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성(鍾聲)
[밍후이왕] 일부사람들이 아직 홍색 노래를 부르며 전장에서의 청년 시절을 회상하고 있지만, 공산주의를 위해 생명을 헌신하겠다던 유명 인사들이 깊은 참회를 하고 있을 줄은 잘 모를 것이다.
많은 사람은중국공산당의 교사로 시안(西安)사변을 일으킨 장쉐량(張學良)을천고의 죄인으로 여길 것이다. 그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장제스가 공산당을 섬멸하는 일이 눈앞에서 실패했으며 중국공산당은 항일 시기에 틈을 타 강대해졌고 최종적으로 정권을 탈취했다. 정변 후 중국공산당의 버림을 받은 장쉐량도 중국공산당의 진면모를 똑똑히 보아냈으며 자신의 소행에 깊은 후회를 했고 만년에 ‘죄인 중의 수괴’라고 자칭했다.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의 속임을 당한 장쉐량의 동생 장쉐쓰(張學思)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철저히 깨달았다.
장쉐쓰는 장쉐량의 넷째 동생이며 소년시절 사회주의 사상 영향으로 1933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공산당의 파견으로 랑팡 동북군 67군 특무대대에서 군수품을 운반했다. 공산정권이 세워진 후 차례로 둥베이대학 교장, 다롄해군학교 부교장 등에 임직했으며 1955년 소장 계급을 받았다. 장쉐쓰는 또 여러 번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초대를 받아 벼슬길이 순풍에 돛단배 같았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발동한 후 ‘자산계급 군사노선’이라는 명목으로 비판받고 소위 부동산 문제에서 청렴하지 않은 부분을 분명하게 진술하라고 강요받았으며, 면직된 후 군 주둔지의 어둡고 습기 찬 작은 방에 감금됐다. 감금된 후 장쉐쓰는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로 자신은 반역자가 아니라고 설명했으나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1968년 장쉐쓰는 입원했으나 심한 박해로 1970년에 사망했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으며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옌안(延安)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정신차오(鄭新潮)가 병문안 왔을 때 눈이 밝아지면서 정신을 많이 회복했다. 그는 침대 머리에 있는 알람시계를 바닥에 떨어뜨려 감시하던 간호사가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는 펜과 종이를 달라고 했고즉시 병상에 반듯이 누워 ‘악마전신(惡魔纏身, 악마가 몸을 휘감는다)’이라는 네 글자를 적었다. 정신차오가 반복해 캐물었다. “병마가 몸에 달라붙은 건가요?” 그는 아니라고 손을 저으며 다시 이 네 글자를 적었다. 그는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당한 모든 불행은 중국공산당이라는 이 악마에게 속아 조성된 것이라는 것을.
항일 명장 푸쭤이(傅作義)의 딸 푸둥쥐(傅冬菊)는 젊어서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출국 유학의 기회를 버리고 24살에 당조직의 배치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중국공산당이 자신의 아버지 신변에 심어놓은 스파이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공산당을 위해 아버지가 침실 금고에 보관하던 기밀서류를 전부 훔쳤다. 중국공산당은 그녀가 찍은 사진 필름을 손에 넣었고 이 자료는‘해방전쟁 초기에 가장 중요한 군사정보’가 됐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이 일로 푸둥쥐를 ‘북평 평화해방 대공신’으로 칭했다.
그러나 푸둥쥐는 베이징에서 만년을 보낼 때 매우 처량했다. 20여 년간 한 번도 인테리어를 하지 않은 낡은 집에서 살았고 돈이 없어 새집도 살 수 없었으며 수리할 수도 없었다. 몸이 아파서 위급할 때도 공산당은 고급 간부들이 사용하는 병실에 입원하지 못하게 해 부득불 스스로 돈을 내 특수병실에서 지냈으나 병실 비용을 감당할 수 없자 그를 간호하던 사람이 결정적인 시각에 떠나버리는 일도 발생했다. 푸둥쥐는 이전에 아버지를 회상하는 책을 쓰고 싶다고 했으나 끝내 펜을 들지 못했다. 그녀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천천히 당시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서행만기’(붉은 별이 중국을 비추다)로 유명한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도 만년에서야 깨어났다. 1936년 그는 쑹칭링(쑨원의 부인)의 배치하에 옌안에 처음으로 진입한 외국 기자였다. 당시 마오쩌둥, 펑더화이, 쭤취안(左權), 녜룽전(聶榮臻) 등 다수 홍군 지도자를 취재했으며 여러 영문 매체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937년에 이 책을 출판했다. 마오쩌둥을 미화한 이 책으로 중국공산당은 세계로부터 적잖은 지원을 받았고 또 진실을 모르는 청년들이 옌안으로 달려가도록 했다.
스노의 책에서 묘사된 것은 단지 중국공산당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단기간에 알 수 있었던 정보는 중국공산당이 외부에 전하고 싶은 목소리였을 뿐 공산당 내부의 잔혹한 암투에 대해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스노는 만년에 1970년에 중국에 방문했을 때에야 꿈에서 놀라 깨어났다. 그때 마오쩌둥은 그에게 일본 황군의 침략에 감사드리며 그러했기에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점령할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다. 스노는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알았고 내심으로 중국인에게 깊은 죄책감이 들었다.
스노의 부인은 스노보다 운 좋게 1989년 6.4 천안문 학생운동 탄압을 지켜보면서 직접 중국공산당의 사악함을 알게 됐다. 그녀는 그때부터 중국공산당을 다른 눈길로 보게 됐으며 즉시 탄압을 비난하고 그 뒤로 중국 인권활동의 확고한 지지자가 됐다.
오늘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을 따라 좋은 사람을 박해한 그런 사람들은 다시 사고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중국공산당은 역대로 남을 이용해 사람을 해쳤는데 더는 이용 가치가 없으면 버리며 곧 공산당의 희생양이 된다.
중국공산당 장쩌민 집단은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파룬궁 수련인들에 대해 장장 19년간을 박해했다. 박해 초기에 많은 사람은 불가(佛家) 제자를 박해하는 사악한 정치 운동에 대해 전혀 분별능력이 없었으며 또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은 터라 공산당은 이런 사람에 대해 거짓말과 작은 이익을 던져줘 악한 자의 악을 돕는 도구로 만들었다. 파룬따파 제자들이 끊임없이 진상을 널리 알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점차 명백해졌고 박해에서 손을 뗐다. 장쩌민 집단을 따라 계속 파룬궁을 박해한 사람들은 응보를 받았다.
최근 밍후이왕에 발표된 ‘파룬궁 박해 19년간 2만 명이 응보를 받다’라는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19년간 20,784명이 응보를 받았고 그중 가족 등에게까지 화가 미친 사례는 4,149명이다. 응보의 분류 통계에서 사망자는 숫자가 가장 많은 7,405명으로 전체의 35.6%를 차지한다. 응보를 받은 인원에 대한 9개 분류에서 공안 계통 사람들이 악한 행위로 응보를 받은 게 가장 많아 4,540명이었고 공안계통 총인원의 26.5%를 차지했으며, 이들 중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친 사례도 많아 972명에 달했다.
대략적인 통계를 통해서 응보를 받은 20,784명에서 310명은 응보를 받은 후 파룬궁 수련생의 진상 알리기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눈감아주는 것으로 더는 실질적인 박해에 참여하지 않았고, 어떤 이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 박해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일부 진상을 명백히 알게 된 이들은 질병이 매우 빨리 나았다.
아직도 여전히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응보를 받고서야 깨어나지 말기를 바라며 또 푸둥쥐처럼 만년이 되어서야 참회하지 말기를 바란다. 박해를 중지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책임지는 똑똑한 행동이다.
원문발표: 2019년 2월 13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2/13/3826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