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상편에 이어)
역사상 천리를 믿지 않고 함부로 하는 그런 사람은 스스로 총명한 체 하면서 자신이 못된 짓을 해도 천벌을 받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같은전철을 밟았으며 후세에 심각한 교훈을 남겼다.
5. 최후의 발악과 참회
박해에 직면해 기독교 신자는 견인불굴 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선을 권하고 도를 말했으며(勸善講道),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원수를 가엾게 여겼고 심지어 사형되기 전에도 여전히 그들을 박해한 사람을 위해기도해 주었다. 대 역병 중에서 세인은 병이 전염될까 두려워 앓고 있는 친인을 문 밖에 쫓아냈지만, 기독교 신자들은 오히려 자신을 돌보지 않고 거리에 나가서 환자를 보살피고 병을 치료해 주었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기독교 진상)하고 기도해 주었으며, 사망자에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와 같은 신성(神性)의 체현은 사람더러 정신(正信)의 위대함을 보게 했고,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모함이 시장을 잃게 했다.
기독교는 박해당하는 가운데서 반대로 발전 장대해졌고 기타 종교의 질투와 미움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역병은 당국이 정신 신앙자를 박해하여 하늘의 징벌을 당한 것이라고 알려 주었지만 다른 종교와 일부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도리어 역병과 역병으로 조성된 국가 쇠락을 기독교란 이 한 무리 ‘이교도’(異教徒)의 존재로 돌리면서 끊임없이 중상모략하고 정부를 종용해 그들을 박해하게 했다. 드디어 기독교 사상 최대의 박해를 초래하게 되었다.
서기 292년, 재위한지 8년 되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는 로마를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매 부에 정, 부 두 제왕을 두고 땅을 나누어 통치하게 했는데 즉 4제왕이 함께 통치하여 제국이 붕괴될 위기를 완화하려 했다. 당시 기독교는 이미 600여만 명으로 발전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인과 많은 시자들마저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재위한 초반에는 기독교 신자에 대해 그래도 너그러웠고 후에는 자신을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봉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는 자신이 신앙하는 주와 신만을 승인하였기 때문에 이는 제왕의 권위와 체면을 건드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위 갈레리우스(Galerius)는 부왕이었는데 기독교를 없애버리라고 줄곧 그를 꼬드겼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역사상 있어본 적 없는 탄압을 시작했는데 기독교 서적을 불사르고 교회당을 허물며, 재산을 몰수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과 직접 선을 그었는바, 기독교를 믿으면 곧 잡혀 혹형 시달림을 받을 것이며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그때 로마정부는 도시 구역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을 엄금해서 사람들은 도시 밖에 매우 많은 좁고 길다란 굴을 팠다. 기독교 신자들은 바로 이런 미궁과도 같은 묘도 속에 숨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대량의 군대를 파견하여 묘혈을 파헤치고 수색 체포하였으며 근멸하여 후환마저 없애버리려 했다.
2년을 발광한 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건강이 악화되어 퇴위했다. 서기 305년, 갈레리우스가 제왕이 되었고 흉악한 박해는 또 6년을 지속했다.
서기 310년, 갈레리우스는 괴상한 병을 얻어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고통 속에 1년을 시달린 후 그는 끝내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외치면서 진심으로 참회했다. 그는 병상에서 조서를 내려 그의 동 로마 관할 구역 내에서의 기독교 금지령을 취소했다. 기독교 신자에 대한 모든 박해를 중지하고 기독교 신자의 집회를 회복하였으며, 아울러 기독교에 귀의했다. 며칠 후 갈레리우스(Galerius)는 홀가분한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6.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의 부친은 로마제국 서부의 부제(副帝)였다. 최고 제왕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신자에 대한 정책에 직면해 그들 부자는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서기 306년 부친이 병세한 후, 콘스탄티누스는 통일 전쟁을 시작해 312년에 서 로마를 통일했다. 313년, 그는 동 로마의 제왕 리시니아누스(Licinianus)와 함께 밀라노 칙령에 서명해 더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으며, 몰수한 재산을 돌려준다고 했다.
이로서 고대 로마의 300년 동안의 신앙에 대한 박해가 실패로 끝났다. 이 기간, 견인, 선량, 무사(無私)적인 기독교 신자는 유언비어와 박해 가운데서 진상을 전하고 정의, 정신의 씨앗을 뿌리면서 기독교를 부단히 발전 장대 시켰다.
콘스탄티누스 제왕의 조각상
서기 323년,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왕 리시니아누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을 다시 통일했다.
하지만 고대 로마제국의 운명은 이미 만회할 수 없게 되었다. 필경 300년 신앙을 박해하고 신자를 학살한 죄악은 너무나 컸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한 후 제국 분열로 또 다시 혼란과 위기에 빠져 나중에는 붕괴로 가게 되었다.
7. 역사의 계시
기독교 신자를 잔혹하게 박해한 고대 로마 제왕, 그들의 액운은 중국 역사상 불교를 박해한 4명 황제(삼무일종 멸불)와 결말은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같다.
자고로 신앙에 대한 박해는 여태껏 성공한 적이 없다. 근년에 중공 장쩌민(江氏) 집단은 또 스스로 총명한 체 ‘진선인(真善忍)’의 파룬따파(法輪大法) 신앙자를 박해하는데 마치 고대 로마의 기독교 신앙 박해를 복제한 듯하다. 단지 더욱 위선적이고 더욱 은폐적이며, 더욱 사악할 뿐이다. 세뇌, 체포, 감옥, 혹형 등 각종 박해가 모두 제거하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자, 중공은 대규모의 파룬궁 생체 장기 적출을 시작하여 폭리를 챙기고는 시체를 화장하여 증거를 없앴다. 하늘을 경악케 한 이 죄행이 국제적으로 폭로된 후 국제 사회의 일치된 비난을 받았다. 대량의 증거와 증인에 맞서 중공 당국은 할 말이 없게 되자 결사적으로 소식을 봉쇄하고 죄행을 덮어 감추었다.
1999년 7월부터 중공은 전국적인 힘으로 파룬궁 신앙을 박해했고, 2003년 1월에 이르러 역병이 발견됐는데 후에 ‘사스‘로 진단됐다. 그때의 공포스런 장면은 중국 사람에게는 기억이 생생하다. 강대 무적이던 고대 로마 제국은 역병 중에서 쇠망하고 붕괴됐다. 오늘의 역병 유전자 변종 속도는 백신의 대응을 훨씬 초과하고 있으며, 역병의 칼은 또 한 번 눈앞에 닥쳤다.
누가 역사 규율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중공은 건국 이래 각종 운동을 발기해 80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번의 신앙을 박해한 운동에서 놀랍게도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고 비밀리에 살해했는데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 이는 어떠한 하늘의 징벌을 자초할 것인가? 인민에게 어떠한 재난을 가져다 줄 것인가? 폭정적인 중공은 어떻게 막을 내릴 것인가?
고대 로마의 비극은 후세 사람에게 경고한다, 정법 정신을 박해하면 하늘의 징벌을 자초할 것인즉 매 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모두 박해 중에서 박해를 도왔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청성하게 진상을 대한 사람만이 비로소 비극과 액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 또 다시 역사의 관건 시각으로 되돌아왔다. 수난 중의 대법은 매 사람에 영향 주며, 매 개인의 태도는 자신의 운명, 실패와 성공, 흥성과 멸망, 악과와 복, 치욕과 휘황을 결정할 것이며, 모두 일찍 역사에서 시연한 것으로서 또한 미래에서 모두 실현될 것이다. 끝.
문장발표 : 2014년 5월 1일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5/1/2905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