‘혁명을 중시해 생산을 촉진하자’, ‘계급투쟁은 영험하다’는 구호에 따라, 계급의 적을 많이 적발할수록 높은 관직을 얻었다. 후 30년에는 경제 발전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GDP(국민총생산)가 승진의 기준이 됐다. 그리하여 당 간부들은 민생과 환경을 무시하고 오로지 높은 GDP 수치만 추구했다.

전 30년에는 ‘국민당 반동파’와 ‘늑대 같은 미 제국주의’를 증오의 대상으로 선전했으며, 후 수십 년에는 서방 민주주의와 자유 이념을 증오하고 ‘진(眞)·선(善)·인(忍)’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증오하게 했다.

전 30년에는 투쟁으로 인간성을 말살하고 진실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해 거짓말이 횡행했으며, 후 수십 년에는 ‘신뢰 위기’에 빠져 위조품과 유해식품이 넘쳐났다. 가짜 담배, 가짜 술, 가짜 우유, 가짜 티켓 등 가짜 제품은 물론 학위, 증명서, 면허 등에도 위조가 있게 됐다. 첨단기술을 이용해 만든 각종 유해식품은 전 30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전 30년에는 ‘밭 한 무(畝)에서 쌀 1만 근을 거뒀다’는 황당한 거짓말을 했고, 후 수십 년에는 ‘톈안먼 분신’ 조작극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을 속임으로써 증오심을 선동했다.

전 30년에는 쇄국정치를 하고 발언권을 독점했으며, 후 수십 년에는 정보를 차단하고 민감한 단어를 걸러내며 실명제로 네티즌들을 감시했다.

전 30년에는 정치를 우선시하고 전통문화를 파괴했으며, 신앙을 말살하고 정치 수단을 경제에 적용하여 경제를 파탄 직전에 이르게 했다. 후 30여 년에는 경제를 우선시하고 경제 수단을 정치에 적용했으며, 물욕과 음란하고 난잡한 것들에 대한 추구로 신앙의 공백을 채움으로써 도덕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렇게 전 30년과 후 30년을 계속 비교할 수는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중국공산당이 하루라도 존재하기만 하면 하늘을 거슬러 덕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소멸하는 사악한 본질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 때문에 공산당이 없어야 비로소 신중국이 있다는 것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진실한 말이다.

 

원문발표: 2019년 10월 2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0/2/3940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