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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장쩌민을 고소하려 한다

글/ 톈진 청년 대법제자 산롄얼(珊蓮兒)

[밍후이왕] 나는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행운아다. 부모님이 모두 지식인이어서 정신적으로 늘 충족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해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착한 아이였다. 학교 성적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웃음과 착한 마음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는데 이는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아주 귀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 그리고 지금까지도 악몽처럼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가 됐다. 그것은 바로 장쩌민이 파룬따파 및 대법 제자에게 발동한 16년이나 되는 박해다.

어머니는 내가 3살 때 파룬따파를 접촉하기 시작해 심신에 큰 도움을 받아 육체와 마음에 모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셨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함께 법공부를 하셨다. 나는 아주 빨리 책 속의 많은 내용을 외웠고 그때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예를 들면 지금까지 큰 병을 앓지 않았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지 않는 등 줄곧 순조롭게 성장했다. 유치원 때는 무용으로 톈진시에서 1등상을 받았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이 됐다. 나는 삶에 감사하면서 자신이 계속 그렇게 근심걱정 없이 커갈 줄로만 여겼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 저녁부터 내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어머니가 이유도 없이 한 호텔에 구류됐고 이틀 후 TV에서는 대법에 대한 하늘땅을 뒤덮을 듯한 흑색선전이 시작됐다. 어머니가 이런 날조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족, 직장, 정부로부터 수련 포기에 대한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외삼촌이 나를 데리고 어머니 면회를 가면서 나에게 어머니가 수련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라고 부탁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수감되어 앞으로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나는 몹시 두려웠고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호텔은 아주 혼잡했지만 어머니는 아주 평온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두려워하지 마, 우리가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 것은 잘못이 아니야. 포기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 오해가 있는 부분을 정부에 알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겨우 7살이었던 나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던 대법이 하루 밤 사이에 불법으로 몰린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를 무조건 믿고 지지하려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좋은 일자리를 잃으셨고 우리집은 낯선 사람들의 침입과 가택수색을 당했다. 어머니는 탄원의 길을 걸으셨고 근심 걱정 없던 나는 더 이상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됐으며, 공포의 검은 그림자는 내 성장에 따라 갈수록 커졌다.

어머니는 베이징으로 탄원을 가신 것 때문에 1999년 7.20 이후 여러 번 수감되셨다. 그 때부터 더는 내 머리를 빗어주는 사람이 없어 나는 머리띠만 하고 다녔는데 선생님은 반장으로서 외모에 주의해 다른 학생에게 모범을 보여 줘야 한다고 지적하셨다. 하교하고 집에 돌아가면 더는 맛있는 밥상이 나를 기다리지 않았고, 아버지가 퇴근하셔야만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저녁에 내가 잠든 후 다시 회사로 돌아가 야근을 하셨다. 나는 한 밤중에 놀라 깨어나 울면서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호출기로 신호를 보냈지만 매번 반응이 없었다. 그러면 울면서 다시 잠들었다. 나는 그 때부터 밤이 두려웠다.

나는 어머니가 어디로 끌려가셨는지, 언제면 돌아오실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점차 머리를 빗을 줄 알게 됐고 홀로 집에 있는데 습관이 됐다. 날마다 수척해지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찬 아버지와 하루 밤 사이에 백발이 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내가 더 강해져 어머니가 계실 때처럼 집안에 기쁨이 넘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들에게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채 더 공부에 열중했고 더 강해졌다. 나는 어머니가 진상을 알리고 돌아오신다고 했으니 그 때까지 착한 어린이가 되고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여 어머니에게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설 전 날 어머니가 돌아오셨는데 무서운 구치소에서 돌아오셨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었다. 8살이었던 내 마음속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복잡한 것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우월했던 나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시인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확고하셨지만 신체는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머니가 다시는 나를 떠나지 말도록 날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어머니가 매를 맞았다는 말을 들었다. 남을 보호하다가 안에서 뺨을 맞았다는 것이었다. 또 알고 지내던 많은 좋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판결 받고 노동교양소에 들어갔으며 또 어떤 이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기 충격 고문을 받고 몽둥이를 맞았으며, 어떤 이는 까무러쳐 병원에 갔고, 어떤 이는 세상을 뜨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엄숙하게 나에게 이런 일들을 알려주시면서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려 하는 것은 잘못이 없고 우리는 베이징에 가서 정부에 분명하게 설명하여 그들에게 파룬따파의 아름다움과 진행 중인 박해를 알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2000년 6월 26일 아침,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일은 발생하고야 말았다. 아침 식사를 할 때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또 베이징으로 탄원을 가셨다. 겉으로 조용하나 사실은 긴장했던 생활이 단번에 또 무너졌다. 나는 구석에 숨어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어머니가 베이징 신방국(민원국) 입구에서 붙잡혀 송환됐는데 신앙을 포기한다는 서명을 하지 않으면 판결을 받거나 노동교양소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나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1년 6개월 동안 노동교양소에 수감되셨다.

나는 또 다시 어머니 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바쁜 아버지는 방학 때면 나를 외삼촌이나 외할머니 집에 보냈다. 나는 더욱 남의 눈치를 살폈고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조심스럽게 비밀을 지키면서 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면회에 어른들은 나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봐 데리고 가지 않았고 나도 어머니를 먼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이면 늘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나는 몰래 어머니가 갇혀 있는 노동교양소 주소를 알아내 어머니에게 자주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려 보내면서 어머니에게 나는 아주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후에 외할머니의 강한 주장으로 나는 마침내 어머니를 만나게 됐다. 곁에 있던 경찰도 내가 예쁘고 어른스러우며 성적이 우수하고, 어머니에게 자주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려 보내 경찰들도 감동해 눈물을 흘리게 한 어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저분한 옷을 입고 웃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으셨다.

그렇게 또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TV, 신문 등 모든 언론의 흑색선전은 여전히 우리 생활에 넘쳤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두려움, 혐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등의 비난과 원망을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 역시 TV에서 말한 분신자살이 아주 무섭고 어머니의 믿음이 틀렸으며 어머니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즉시 또 이런 원망을 씻어 버렸다.

어머니는 노동교양소에 11개월 갇혀 있은 후 돌아오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금도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얼굴에는 종전의 그런 광채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부러워하던 일자리와 지위도 없어졌다. 하지만 이번 박해가 얼마나 잔혹하든, 모든 것을 잃은데 대해 얼마나 큰 실망과 억울함을 느꼈든, 어머니는 신앙에 대해 여전히 확고하셨다. 어머니는 조금씩 이번 박해의 기만책을 나에게 알려주시면서 문화혁명부터 6.4천안문사건, 이번 박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국의 일관적인 수단이라고 말해주셨다. 그러면서 사람이 원래 갖고 있던 선량한 마음을 간직하고 중요한 일에 대한 시비 판단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박해 때문에 어머니는 발전 가능성이 큰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노동교양소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좋은 일자리를 찾으셨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에 시한폭탄을 품은 듯 저녁 6시가 되면 늘 불안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어머니가 또 나쁜 놈들에게 붙잡혀 나를 떠날 것 같았고, 밤늦게 돌아온 어머니가 또 작별 인사도 없이 갑자기 떠나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하고 베란다에 서서 어머니의 눈 익은 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또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으로 돌아가 계속 책을 보고 숙제를 하면서 속으로는 긴 한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어머니가 떠나지 않으셔서 나도 남들 앞에서 열등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또 다시 예전처럼 홀가분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어떤 일은 일단 발생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2008년 6월 14일 저녁, 당시는 올림픽 전야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녁밥을 짓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수돗물 계량기 검침을 왔다는 말에 문을 열자 사복 경찰 몇 명과 가도(주민센터)의 사람이 들어와 무작정 어머니에게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대문 입구에서 그들을 막아섰고 어머니는 침착하게 이치를 말해줬으나 그들은 계속 고집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그들을 밀어내고 대문을 잠갔다. 조용한 성격의 아버지가 그처럼 크게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극도로 무서웠다. 몇 년 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폭탄이 또 한 번 폭발하는 듯 했고 지나간 장면들이 하나하나 또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해 짐에 따라 나는 서서히 자신이 겪은 그 모든 것들을 이성적으로 대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나는 신앙(바른 믿음)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어머니는 박해 때문에 넘어지지 않으셨고 오히려 갈수록 젊어지고 갈수록 낙관적이며 갈수록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셨다.

2010년, 나는 순조롭게 베이징의 한 명문대에 진학했고 4년 후에는 또 순조롭게 대학원에 추천됐다.

대법의 ‘진선인(眞善忍)’은 씨앗처럼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고 어머니도 늘 나에게 어지러운 속세에서 깨끗한 연꽃이 돼야 하며 무슨 일이 생기든 강해야 하고 자신의 성결함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작년 여름, 어머니는 외지에서 사업하시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려고 계획하셨다. 하지만 출발 전 날(7월 15일 오후) 집에서 경찰에 연행됐는데 이유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에 있던 대법서적, 컴퓨터, 어머니의 신분증을 모두 가져갔다. 실습을 하고 있던 나는 외숙모의 메시지와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즉시 집에 돌아가 보기로 했다. 그날 저녁, 어수선하고 어두운 집안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던 나는 마음속에는 처음으로 공포보다 더욱 강한 신념이 생겼다. 자신이 걸어온 과거를 돌이켜 보면 어머니와 이별한 고통도, 사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 순간 마음이 비할 바 없이 평온했다. 나는 이미 그 어떤 일이든 받아낼 마음의 준비를 마쳤고 어머니와 함께 모든 것을 과감히 직면하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13일 후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셨다. 수척해지신 어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마음이 아팠을 뿐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만약 인생이 연극이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스토리는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지난 9월 2일 내가 밴쿠버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왔을 때 베이징은 마침 열병식 행사로 계엄 중이었다. 베이징 공항으로 마중 오던 어머니는 표를 살 때 신분증을 제시한 후 경찰에 저지당했다. 열병식 기간에 파룬궁수련생들은 베이징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11시간을 보내고 공항에 도착한 나는 어머니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즉시 핸드폰을 켰다. 하지만 ‘어머니는 너를 맞을 수 없게 됐으니 스스로 방법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기 바란다’는 아버지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갖고 있던 크고 작은 짐들과 수화물로 찾은 커다란 짐 2개를 바라보면서 나는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한창 걱정하고 있는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찰이 마중을 갈 것이고 집까지 데려다 줄 것이니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날 공항버스는 우리의 전용차가 됐고 짐을 날라주는 사람까지 있었다.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항쟁’하던 한 무리 사람들과 그렇듯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해 보았다. 어머니는 자신들을 폭행하던 한 경찰이 갑자기 암에 걸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모두 인과응보라고 하면서, 버스에 있던 사람들에게 파룬궁 박해에 더 이상 동참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이번에 나는 그들이 변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더 이상 막무가내가 아니었고 악담을 퍼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업무이니 이해하기 바란다고 거듭 해명했다.

이 일을 겪고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왜 지금까지 대법 사부님은 한 번 또 한 번 계속 자비롭게 기다리고 계시는가?

왜 지금까지 대법제자들은 여전히 자신을 잊고 진상을 알리는가?

왜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있지 못하는가?

왜 아직도 진상을 모르는 공안, 검찰, 법원 사람들은 여전히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에 참여하고 있는가?

왜 끊임없이 발생하는 수많은 보응이 아직도 악인들의 양심을 일깨워 주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번 박해를 시작한 장쩌민이 아직도 법률의 제재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장쩌민을 법에 따라 처리해야만 신앙 자유가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은 진상을 알게 되어야만 더 이상 박해에 참여하지 않고 응보의 징벌을 피할 수 있으며, 아이들도 비로소 도덕의 규범 아래에 즐겁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장쩌민을 고소해 더욱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되도록 빨리 진상을 알게 하여 중국에 거짓말과 폭력이 없는 세상을 되찾아 주기로 결심했다.

문장발표: 2015년 9월 24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24/3162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