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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타포 총구 앞의 중국 여인’을 읽은 독후감

글/ 중국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에서 1944년까지,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던 벨기에와 프랑스북부 작전지역의 최고 책임자인 군정사령관을 지낸 사람이다. 그가 1934~1938년까지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당의 군사고문으로 있을 당시 첸슈링(錢秀玲)의 사촌오빠 첸줘룬(錢卓倫)과 알게 됐다. 첸줘룬은 첸슈링이 벨기에로 유학 갈 당시에, 나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녀에게 팔켄하우젠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게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됐다.

1940년 5월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해 점령했다. 당시 첸슈링은 벨기에로 유학을 가서 한 지방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지역 벨기에인 로저가 저항 운동에 참여해독일군 군용열차가 통과하는 철도를 지뢰 매설로 폭파시킨 후 체포돼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첸슈링은 정의감이 불타올랐다. 중화 전통문화가 몸에 밴 그녀는모든 벨기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웅’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우연히 신문에서 사촌오빠와 절친했던 팔켄하우젠의 이름을 보게 됐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불을 끄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정성을 들여 편지 한 통을 썼다. 인도주의 차원에서 로저가 교수형을 면하도록 힘써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였다. 그녀는 이튿날 아침 자신이 쓴 편지와 사촌오빠의 편지를 지니고 첫 차로 160km 떨어진 수도 브뤼셀로 갔고 천신만고 끝에 팔켄하우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팔켄하우젠은 잠시 주저하다가 ”방법을 찾아보지요. 한 번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 로저는 기적적으로 특별사면을 받게 됐다. 첸슈링이 사람을 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역 내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서 ‘첸슈링은 사랑스러운 중국 여인이자 영웅’이 됐다.

1944년 6월 7일 또 인근 지역에서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인게슈타포 3명이 지하 레지스탕스 대원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독일군은 광적인 보복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을 청년 97명을 무조건 체포한 후 현지 주민들을 향해 “범인을 지목하지 않으면 제비뽑기 식으로 한 번에 15명씩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주민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초조하게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또 누군가가 첸슈링을 생각해 냈다.

당시 첸슈링은 임신(첫째 딸) 중이었다. 그녀는 큰 배를 안고 밤새도록 기습공격과 유탄의 위험을 무릅쓰고 브뤼셀로 갔다. 팔켄하우젠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온 이유를 알았다. 일은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3일째 되는 날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97명은 기적적으로 또 석방됐다. 그러나 며칠 후 팔켄하우젠은 베를린으로 송환됐다.

밸기에 정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첸슈링의 정의로움을 치하하는 ‘국가영웅훈장’을 수여했고, 벨기에 국왕과 왕후는 ‘가장 사랑하는 기념사진’이라고 서명한 사진을 그녀에게 증정했다. 지역 주민들은 ‘여장부’ 첸슈링을 잊지 않기 위해 한 중심 지역 도로를 ‘첸부인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팔켄하우젠은 독일로 소환된 후 게슈타포에 체포돼 반동분자로 법정처벌을 받게 됐다. 그러나 전쟁은 막바지에 달해 수도 베를린마저 함락되자 독일군은 투항하게 됐고 이어서 팔켄하우젠도 전범으로 미군 연합군에 넘겨졌다. 그는 그 후 1948년 벨기에로 인도됐고 이어서 독일과 벨기에서의 나치 군정사령관 등 직책 역임에 따라 1950년 A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게 됐다.

첸슈링은 팔켄하우젠의 재판소식을 듣고요처를 찾아다니며 구명 운동에 나섰다. 그녀는 자신을 통해 구원됐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연대서명으로 구명 탄원서를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 언론을 통해 팔켄하우젠의 구명을 위한 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녀는 기자들에게, “그는 침략자였지만 벨기에 사람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다했다. 그는 인도주의에 입각해 나를 포함한 많은 벨기에인들을 죽음에서 면하게 했다”라고 역설하고 또 “지금 이 시점에서 그는 전체적인 면에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가 2차 대전 때 벨기에 사람을 위해 좀 일을 했다고 해서 국가에서 훈장을 수여했는데, 그건 바로 팔켄하우젠이 죽음을 무릅쓰고 노력해 주었기 때문에 이뤄진 성과”라고 강조했다.

첸슈링은 죽음 직전에 살아났던 벨기에인들과 함께 팔켄하우젠이 재판받는 법정에서 증언했다. 결국 팔켄하우젠은 극형을 면하고 다만 독일군 점령지 사령관이었다는책임으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팔켄하우젠이 수감됐을 당시 나치독일에 저항했던 벨기에의 한 여자 영웅 시실라 윈터가 팔켄하우젠에게 먹을 것, 입을 것 등 필요한 물품을 넣어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팔켄하우젠이 3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중도에서 석방되자 함께 독일 본으로 돌아가 정착해 살았으며 팔켄하우젠은 1966년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을 보고 정의감 있고 또 용감했던 중국 여성 첸슈링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란 이 독일 사령관의 인도적인 의거에 대해 더욱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벨기에를 점령한 나치독일 군정사령관으로서 그런 정의로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람에게 분명하게 계시해 주는 천리가 있다. ‘인과응보’라는 천리다. 팔켄하우젠은 정의로운 의거 때문에 결국 게슈타포에게 체포되고 나치법정에 보내져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계산은 하늘의 계산을 따르지 못한다. 그 순간 2차 대전이 종료됐고 그는 반대로 첸슈링의 도움으로 극형의 위기에서 겨우 3년만 복역한 후 석방됐다. 더구나 그의 의로운 행동에 감명 받은 벨기에 여자 영웅의 사랑을 받은 후 행복과 장수를 누리며 인생의 만년을 보낼 수 있었다.

바로 이 이야기로부터 오늘날 공산당 치하 중국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 중국공산당의 공안, 검찰, 법원 등 공무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파룬궁 수련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통해 무슨 계시라도 받았는가?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것처럼 또 파룬따파(法輪大法)에 대한 박해도 종료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고 그 시기도 멀지 않았다.

불법(佛法)을 박해하면 그 죄는 하늘과 같다고 했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악의 우두머리 밑에서 박해를 가한 자들에게 거듭 진상을 알리며 구도될 기회를 주셨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악의 두목 장쩌민을 따랐던 박해자들이 최대의 피해자들인데 특히 경찰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는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바로 경찰, 당신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들로부터 고문을 받으면서도 입이 닳도록 진상을 알렸다. 그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대법제자 박해에 참여하고 있는 경찰관들에게 고한다. “어서 깨어나라! 장쩌민은 당신들을 해친 괴수다. 대법 사부님은 당신들이 구도되기를 고대하신다.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한지 분간해야 한다! 펜을 들어 장쩌민을 고소하라! 자신의 존엄과 인격을 되찾으라. 가명으로라도 탈당해 자신에게 미래를 남기라! 이는 우리 사부님과 모든 대법제자들이 희망하는 것이다!”

문장발표 : 2015년 9월 16일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16/3156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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