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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의 통찰력

글/ 리지란

[밍후이왕] 추안핑(儲安平)씨는 일찍이 광명일보 편집장이었고, 중공(중국공산당) ‘반(反)우파’ 때 3대 우파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57년 6월 2일, 그의 문장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께 드리는 의견’이 ‘인민일보’와 ‘광명일보’에 발표됐다. 문장은 아주 예리하여 중공 일당 독재의 급소를 찔렀다고 할 수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이 문장은 모택동을 ‘며칠 간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문장에서 그는 공산당 ‘당 천하’의 개괄에서 중공 독재정권의 본질에 대해 심도 있게 폭로했다.

1947년, 국공 전쟁이 시작되자 추안핑 씨는 공산당이 당시 선전한 ‘민주’는 실질상 ‘당주’(黨主)라고 분석했다. 왜냐하면 어떠한 다른 의견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산당 통치하에서는 자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지금 얻은 자유는 국민당 통치하에서는 이 ‘자유’가 그래도 ‘많고’ ‘적은’ 문제로 되지만 만약 공산당이 집정한다면 이 자유는 ‘있다’ ‘없다’의 문제로 변할 것이다.”

추안핑 씨가 세상을 뜬 지도 약 50년이 되는데, 예전의 그의 중공에 대한 논단을 되돌아 살펴보면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다.

일찍이 베이징대학 총장이며, 중앙연구원원장이었던 호적(중국 교육사상가, 학자: 1891~1962)은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마오쩌둥은 그에게 쓴 편지에서 ‘당신의 학생 마오저뚱’이라 자칭했다. 1948년 12월, 베이징이 중공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중공의 방송국은 전문적으로 ‘호적 선생에 대한 방송’을 하면서 그가 베이징을 떠나지 말기를 바랐고 그가 계속 베이징대학 총장과 베이징도서관 관장을 맡을 수 있다는 약속을 했으며, 또 베이징대에 잠복한 지하당을 특파하여 면전에서 그를 권유하게 했다. 하지만 호적은 단호히 이제 막 중공의 손에 함락될 베이징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호적은 아들 후사두(胡思杜)도 함께 가자고 했으나 그는 “나는 공산당을 해친 일도 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나를 어쩌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호적은 왜 중공 통치하에서 관직을 갖지 않으려 했는가? 호적은 1950년 1월 9일 발표한 ‘공산당 통치 하에서는 자유가 없다’란 글에서 한 방면으로부터 중공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밝혔다.

그의 아들은 대륙을 떠나는 부친을 따라가지 않았는데, 곧바로 중공에게 성공적으로 개조 당해 그 조직에 호적이 그에게 남겨 준 재산을 바쳤고 또 ‘나의 부친- 호적에 대한 비판’이란 글을 발표하여 호적과 경계선을 그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호적은 말했다. “공산주의 국가에는 언론자유가 없음을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침묵을 지킬 자유마저 그곳에 없음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후스두가 중공을 따른 것이 진심이든 핍박이든 막론하고 나중에는 결국 중공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쓸모없게 되자 중공은 그를 죽음에로 밀어냈다. 1957년 중공 ‘반 우파’ 때 그는 곧바로 ‘우파’로 몰렸고, 타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57년 9월 21일 목을 매 자살했다.

의심할 바 없이 호적은 아주 현명하여 대륙에 남지 않았다. 대륙에 남았더라면 그의 결과는 오직 두 가지뿐으로, 시달려 죽지 않으면 곽말약(郭沫若)처럼 자신의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중공에 부화(附和)돼 자신의 아들이 중공에 살해당해도 아무런 의견도 발표하지 못할 것이다. 추안핑도 아주 통찰력이 있다. 하지만 중공이 온갖 수단을 다해 나쁜 짓을 함을 번연히 알면서도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중공 두목에게 의견을 제출했는데 이는 물론 한 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풍격이긴 하지만 중공의 통치 하에서 그에게는 다만 비극적인 끝장만 있을 뿐이었다.

지난 세기 20년대에 공산사악주의를 가장 투철하게 보아낸 중국 사람으로는 장개석을 꼽을 수 있다. 1923년 8월 16일, 장개석은 ‘순이센(孫逸仙)박사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에 가서 현지 시찰했다. 가기 전에 장개석은 소련 공산당을 지향했고, 공산주의에 미련을 가졌다. 3개월 현지 시찰 후 장개석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장개석은 ‘중국에서의 소련 러시아’ 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소련에 가기 전, 나는 여전히 우리 국민 혁명에 대한 러시아 공산당의 원조는 나를 평등하게 대해주는 솔직함에서 나온 것이지 사적인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내가 소련에 와 시찰한 결과 나의 이상과 신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본 당의 연아용공(聯俄容共-소련에 협력하고 공산당을 용인함) 정책에 대하여 결정을 내렸다. 비록 서방 식민 통치에 한 때 대항하긴 해도 독립 국가 자유의 목적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 소련의 이른바 ‘세계혁명’의 책략과 목적은 동양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서방식민지주의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됐다.”

장개석은 말했다. 소비에트 러시아 혁명은 두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는 계급투쟁이고 하나는 민중을 쟁취하는 것과 무장 폭동이다. 그들 혁명의 성질은 계급을 본위로 하는 이상 그들의 혁명방법은 당연히 계급투쟁이다. 그들은 전 사회를 수많은 대립적 계급으로 나누었고, 그들은 계급투쟁을 사회진화의 원동력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계급적 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다면 그들은 그것이 뚜렷해지게 하며, 계급적 충돌이 격렬하지 못하다면 그들은 그것이 격렬해지게 한다. 그들은 오직 무산계급이 나머지 일체 계급을 타도해야만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이는 그들 혁명의 한 가지 방법이다. 이밖에 그들은 또 민중을 쟁취하고 무장폭동을 하려 한다. 그들은 혁명세력을 발전시키자면 위대한 민중의 옹호가 없이는 안 되며, 민중은 공산당 지휘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강간, 약탈하고 살인 방화하여 사회가 혼란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한다. 그런 다음 위협 유인하는 방법으로 민중을 쟁취하여 그들의 노예로 만든다. 민중을 쟁취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이미 민중을 인류로 여기지 않는다. 번지르르한 말을 늘여놓고 멀고 먼 장래의 이익으로 민중을 유인하여 그를 위해 충성을 다 하게 한다. 또 정치 역량으로 민중을 강박하여 그의 지휘를 따르게 한다……

장개석의 깨달음은 오늘에 봐도 마디마다 마음의 충격을 받게 한다. 백 년의 중공 폭정에 대한 예견은 매우 정확했다. 바로 그가 ‘소련의 정치제도는 여전히 전제와 공포적인 조직’이란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일체는 소비에트 말을 듣는 중공과 결사적인 격투를 벌이게 했던 것이다.

더욱 사람을 놀라게 한 사람은 일찍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창시자이자 우두머리 중의 한 사람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이다. 그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어버이라 불렸고 또한 레닌의 스승이었으며, 마르크스,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출판했다. 1999년 11월, 플레하노프의 유서가 파리은행의 금고에서 나왔다. 이 유서는 1918년 5월에 쓴 것인데 다시 말해서 러시아 ‘10월 혁명’ 후 반년이 안 되는 때였다. 플레하노프는 유서를 써서 파리은행의 금고에 넣었고 아울러 유언을 남겼다. “나의 유서는 러시아 볼셰비키가 집정할 때에는 발표되지 못한다. 러시아 볼셰비키와 러시아 볼셰비키 국가가 없어졌을 때라야 나의 유서를 공포할 수 있다. 그런 후 얼마 안 되어 그는 세상을 떠났다. 1999년 파리은행에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게 강탈 당한 유태인의 재산 서류를 정리할 때 그것을 발견했다. 파리은행은 편지 봉투에 쓰인 약정에 따라 편지를 러시아에 넘겨주었다. 왜냐하면 편지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봉투를 개봉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플레하노프의 유언은 오늘날 모든 사람을 극도로 경악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진실했고, 소비에트 연방 역사에 완전히 부합됐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의 역사학자에게 총괄하라 해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유서는 이렇게 썼다.

1.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지식인의 대열은 무산계급 증가보다 더 빠를 것이며. 생산력 중의 작용은 일약 첫 자리로 도약할 것이다. 전기(電氣)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무산계급 전정(독재) 이론은 때가 지날 것이다.

2. 볼셰비키의 무산계급 전정(독재)은 일당독재로 재빨리 변할 것이고 다시 영수 독재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기만과 폭력 기초 상에 건립된 사회는 자체에 자아 훼멸의 폭탄이 포함되어 있어 일단 진상이 드러나기만 하면 즉시 무너질 것이다.

3. ‘볼’당은 순서대로 4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 기근위기, 의식형태 위기, 사회경제위기와 붕괴위기, 마지막으로 정권이 산산이 붕괴될 것이다.

4. 국가의 위대함은 그의 영토, 심지어 그의 역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전통과 국민의 생활수준에 있다. 국민이 아직도 가난하고, 민주가 없다면 국가는 동란이 일어나지 않고, 붕괴에 이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학계의 거인부터 이당(異黨)의 영수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공산 정권 자신의 창시인 마저도 모두 공산 사당의 정권에 대해 투철한 인식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을 경탄케 한다. 지난 세기, 공산사악정권은 암세포처럼 세계에서 한 시기 기승을 부린 후 재빨리 붕괴에로 달렸다. 오늘의 공산사악 정권은 확실히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는바, 붕괴는 순식간에 있을 것이다.

문장발표: 2013년 8월 21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8/21/2784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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