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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을 두루 말하다(상)

글/ 아르노 후(Arnaud Hu)

[밍후이왕] 미술을 말하면 사람들은 흔히 회화, 조각, 공예 이런 분야의 사물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미(美)는 아주 큰 개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접촉하는 각 방면에 관련된다. 사람의 의식주와 직장, 생활 각 방면에 그것의 그림자를 다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문을 나서기 전에 자신을 꾸미고, 옷 살 때 예쁜 걸로 고르며, 집은 번듯하게 인테리어를 하고, 상인은 상품을 팔 때 포장을 중시하는 등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이상적인 효과에 도달할 것인지는 미술 작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전시대에 올린 쓰레기 같은 소위 ‘설치예술’과 괴상한 옷을 입고 바닥에서 뒹구는 소위 ‘행위 예술’은 모두 변이된 것이고 변태된 것임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일반인은 미술계에 있는 ‘전문가’만이 이런 것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 때문에 미술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변이된 미’를 좋아하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사실 각종 기업, 상인, 단체, 정부에서 상품 디자인, 의상 디자인, 인테리어, 디스플레이 광고 등 각종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대부분 모두 미술 전공자이기에 그들이 구체적으로 작업을 할 때 이런 ‘변이된 미’를 각종 외관 디자인 창작 과정에 넣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 사람들의 심미관을 개변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잘 느끼지 못한다.

비교적 대표적인 예를 들겠다. 좀 현대화한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매일 길을 걸으면서 무슨 특수한 느낌이 없지만 장기간 전통적인 건축 환경에서 살던 사람은 이런 현대화한 도시에 오면 시각적으로 잘 적응되지 않을 것이다. 도시는 거의 사각형 기하도형 건축물을 쌓아올린 것이다. 모든 것이 기하도형으로 간소화 되어 외계인 세계에 온 것 같을 것이다. 진정한 인류 세계는 동양이든 서양의 전통 건축이든 모두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민둥한 네모 형체를 그곳에 놓은 것이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물을 것이다. 도시는 원래 이런 것이 아닌가요?

이런 평평하고, 벗겨지고, 단순하고, 밋밋한 사각 박스형 현대주택 건축 ‘스타일’이 20세기부터 재빨리 각국의 전통 건축물을 대체했다.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라는 미니멀리즘 현대 미학을 추구해 많은 민족의 건축 환경은 독특한 개성을 잃고 모두 한 패턴으로 만들어낸 외계 건축물로 변했으며 인류 각 민족의 옛 전통문명이 훼손됐다. 하지만 대량의 여행 잡지나 홍보 촬영 기사들이 촬영 각도를 바꾸어 가며 일반적으로 보기 어려운 피사체를 찍어낸 후 회화 프로그램으로 이런 네모난 박스 도시에 더 화려한 색깔을 칠해 사람들이 구경하고 소비하도록 설득한다. ‘우리의 현대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세뇌 선전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 인류는 일종 새로운 변이 미학을 받아들이고 천만년 이어온 인류의 전통 심미관에서 이탈하게 된다.

일부 광장에서도 이런 기하 스타일의 현대 조각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변형된 기하 도형 혹은 기괴하고 추상적인 것들이다. 억지로 의미를 갖다 붙이면서 터무니없는 현대 미학 이론으로 해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조각한 것이 무엇이고 작가가 표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이런 특징은 외벽에 그린 낙서에서도 체현된다. 물론 도시의 낙서는 사악한 기운이 있는 변형된 문자와 단어가 많다. 인성의 악한 일면으로 현실에 대한 반항 심리를 표현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다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많은 국가 교과서에 있는 각종 현대파 작품 삽화는 어린이의 순결한 머리에 들어가 그들에게 ‘미술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관념을 형성시킨다. 권위적이고 단체적인 의식으로 일반 개인 사상을 강하게 통제하며 학습 단계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더욱 철저히 정복한다. 권위자들이 일치적으로 파블로 피카소의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같지도 않은 ‘예술’을 숭배할 때, 무턱대고 따르는 양떼 심리로 인해 이러한 작품들이 대중의 심미 관념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소장인, 경매 회사와 미술 평론가들은 서로 협조해 사회 여론을 이끌어 더 큰 경제 수익을 내려하고 있다.

학창시절은 한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다. 선생님과 학부모는 가급적 젊은이들에게 공부에 노력하고 노는 데 탐하지 말라고 교육한다. 하지만 부정확한 사회적 유도가 더 나쁠 수도 있다. 십대 학생을 주시하면 그들이 해골이 찍혀 있는 셔츠를 입고 새로 산 옷이지만 색상이 걸레보다 더 더러우며, 곳곳이 찢어져 크고 작은 구멍이 있는 청바지를 입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더 심한 자는 헤어스타일도 기괴한 ‘개성’을 추구한다. 그에게 책가방, 필통에 찍힌 강시, 해골 혹은 악마를 배우게 한다. 교과서를 꺼내면 근대 문화 사상, 위에 있는 사진은 전부 변이된 회화와 변태 장치다. 이 환경에 빠져 있는 학부모와 교사도 모두 습관이 되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분별력이 없는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변이된 심미관을 주입 받게 된다.

정규적인 학습마저 변이된 것이라면 그들이 공부 이외 여가 생활과 오락은 더 큰 문제가 된다. 영화 작품에서 대중의 숭배를 받는 슈퍼 히어로들은 모두 거미, 박쥐, 외계인과 같은 독이 있는 것이고, 나쁜 것을 정의의 상징으로 삼으며, 상점에 사악한 형상의 장난감은 인기 상품이 되고 게임 중의 주인공의 장비는 업그레이드 될수록 점점 야만스럽고 변이된다. 보기에 아주 예쁘고, 기교를 따지는 소위 ‘무해’하게 보이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사용한 것마저 모두 변이된 심미 관념으로 처리한 수법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코를 작게 만들고 눈을 변형시켜 얼굴의 삼분의 일, 혹은 이분의 일 크기로 확대해 그레이 외계인과 같은 큰 눈과 얼굴형을 사람들은 귀엽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서부터 변이된 사진 속에 빠져 자란 사람은 인류의 정상적인 심미관을 잃게 된다. 우스갯소리를 하면 어느 날 만화 속의 그런 작은 코, 큰 눈, 흰 피부를 가진 외계인이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쓰고 거리를 걸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에게 미스월드가 되라고 할지도 모른다.

대중의 변이된 심미 관념은 미술 전문가가 업계에서 리더 역할을 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실 지금 전문 미술학교에서도 진정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기 드물다. 미술학교에서 열광적으로 애호하는 작품들은 모두 기괴한 것이다. 서양 미술 교수 중 상당한 사람들이 심지어 그림 그릴 줄 모른다. 그들의 연구 과제는 모두 설치 예술, 행위 예술 분야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소수 사람들도 추상파 부류로 기술이 필요 없이 흐리멍덩하게 낙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발붙일 수 있고 심지어 세계의 주류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역사적 원인이 있다. 표현상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자기의 말을 합리화하는 미학 이론을 근거와 지지로 삼으면 쓰레기도 예술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미학이 미치는 범위가 모든 미(美)와 추(醜)의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이든 합리화하여 사회에 승인 받게 되면 이 세상에는 승인 받지 않을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 몇 해 서양에 끊임없이 테러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런 테러리스트 배후에는 모두 한 세트의 완벽한 종교 이론이 있어 그들이 살인 방화하고 폭탄을 쓰도록 지도한다. 그러나 이론이 있다고 해서 무엇이든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론도 좋고 나쁨, 선악을 분별해야 한다.

몇 분이면 완성할 수 있는 추상화의 원가는 아주 적지만 경매 회사에서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판매한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이 물감으로 어지럽게 뿌린 추상화 ‘1948년 작품 제5호’(No.5,1948)가 10년 전에 1억4천만 달러라는 고가에 팔렸다. 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몇 살 되는 아이가 얼렁뚱땅 만들어도 만들 수 있는 것이 왜 이런 가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선전으로 만들어낸 거품 경제 원리를 아주 분명하게 안다. 공개 석상과 비공개 방식을 통한 놀라운 시장 운영으로 거대한 경제적 수익을 내는 경로로 삼는다. 명석한 사람은 보아냈을 것이다. 현대주의 미학 이론 중에는 돈을 벌고 이름을 날리는 사상을 기초로 발전한 기만술이 상당한 비례를 차지한다.

현대 예술관이 미술계를 통치하는 지위에 있기에 현대 예술에 반감을 가진 학자들이라도 여론의 압력 때문에 관점을 표현할 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 걸음도 그 한계를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현대 예술에 동화된 동종 업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이후 학술계에서 어울리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황당한 작품이 고상한 경지에 이른 것은 사실 이미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피에르 만초니(1933-1963)는 1961년에 그의 대변을 90개 통조림에 넣어 예술품으로 팔았다. 그 이름을 ‘예술가의 똥’(Merda d’Artista)이라고 했는데 2015년 그 중의 한 똥 통조림이 런던에서 182,500파운드에 팔렸는데 거의 20만3천 유로화에 해당하며 당일 같은 중량의 황금 가격의 몇 백배나 된다. 이 사람은 1963년에 심장병이 발작해 일찍 죽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 소위 ‘예술가’가 어떻게 인류를 망쳤을지 모를 일이다.

어떤 여성 교수는 나체 상태에서 개똥을 몸에 바르고 전시해 저명한 큰 상을 받았다. 사실 이것보다 더 더럽고 저속한 것이 더 많다. 너무 구역질이 나고 변태적이어서 여기에서 예를 들지 않겠다. 이런 더럽고 구역질나며 비열하고 파렴치한 소위 ‘현대 예술’은 인류의 심리적 감당의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일부 극단적인 ‘행위 예술’을 본 관중은 즉시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울화병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서양의 적지 않은 대학, 대학원은 이런 것을 주요 과목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잘 배우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다. 사회에 이미 오염된 학자들에게 더 변이된 사상을 부어넣어 졸업한 후 되돌아와 이런 변이된 사상을 사회에 반영한다. 지금 사회 현대예술계의 난잡하고 변이된 것이 이미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은 인류 존엄성에 대한 유린과 모욕이라고 해도 과분하지 않지만 오염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안 후에도 그저 웃음거리로 대할 뿐이다.

(다음에 계속)

원문발표: 2017년 4월 29일

문장분류: 시사평론>세상인심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4/29/3463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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