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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낙마 물결(高官落馬潮), 현세응보가 왔다

-파룬궁 박해 15주년을 맞이하여

글/어우양페이

[밍후이왕] 부패한 관원이라고 모두 다 파룬궁을 박해한 것은 아니지만, 파룬궁을 박해한 관원은 틀림없이 부패할 뿐만아니라 심하게 부패한 것이다. 말하자면 아주 간단한 도리인바, 장쩌민 무리와 영합해 정치적 입지를 다져서위로 오른 사람이라면성품이 나쁜,속된 말로 바로 소인이다. 이런 사람이 탐오하지 않는다는 게 도리어 괴상한 것으로 틀림없이 대탐관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계에서 장파 무리를 따른 사람은 최대의 비호세력을 둔 것으로,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범죄를 저지를 담이 커졌다.

2년 전, 충칭에서는 창홍타흑(唱紅打黑)을 한 보시라이의 기세가 아주 컸다. 파룬궁 박해로 십여 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잇달아 기소당한 인권 망나니 보시라이의 벼슬길이 마치 상승세를 탄 것 같았다.

‘서유기’에 “사람 마음에 일념 생기자 천지가 다 아네. 선악에 응보가 없다면 건곤에반드시 사적인 것이 있느니라.” 즉, 응보를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시기가 안 된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2012년 2월 6일, 보시라이의 졸개 왕리쥔이 쓰촨성 청두 미국총영사관으로 탈출하면서 중국 정계에 대지진을 일으키며 보시라이의 킬러가 되었다.

왕리쥔

중국 제1 경찰이라고도 한 왕리쥔은 부부급 고관이다. 진저우 공안국 국장재임 시 ‘진저우 현장 심리연구센터’를 설립하여 장기실험을 했다. 왕의 장기 숙주실험 논문이 상을 받았는데 그는 수상식에서 “우리의 과학기술 성과는 몇천 개 현장을 집약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2년 남짓한 시간에 그 몇천 개의 인체 장기의 내원은 어디인가? 파룬궁수련생의 생체에서 적출한 것이다. 왕리쥔의 현장 실험은, 동북을 강점했던 일본인이 생체 실험한 ‘731 병원‘을 떠올리게 한다. 2009년 왕리쥔 수하 경찰이었던 목격자는 파룬궁수련생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했음을 증언하며 왕리쥔이 파룬궁에 대해 “반드시 깡그리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보시라이

왕리쥔의 주인은 보시라이다. 보시라이는 파룬궁 박해 ‘최선봉’에 섰다. 그는 왜 한사코 파룬궁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홍콩 ‘문회보’ 전직기자였던 장웨이핑(薑維平)이 2009년에 쓴 칼럼 ‘보시라이는 왜 파룬궁을 사납게 타격하는가?’에서 폭로했다. 한 번은 그와 이야기하던 중 보시라이가 가장 신임하던 기사인 다렌시 정부기관 차대 반장인 왕모모에게 물었더니, 장쩌민이 랴오닝 순시 때 당시 다렌시 시장이던 보시라이에게 “당신은 파룬궁에 대한 태도가 마땅히 강경해야 승진할 근거가 된다.”라고 넌지시 귀띔했다고 한다. 바로 권력욕에 눈먼 보시라이는 다렌시를 재빨리 파룬궁 박해 중점지역으로 만들었다. 가장 먼저 대형 감옥과 노교소를 확장 신축했다. 다렌 감옥, 난관링 감옥, 진저우 감옥, 와팡덴 감옥, 좡허 감옥, 저우수이즈 노동교양소, 야오자 구치소, 그리고 국제적으로 오명을 떨친 마싼자 노동교양소 등에 베이징 청원을 갔다가 불법 체포된 파룬궁수련생을 대량으로 받아들여 박해했다.

보, 왕 사건에서 폭로된 정변음모는 막후의 흑수인 저우융캉을 끌어내렸고, 잇따라 ‘큰 호랑이’를 잡는 와중에 저우융캉 배후의 ‘더 큰 호랑이’를 둘러싸고, 장쩌민을 따라 파룬궁을 박해한 그런 관원들의 현세응보가 차례대로 그들의 몸에서 나타나고 있다.

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쉬차이허우는 지금까지 낙마한 관리 중 최고위직 인사로 보와 함께 보수적인 집단이다. 정공 간부 출신인 그를 장쩌민이 군사위 부주석으로 발탁했다. 장쩌민의 ‘군대에서 가장 총애’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장쩌민의 군대에서 파룬궁 박해를 집행 관철한 유력한 간부였다. 선양 군구는 쉬차이허우의 근거지로, 선양 쑤자툰 역시 생체장기적출이 가장 먼저 폭로된 곳이다. 쉬차이허우는 총 정치부, 총 병참부를 담당했다. 군 병원의 장기이식 주관부서는 총 병참부 위생부(민간병원 주관부서는 국가 위생부)이다. 그러므로 그는 군이 주도한 파룬궁수련생 생체장기적출과 무관할 수 없다. 쉬차이허우는 군 장기이식 직속상관이다.

리둥성

보시라이처럼 리둥성의 출세배경도 사실 모욕 중상, 파룬궁 박해와 관련된다. ‘610사무실’(과거 중앙문화혁명 소조, 혹은 나치의 게슈타포 조직과 흡사)을 설립한 초기, 그 당시 중앙 CCTV 부국장이던 리둥성은 장쩌민 눈에 들어 박해부서인 ‘610′ 사무실 부주임이 되어 선전과 전향 사업을 책임졌다. 리둥성은 ‘초점방담’ 프로그램을 이용해 파룬궁을 먹칠한 대량의 거짓뉴스를 날조했다. 그 중 ‘천안문 분신자살 기만극’은 전형적인 대표작이다.

리둥성은 2000년 중앙 CCTV 부국장에서 일약 TV 방송총국 부국장으로 승진했고, 얼마 후 또 중공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발탁됐다. 2010년에는 경찰 정법경력이 전무한 리둥성이 또 한계를 뛰어넘어 공안부 부부장으로 발령받아 류징의 중앙 ‘610′ 사무실 주임을 넘겨받았다. (정부장급에서 8개 부부장 중 순위 두 번째다.)

리둥성이 중앙 CCTV에서 보도부 주임으로 근무할 때 사업상 저우융캉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저우융캉이 여자 앵커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왕샤오야(王小丫)를 소개했고, 왕샤오야는 현재 저우융캉의 아내인 쟈샤오예(賈曉燁)를 소개하여 저우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리둥성의 낙마에서 사람들은 놀랐다. 관방에서 비밀에 부쳤던 3가지 직무를 희한하게 강조한 것으로, 중앙 사이비교 문제예방과 처리, 지도팀 부팀장, 사무실 주임 (‘610’ 사무실) 그리고 국무원 사이비교 문제예방과 처리사무실 주임을 포함했는데, 그를 공안국 부국장 직무 앞에 놓음으로써 리둥성이 ‘610’ 두목이라는 신분을 폭로 강조했다는 점이다.

쑤룽

장시성 위서기 쑤룽의 낙마 소식도 외부를 떠들썩하게 했는데, 전국 정협 부주석으로 현직에 있었고 부국급 고관이기 때문이었다. 쑤룽은 일찍이 지린 본토에서 근무했고,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중공 지린성위 부서기를 역임했다. 1999년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 이른바 ‘파룬궁 문제 처리 영도 소조’ 조장을 맡은 그는 모든 성의 파룬궁 박해를 주최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의 눈에 든 그는 2001년 1월 칭하이성 성 위서기로 승진했고, 후에는 간수성 위서기로 갔다. 그 몇 가지 임기 중에 쑤룽은 장쩌민 집단의 파룬궁 박해 정책을 힘껏 집행했다.

대부분의 성 위서기에 대해서는 해외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쑤룽의 악명은 유달리 높았다. 2004년 11월 간수성 서기였던 쑤룽은 우방궈를 따라 케냐, 잠비아, 짐바브웨, 나이지리아 아프리카 4개국을 방문할 때, 해외 파룬궁수련생에 의해 잠비아 고등법원에 기소당했다. 그가 지린성 ‘610’ 사무실 두목 재임 기간에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모살, 혹형 시달림과 모욕죄로 고발당한 것이다.

2004년 11월 4일 오후, 쑤룽이 호텔로 돌아올 때 잠비아 고등법원 직원이 직접 그에게 법원호출장을 전했다. 그 후 그는 대오에서 떨어져 루사카에 머물렀다. 그는 8일 법원심문 때 출두하지 않아 ‘법정 모독죄’로 고소당했다.

법정심문의 날 오후 2시경, 호텔에 있던 쑤룽이 잠적하자 잠비아 경찰은 그를 체포하라는 체포령을 내렸다. 보도에 따르면 쑤룽은 중국 영사관 협조로 황망히 국경을 넘어 짐바브웨에 갔고, 다시 남아프리카에 잠적해 전전하다 중국 본토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막후 조종자 쩡칭훙의 비호로 여전히 벼슬길이 열려있었다. 그가 보응을 받지 않는 게 아니라 때가 되지 않았다. 그의 체포소식이 전해졌을 때 장시성 난창시는 폭죽 소리가 밤새 울리며 대탐관 쑤룽의 낙마를 환호했다.

완칭량

광저우시 위서기 완칭량의 낙마는 한 치의 조기 경보도 없이 진행된 희극이었다. 현지 매체는 1면 톱기사로 그의 정치 활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오후에 체포되어 조사받는다는 소식과 낙마 소식이 한꺼번에 보도되는 매체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회의에서 한창 완칭량의 강화 정신을 전달하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해 꺼내보니 완칭량이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회의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몰랐다……” 이는 사건 당일 광저우 공무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말이다. 대변인 ‘인민일보’마저 모두 완칭량이 “어리석게 놀면 언제든지 갚게 마련”이라며 조소했다.

완칭량은 60년대 출생이라 관직은 높지 않았지만, 파룬궁 박해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밍후왕에는 몇 년 전 일찍이 완칭량의 파룬궁 박해 사례가 올려져 있다, 완이 성단 위서기로 있을 때(2000~2003년)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광둥 청년과 학생들에게 파룬궁을 모함하는 각종 선전 활동을 벌였다. 이를테면, 반 X교 (중공이야 말로 진정한 사이비교) 적발 비판 대서명, 충성표시 선서, 청소년에게 강제로 광범위하게 ‘보증서’, ‘결렬서’를 쓰게 했고, 매체와 협력하여 민중에게 대량 중공의 거짓말을 주입했다. 2003년 후 완은 제양시 서기 재임 시 이른바 ‘덕육기지’를 건립해 제식훈련을 한다는 명의로 제양시 관할 범위의 현, 시, 구의 중학생을 속여 강제세뇌를 감행했다. 완칭량은 파룬궁을 박해하는 사악세력의 선두에서 함부로 체포, 구금, 소란, 혹형, 괴롭히도록 지휘하는 외 제양 파룬궁 수련생을 살해하기도 했다.

저우융캉

저우융캉은 파룬궁 박해 원흉 중 한 사람으로, 해외에서 파룬궁 수련생에게 2번째로 기소당한 악인이다. 2001년 8월 27일 오후 3시경, 당시 스촨성 위서기 저우융캉이 미국 시카코를 방문했을 때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당했는데, ‘고문피해자의 보호에 관한 규정’과 ‘외국인 불법행위 보상 조례’ 위반혐의였다.

저우융캉은 억만 명이 거주하는 스촨을 단 몇 년 만에 파룬궁 박해가 가장 심각한 성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는 파룬궁 박해의 무고한 선혈로 장쩌민에게 잘 보여 벼슬길을 열었고, 2003년에는 공안부 부장이 되었다. 박해를 유지하기 위해 장쩌민은 또 저우융캉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넣어 뤄간의 정법위 서기를 넘겨받아 알짜 ‘인권살인자’가 되었다. 그는 중국의 ‘패리아(貝利亞)‘였다. 안정유지란 명분으로 곳곳에서 원망이 끊이지 않게 중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방송국 보도를 따르면, 저우융캉은 현재 내몽고에 수감되어 있으며, 그의 큰아들 저우빈도 같은 곳에 갇혔다고 한다. 관영방송은 아직 저우의 행방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 ‘큰 호랑이’의 발톱은 이미 포위토벌을 당했고 공식발표는 단지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현재 저우융캉의 일부 측근들도 체포당했는데, 그들은 저우와 함께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파룬궁 박해에 동참하여 현세현보로 저우융캉의 순장품이 된 것이다.

쩡칭훙

최근 소식통을 따르면, 장쩌민의 ‘제1 군사’이며, 전 중공 국가 부주석인 쩡칭훙이 이미 체포돼 텐진에 갇혔다고 한다. 이에 앞서 쩡칭훙의 부하들은 이미 대대적으로 청산 당하고 처리되었다.

장쩌민이 1999년 7월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공산당 간부와 대중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쩡칭훙, 뤄간 등은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를 최초로 지지한 소수의 정치 기회주의자이다.

1999년 7월 23일, 공개적으로 박해한 지 3일째, 쩡칭훙이 주관한 중공 조직부서 책임자 명의로 ‘인민일보’ 담당 기자들과 전당이 파룬궁 박해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고, 파룬궁 박해 여론을 조성했다. 그 후 쩡칭훙은 조직부에서 수차례 발표한 담화에서 각급 당위와 조직 부서에 파룬궁과의 장기 투쟁에 참여할 것을 선동했고, 파룬궁 타격과 파룬궁 수련생을 전향할 것을 요구했다. 그뿐만 아니라 장쩌민, 쩡칭훙, 뤄간 집단은 2001년 1월 23일 ‘천안문 분실자살 기만극’을 조작하여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우며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쩡칭훙은 장쩌민의 집정 당시 또 중공의 방대한 특무계통을 통제했다. 중공은 해외에서 암암리에 매체와 언론인을 통제해 주기적으로 파룬궁에 대해 침범하며 소란을 일으켰다. 현재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량전잉 마저도 쩡칭훙이 직접 양성한 특무였다. 특무두목 쩡칭훙은 중공 당내에서 두 번째 캉성(康生)으로 불리고 있다.

* * * *

고관들이 줄줄이 낙마하는 게 표면적으로는 중공의 내부 권력투쟁이고 정적을 없애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장쩌민을 따라 파룬궁을 박해하여 당한 응보이다. 인간의 일체는 모두 천상의 체현으로서, 파룬궁 박해에 참여한 고관이 줄줄이 낙마하는 배후에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선악에 응보가 따른다’는 천리다. 아직도 혈채가 가득 묻은 사람이 응보를 받지 않고 있는가? 안 받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아직 되지 않은 것이다.

응보는 목적이 아니라 하늘의 일깨움이다, 아직 응보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낭떠러지에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면 피안임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죄악이 하늘에 사무친 그런 사악한 우두머리들은, 어쩌면 이젠 머리를 돌릴 기회조차 없을 것이며, 오로지 더욱 큰 응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응보를 말하면 사람들은 역사에서의 진회(秦檜)를 잊을 수 없다. 진회는 악비를 살해하고자 아내 왕씨와 동쪽 방에서 상의했다. 왕씨가 말했다. “범을 잡기는 쉬워도 놓아 주었다가 그를 다시 잡기는 매우 어려워요,” 그리하여 진회는 악비를 살해하기로 했다. 후에 진희는 서호에서 놀다 배에서 잠이 들었다. 꿈에 머리를 길게 드리운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라와 국민을 해쳤기에 내가 이미 하늘에 알렸다. 하늘에서 사람을 보내 너를 잡아갈 것이다.” 진희는 몹시 두려웠다. 집에 돌아온 후 크게 앓더니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진희가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아 그의 아들 진시도 죽었다. 왕씨는 신안을 설치하고 도사를 청해 귀신을 쫓게 했다. 도사는 하늘에 표를 받쳐 들었다. 흐릿한 가운데 진시가 목에 형틀을 목에 건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태사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귀신 도시 펑두에 있다”고 진시가 대답했다. 도사는 진시가 한 말에 따라 펑두로 가니 과연 진회가 보였다. 모치설(萬俟卨)도 모두 칼을 쓰고 있었는데 각종 형벌을 다 받았다. 진회가 말했다. “미안하지만내 부인에게 동창에서 악비를 살해하려 밀모한 일이 폭로됐다고 전해 주시오!”

영원히 악명을 남긴 진회부부

이것이 바로 ‘죄악이 폭로되다’(東窗事發)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다. 영원히 악명을 남기고 버려진 채 꿇어앉은 진회부부의 모습이 일종의 응보가 아니란 말인가?

문장발표: 2014년 7월 20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7/20/2949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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